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화. 반응 (2)
쿵!
두 사람의 주먹이 부딪치며 둔중한 소리를 냈다.
연호정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프군.’
극한까지 단련된 오체(五體), 거기에 연가 신공의 극치인 광명신단과 사신기로 전신을 보호받는다.
흘러넘치는 진기는 사지 끝까지 꽉 차 있다. 달리 내공을 일으키지 않고도 맨주먹으로 바위를 부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 막강한 주먹에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양천의 주먹이 연호정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증거였다.
‘주먹싸움으로는 역시…….’
양천의 쌍권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파파파파팡!
엄청난 속공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극단적인 육탄전이었다. 이럴 경우 초전은 필시 힘 싸움이 된다. 단 한 방으로 상대의 기를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양천은 달랐다.
일격의 교환 이후 곧바로 쾌공을 전개하는데, 마치 빈틈 하나 없는 철벽의 성채가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파바바바박!
연호정의 의복 여기저기가 뜯겨 나갔다.
광룡부라는 희대의 중병을 다루는 연호정의 무공은 일견 파괴력에 치중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데에 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하나의 기술과 특성만으로 적을 이기기 힘든 법.
연호정에게는 어떠한 쾌공에도 반응할 수 있을 만한 보법과 신법, 그리고 무수히 많은 전투 덕에 발달한 극단적인 반사 신경도 있었다.
“역시.”
그 많은 주먹을 모조리 피해 내며 물러나는 연호정을 보며, 양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피할 줄은 알았다만, 이렇게나 능숙할 줄은 몰랐네.”
파박! 부웅!
세 발의 권탄(拳彈)을 쏘아 낸 직후 낮게 치받아 오는 각법이 호선을 그리며 연호정의 옆구리를 노렸다.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피하기 어렵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쾌공 직후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속도로 각법을 펼쳤다.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투술이다. 합으로 치자면 두 합에 불과하지만, 양천은 두 합 만에 연호정에게 ‘쾌공’에 대한 익숙함을 안겨 줬다.
그 익숙해진 반사 신경을 파고드는 느릿한 각법은 오히려 연호정의 박자감을 무너트렸다.
퍼어엉!
연호정의 몸이 우측으로 삼 장이나 밀려 나갔다.
‘묵직하다.’
타격점부터 밀고 들어오는 일격이 아닌, 타격점 안쪽에서부터 피해를 일으키는 단단한 공격이었다.
침투경의 묘리를 쓰지 않아도 타격의 가감을 명확하게 두어 상대를 뒤흔든다.
이제껏 양천과의 비무에서 보지 못했던 섬세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이게 저 양반의 깨달음은 아닐 것이다.’
속도, 타격의 종류, 박자를 농락하는 투술.
이 정도 능력은 진즉에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에야 이런 것을 깨달았다고 여기기에는 투왕이라는 별호가 울 터였다.
파아아앙!
연호정의 몸이 순식간에 양천의 우측 하단으로 파고들었다.
양천의 눈이 번쩍였다.
‘역시 빠르군.’
작정하고 내갈긴 일격은 아니었지만, 만만하게 해소할 만한 충격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벌써 여기까지 파고들었다. 신체의 내구도와 충격을 해소하는 방법 모두가 수준급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양천의 좌권이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접근전은 실수였어.’
퍼어엉! 퍼버버벅!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양천의 몸이 좌측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반면 연호정은 땅을 한 바퀴 굴러 멀어졌다.
치이이익!
연호정의 오른팔 상박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양천의 좌권 일타를 막아 낸 부위였다.
“…….”
양천은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주먹질 한 방으로 연호정을 밀쳐 냈다면, 연호정은 그 잠깐 사이 삼연타로 제 옆구리를 노렸다. 오른팔로 그 모든 공격을 튕겨 냈지만, 생각 이상의 쾌공으로 의복이 상해 버린 것이다.
“후우.”
연호정이 오른팔을 흔들었다.
“무슨 대포알 같습니다. 상박 뼈가 부러질 것 같군요.”
“……그런가.”
양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자네의 연환타도 깜찍했네. 밀려 나가는 와중에 세 발이나 꽂아 넣다니. 자세가 무너졌음에도 말이야.”
“그렇습니까.”
“자네 능력이라면 나 못지않은 강격을 내칠 수 있었을 텐데, 어찌 연타를 날렸나?”
“빠르고 가벼운 삼격이 무겁고 묵직한 일격보다 나았습니다.”
“이유는?”
“강한 일격을 뽐냈다면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눌 일도 없었을 겁니다. 곧장 힘 싸움으로 치고 들어왔을 테니까요.”
“……허어.”
“똑같이 피해가 누적되면 불리해지는 건 접니다.”
연호정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주춤한 사이 호흡 한 번 하고도 반. 회복으로 딱 좋지요. 그걸 아니까 부주님도 곧장 들어오지 않고 계시는 거잖습니까.”
읽고 있었군.
양천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언제 알았나?”
“당연히 부주님께서 좌권을 휘둘렀을 때지요.”
“…….”
파고들어 공세를 가할 때는 몰랐다가, 자신이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 그다음의 후속타를 읽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머리로 깨우친 건 아닐 것이다. 그 찰나의 틈을 읽고 계산해 내 전술을 세우는 것은 성천의 어떤 고수라도 불가능하다.
‘감이라는 건가.’
그렇다. 결국은 감이다.
강한 무인이란 고급의 무공을 한계까지 익힌 이가 아니다.
창과 칼, 주먹과 발이 부딪치는 싸움에서는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제아무리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해도 바뀌지 않는 진리다.
‘마침내 획득했군.’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쟁터.
그 첨예한 생사지간의 한복판에서 누구보다 많은 전과를 올린 이는 평범한 무인들이 갖지 못하는 능력을 손에 넣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연호정이 보여 주는 감이다. 그리고 그 감은 경지가 올랐다고 하여 무너지거나 이상을 유발할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어떤 순간에라도.
설령 괴이한 깨달음으로 전반적인 무력에 손실이 생기더라도, 저 믿을 수 없는 감각만큼은 여전히 연호정과 함께할 것이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손에 넣었어. 나이가 들고 실전에서 멀어져도, 조금의 부채질만 더해지면 녀석의 감은 다시 지금처럼 불타오를 수 있을 것이다.’
스륵.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양천의 자세가 바뀐 것이다.
좌측 발과 좌측 어깨가 전방으로 향하였다. 자세는 오히려 높아졌으며, 오른쪽 발끝만이 땅을 디디고 있었다.
‘묘하군.’
진각으로 힘을 얻기 애매한 자세다. 내공과 각종 무리(武理)를 얻지 못한 상태의, 말 그대로 범부들의 싸움에서 기동과 반응을 올리는 데에나 적합한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긴말은 필요치 않겠지.”
연호정의 자세는 더더욱 낮아졌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자, 가네.”
파아아아아앙!
삼 장 거리를 단숨에 무(無)로 만들어 버리는 속도.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피슉!
양천의 왼팔이 채찍처럼 움직이며 연호정의 볼을 스쳤다.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엄청난 속도!’
양천의 좌권이 빛을 뿜었다.
파바바바박!
섬광처럼 빠르게 내지르는 좌권 십여 발이 연호정의 얼굴과 상체를 노렸다.
연호정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파파팡! 훅!
좌권 연타에 이어 품으로 파고든 양천의 우권이 연호정의 복부를 노렸다.
쾅!
팔을 교차해 막았지만, 연호정의 몸은 붕 떠서 허공을 날았다.
‘미친!’
엄청난 일격이었다.
좌권의 연환타, 그리고 우권의 묵직한 일격.
단순하다면 단순한 무공인데도, 그 속도와 마지막 일격의 위력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정도였다.
파팍!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켜 하강 속도를 늦춘 연호정의 발이 양천의 정수리를 노렸다.
사악!
통과한다.
도끼처럼 내려찍는 반월의 각법이 허공을 갈랐다. 회피 속도가 벼락처럼 빨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법을 피한 양천의 주먹이 뱀처럼 휘어지며 연호정의 허벅지를 노렸다.
퍼어억!
허벅지를 맞은 연호정의 몸이 더욱 빠르게 회전했다.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 내공력을 폭발시켜 회전에 힘을 더했다. 그런데도 오른 다리의 감각이 사라졌다.
연호정의 좌측 무릎이 양천의 얼굴을 노렸다.
쾅!
슬격 일타를 먹인 연호정이 재빨리 몸을 휘돌려 땅에 착지했다.
연호정의 눈에 양천의 모습이 보였다. 좌측 팔을 내밀고 오른손으로 받쳐 슬격을 상쇄한 모습, 머리에는 어떠한 충격도 받지 않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훅!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좌측으로 파고드는 양천의 육신, 좌측부를 전면에 내세운 채로 돌아 들어왔기 때문에 등판이 훤히 보였다.
‘일격을……!’
순간 연호정은 오른 다리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거리가 애매하니 당연히 각법을 구사해야 한다. 하지만 양천의 주먹에 당한 오른 다리의 통증이 상당했다. 그 탓에 공격 박자가 예상보다 늦어져 버렸다.
‘이런!’
양천의 주먹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퍼어어억!
묵직했다.
그간 좌권으로는 속도를 살려 연타를 가해 왔는데, 이번만큼은 우권의 강격에 맞먹는 위력이 나왔다.
좌우 어떤 주먹이든 원하는 만큼의 위력을 살릴 수 있다. 자세 탓에 좌권이 비교적 가벼울 수밖에 없지만, 연호정의 측면으로 파고드는 움직임 덕에 오른발에도 힘이 실렸다.
진각이 아닌데도 진각으로 힘을 끌어 올린 수준의 일격이 나온 이유였다. 육신의 좌우 이동으로 힘을 끌어내는 절묘한 투술이었다.
감탄을 넘어 감동을 선사하는 투술. 무공이라기보다는 무술(武術)에 가까운데도, 어떠한 무공 못지않은 기민함과 위력을 보여 준다.
‘괜찮군.’
비틀거리는 연호정.
상대가 연호정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승부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호정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양천은 승부를 결정지을 일격을 먹이기 위해 그대로 돌진했다.
그때, 연호정의 왼발이 대지를 찍었다.
콰아앙!
엄청난 진각과 함께 그의 몸이 양천에게로 쏘아졌다.
양천의 눈이 흔들렸다. 중심을 잃었으니 반격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승부는 났다고 생각했다.
한데 저놈은 잃어버린 중심을 힘의 발판으로 삼아 더 강한 진각을 구사, 강궁의 화살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파아아아앙!
대지를 찢어발기는 주먹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근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양천의 주먹은 연호정의 얼굴 반 치 앞에서 멈추었고, 연호정의 주먹은 양천의 옆구리 두 치 앞에서 멈추었다.
한 치 반의 차이. 게다가 양천은 옆구리지만 연호정은 얼굴이다.
“졌군요.”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거리도, 위치도 한 수 아래였습니다. 제 패배를 인정합니다.”
“……자네 패배가 맞기는 한데.”
마찬가지로 자세를 푼 양천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내 주먹이 자네 머리통을 날렸다 한들, 자네 주먹 역시 멈추지는 않았겠군.”
“아마도요?”
“필시 갈비뼈와 내장이 산산조각이 났겠지.”
“그거야 실제로 맞아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지요.”
“그 또한 맞는 말이긴 하네만…… 마지막의 그 돌진, 동귀어진을 노린 건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힘의 차이가 명확한 상황, 수세로 바꾸었다간 대응도 못 해 보고 무너질 겁니다. 그럴 바에야 뼈를 주고 뼈를 취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자네도 죽네.”
“하지만 물러날 확률이 높지요. 저보다 가진 게 많잖습니까?”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이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역시 자네는 재미있어. 싸움은 손발로만 하는 게 아니라지만, 적의 특성을 파악하여 공략한다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양천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 졌네.”
“그건 또 어인 농락이십니까?”
“힘과 경험으로 이겼지만, 수지타산을 생각하면 내 패배지. 자네는 절대 주먹을 멈추지 않았을 테니까.”
“기묘한 계산법이로군요.”
“자존심이 세서 말이야.”
“그나저나, 그게 그 새로운 무공입니까?”
“이름은 없네. 그냥 주먹싸움(拳鬪)이지. 내 주력으로 삼기에는 모자라지만, 못난 제자 녀석을 가르치기에는 딱이야.”
양천이 몸을 돌렸다.
“들어가서 한잔 더 하세. 할 얘기도 많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양천을 보며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아직은 힘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