◈723화. 반응 (4)
“흐음.”
양천이 술잔을 들었다.
그 앞에 부복한 황석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술잔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양천이 그대로 잔을 비웠다.
“그랬군.”
“…….”
“확실히 보고는 다각도로 들어 봐야 해. 연 부관의 보고서야 워낙 사실 관계가 확실하지만, 황 단주의 시선으로 본 당시의 상황을 들어 보니 또 다르게 와닿는구먼.”
“송구하옵니다.”
“해서.”
양천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연 부관과의 여행, 재미는 있었나?”
황석태가 읍하며 말했다.
“저는 부주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 그러한 여정에서 재미보다는…….”
“나의 명령은 연 부관을 도와 이번 명령을 완수하라는 것이었지.”
“예?”
“다만, 정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 하였네.”
“…….”
“하지만 자네는 도망치지 않았군. 연 부관과 함께 열심히 싸웠어.”
“…….”
“반드시 뛰어들어야 한다는 판단이 섰기에 움직였겠지. 가슴은 철렁하지만, 자네의 분투 덕분에 종남파도 위기를 넘겼으니 이는 참으로 잘된 일이야.”
황석태는 당황했다.
자네 덕에 종남이 위기를 넘겼다. 말은 좋지만, 달리 보면 정파 백도의 거두인 종남파를 굳이 도와줄 필요가 있었냐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양천은 황석태의 당황을 한 눈에 알아챘다.
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아, 뭘 그리 당황하고 있나?”
“…….”
“설마하니, 내가 종남의 병력을 도와 외세를 물리친 자네를 질책이라도 할 것 같았나?”
“……아닙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종남은 구파일방의 일각이야. 구파일방은 정파 무림의 거두이며, 당금 무림맹을 이루는 핵심 집단이지. 만약 종남이 무너졌다면 무림맹도 크게 흔들렸을 것이고, 강경파가 득세하여 무리하게 적들과 교전하려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일세.”
“…….”
“우리는 그런 무림맹과 동맹을 맺었어. 당장 우리만으로 놈들을 쓸어 버릴 수 있다면 굳이 동맹을 맺을 필요도 없었겠지. 자네가 종남을 진두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의 든든한 아군이 될 전력을 보존했다는 뜻이야.”
“…….”
“큰일을 해냈네. 그간 무수히 많은 훈련과 실전으로 단련된 용아철기단의 수장다운 능력이었어. 잘했네.”
황석태가 눈을 감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허허. 다만…….”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멋진 활약을 한 것은 다행이나, 다음부터는 적당히 몸도 사리게. 자네가 죽으면 뉘라서 철기단을 이끌 수 있겠나. 수장 없는 부대는 그저 뼈 없는 살덩이나 마찬가지야.”
“명심하겠습니다.”
“용아철기단은 본부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집단 중 하나지. 그런 부대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자네의 존재가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를 걸세.”
황석태의 얼굴에 감격의 기색이 비쳤다.
평소 꽤 무뚝뚝한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만큼 양천의 치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리라.
“여독이 잔뜩 쌓였을 텐데 보고까지 하느라 고생 많았네. 며칠 간은 푹 쉬도록 하게. 훈련은 각 조의 조장들에게 맡겨 둬.”
“명을 받듭니다.”
“이만 가 보게. 이에 따른 포상은 차후 내리도록 하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황석태가 양천에게 고개를 숙이곤 대전을 나갔다.
황석태가 나간 후,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내가 그렇게 못나 보였나?”
한옆에 서 있던 백서가 의아한 눈으로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한 일을 했는데도 괜히 눈치를 봐서 말이야. 순둥이 같은 종남 병력을 이끌고 적도들을 격파했다면 그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한데도 눈치를 보는군.”
백서가 읍하며 말했다.
“황 단주는 뛰어난 인물입니다. 다만, 황 단주를 비롯한 저희 모두의 주군은 부주님이십니다. 부주님의 능력과 성품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지만, 혹시나 하는 심경도 있겠지요.”
“그런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황 단주의 그러한 모습은 이상적입니다.”
“이상적이라니?”
“충성을 맹세한 군주를 두려워함은 당연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호오, 그런가.”
양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군주를 두려워한다…….’
그런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물며 묵룡부는 흑도 연맹이었다. 흑도는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곳, 그 기저에는 공포 정치가 진하게 깔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감정이 사람을 보는 눈을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이지.’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휘하에, 두려움을 느낄지언정 해야 할 일을 못 할 바보는 하나도 없으니까.
다만, 막상 이런 얘기를 들으니 연호정이 떠올랐다.
‘통찰력 있는 눈으로 이 양천이라는 인물을 하얗게 볼 수 있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적어도 녀석은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대단한 놈이긴 했다.
양천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마음 깊이 충성하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산다는 것.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슬픈 일이로군.”
백서는 당황했다.
“부주님.”
“하나, 자네 말마따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네. 묵룡부의 부주라서가 아니야. 이 양천에게는 그 외의 방법이 필요치 않아.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러는 게 맞겠지.”
“…….”
“그래서 참 미우면서도 반가운 건지도 모르겠군.”
백서는 그 미우면서도 반가운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차 잔을 비운 양천이 말했다.
“연 부관을 부르게.”
“명을 받듭니다.”
“녀석이 데리고 온 일행도 함께.”
“예?”
양천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녀석이 또 여기저기서 쓸 만한 인재들을 발굴해 데려왔다고 해서 말이야. 그 망할 놈이 탐을 낸 인재라면 꽤 그럴듯한 걸물들일 텐데, 얼굴 한 번쯤은 보고 싶군.”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연 부관을 부르겠습니다.”
“그러시게.”
잠시 후.
“부주님. 연 부관과 그 일행이 당도하였습니다.”
“들이게.”
쿠르릉.
대전의 문이 열리고 연호정과 묵비, 패율과 강량, 진양과 소정광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 중앙까지 걸어온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부주님을 뵙습니다.”
동시에 다섯 사람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양천의 눈이 반짝거렸다.
치이이익!
그의 몸에서 반투명한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주기를 몽땅 배출해 낸 것이다.
“오호라.”
양천의 눈에 깊은 흥미가 일었다.
“두 사람은 본 적이 있네만, 다른 세 사람은 처음 보는군.”
패율과 강량을 제외한 세 명을 말함이다.
연호정이 차례로 그들을 소개했다.
“여기는 묵비, 무림맹 의정군의 부장입니다. 저와 생사를 함께한 전우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진양과 소정광까지 짧게 소개한 연호정이 편하게 자리에 앉았다.
묘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던 양천이 이내 패율에게 말했다.
“완전히 벗어나 버렸구만, 자네는.”
패율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어렸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기도가 한층 매서워졌어. 이제는 이렇게 봐도 도무지 정파의 인물 같지가 않아. 자네의 무공 역시 크게 성장했지만, 무공의 성장보다도 그 기도의 변화가 훨씬 더 인상적이구먼.”
“…….”
“점창에서 나온다면 크게 우대하지. 어떤가? 본부로 올 생각이 있나?”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가만히 패율을 바라보던 양천이 이내 손사래를 쳤다.
“예나 지금이나 재미가 없구먼.”
패율은 끝까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깊고 깊은 눈으로 양천을 바라봤을 뿐.
양천이 강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돌파했군. 그 벽을.”
“그렇습니다.”
강량답지 않게 딱딱한 목소리였다.
오히려 이전의 강량은 양천을 부드럽게 대했다. 그의 손에 부모 형제를 잃고 문파를 잃었지만, 당장에 이길 수 없는 철천지수 앞에서 각을 세우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크다!’
무종지벽을 돌파한 후 다시 보는 양천.
이전과는 보이는 것들이 달랐다. 이전에도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무종을 돌파한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양천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강량은 저도 모르게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형님도 괴물이지만 저자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를 뻔했다.
‘격이 달라. 배운 무공이나 기질을 떠나서, 수준이 다른 무(武)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형님이라도 몇 합이나 버틸 수 있을지…….’
양천이 말했다.
“왜? 이전과는 내가 다르게 보이나?”
“……그렇습니다.”
“하하하! 담백하게 인정하는군. 무재가 출중한 자는 많지만, 심성이 그리 단련된 자는 찾아보기 어렵지. 우리 사이에 악연이 없었다면 어떻게든 영입하려 애썼을 걸세.”
“그 악연을 만든 것은 부주님이십니다.”
담담한 강량의 말에 양천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당돌한 건 여전하구먼?”
“…….”
강량 역시 패율처럼 말없이 양천을 바라보았다.
피식 웃은 양천이 손을 저었다.
“됐네.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도 좋아.”
고작 패율과 강량에게 몇 마디 말을 건 것이 전부였다.
얼굴 한번 보자고 불러들이고, 다 봤으니 이만 가라고 한다.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다섯 사람 모두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진양과 소정광은 거의 정신을 못 차렸고, 묵비의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으며, 패율의 얼굴은 찌푸려진 채였고, 강량은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쿠구궁!
대전의 문이 열리고 다섯 사람이 나갔다.
그리고 재차 문이 닫히니, 그제야 연호정의 입이 열렸다.
“탐나십니까?”
여유 넘치던 양천의 얼굴도 어느새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정체가 뭔가?”
“설마 저한테 물으신 건 아니지요?”
“여기 자네 말고 누가 있나.”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아까 그 여협, 의정군 부장 묵비라고 했나?”
“예.”
“소문 이상이군. 그토록 젊은 나이임에도 백전(百戰)을 치른 노장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어. 눈빛, 기도, 호흡…… 모든 것이 초일류일세.”
“가장 신뢰하는 전우 중 하나입니다.”
“묵비라는 여아는 원래부터 함께했다 하니 그렇다 치고, 진짜 놀라운 것은 다른 두 녀석이야.”
“…….”
“어떻게 영입했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다해 호소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 방법이랄 게 있겠습니까.”
“정말 그게 전부였나?”
“물론입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양천이 탄식했다.
“한 녀석은 이미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고, 다른 한 녀석은 천재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재능을 지녔어. 허! 천하에 인재가 많다지만 저런 재인들을 만나기란 쉬운 것이 아닌데…….”
“…….”
“심지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자네는 정말, 만날 때마다 내 질투를 유발하는군.”
패율은 그렇다 쳐도, 남은 네 사람 중 소정광을 제외하곤 제자인 부선이 명백하게 승리를 자신할 놈이 하나도 없다.
강량은 무종을 막 돌파한 사람답지 않게 충분히 멀리 가 버렸다. 그나마 싸움다운 싸움은 강량 정도나 가능할 것이다.
묵비는 어떠한가?
싸움이란 게 원래 변수가 있는 법이지만, 부선은 절대 그녀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수준이 다르니까.
그리고 그것은 진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묵비만은 못할지언정 그 차이는 결코 크지 않았다. 적어도 그 두 사람은 부선보다 몇 걸음이나 앞서 걷고 있었다.
즉, 연호정의 곁에는 대문파 수장급의 무력을 지닌 이들이 벌써 둘 이상 모였고, 그에 육박하는 고수도 두셋이나 되었다.
이 정도면 따로 부대를 차출할 필요도 없이, 그들만으로도 어지간한 전투는 다 해결할 만한 병력이었다. 소수 정예라는 말이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집단도 없을 것이다.
양천이 기가 막혀 할 만도 했다. 키우는 제자의 무력을 생각하면, 당연히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제 사람들 보자고 부르신 건 아닐 테지요?”
“그랬지. 그랬는데, 할 말이 없어졌어.”
“그럼 제가 먼저 말씀드리지요.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또 뭔데, 이 사람아.”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비왕의 반응을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