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화. 반응 (1)
어두운 밤.
하남 동북부의 한 야산에, 큼직한 마차를 중심으로 이십여 명의 사내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중 경갑 차림의 중년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무림맹에서 오신 협사분들이오?”
팽무강이 포권을 취했다.
“팽씨 가문의 팽무강이라 하오.”
중년 사내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황궁 북천장(北天將) 도번이라 하오.”
대대로 제국은 두 명의 대장군을 둔다. 대장군부는 하나지만 수장은 둘이며, 그중 한 명은 외척 출신을 두는 것이 관례였다.
외척 출신 대장군은 궁궐을 호위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부대를 통솔한다. 다른 대장군은 지극히 공격적인 부대를 운영하며, 언제든 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특수한 부대 여럿을 휘하에 둔다.
그중 북천장 도번은 외척 출신 대장군부 소속으로, 중원 북부 중에서도 특히 사막과 초원에서 침입하는 외적들을 담당하는 북부군의 수장이었다.
생각보다 거물이 출현했지만, 팽무강과 연위, 제갈아연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외척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 대장군 휘하 북부군의 수장이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마차는 황후(皇后) 폐하께서 즐기시는 특별한 용정을 수송하오. 협사분들은 이 마차에 탑승하여 그대로 궁내까지 들어가실 거요.”
“알겠소이다.”
“휴식은 여러 번 취할 것이나, 북경에 이르러서는 다소 조심스레 접근할 것이오. 하북팽가의 주인께서는 여러 샛길을 잘 아신다고 들었으니, 만에 하나 적습이 예상될 경우 잘 부탁드리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 타시오.”
그때 연위가 입을 열었다.
“출발 전에 물어볼 게 있소.”
도번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담담하게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 용정을 즐기신다는 것, 궁정 내에 파다하게 퍼진 사실이오?”
“물론이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차로 협사분들을 모시는 것이오.”
“그렇구려.”
연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팽무강과 제갈아연도 마차에 올라타자, 무림맹 수행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곤 뒤로 빠졌다.
도번이 말했다.
“출발한다.”
히히히힝!
마차가 움직이고, 그 뒤를 이십 기의 기마병이 따랐다.
마차는 생각보다 훨씬 더 안락했다. 거친 산길을 오르는데도 출렁임이 적었다.
팽무강이 연위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까 그 질문은 왜 하신 것이오?]
연위가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위가 팽무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북천장은 황후 폐하께서 용정을 즐기신다는 사실을 궁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고 하였소.]
[그렇소.]
[제아무리 첨예한 권력 다툼 중이라 한들, 어느 한쪽으로 승세가 완전하게 기울어지기 전에는 섣불리 공격할 수 없소. 만약 정말 공격이 시작된다면, 그 자체로 전쟁이 발발했다고 봐도 좋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북천장은 말했소. 만에 하나 적습이 들어오면 잘 부탁한다고.]
[……?!]
[태감 쪽이 완벽한 승세에 접어들었다면 황후 폐하 측은 우리에게 손을 뻗지도 못했을 것이오. 폐하께서 우리에게 손을 뻗은 것은 이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이기기 위함이지, 단순히 살고자 함은 아닐 거요.]
[그렇다면……?]
[시험이오.]
연위가 눈을 감았다.
[황후 폐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려는 거요.]
[하,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소?]
[거기까지는 알 수 없소. 다만 북경이라고 콕 찍어 말하기까지 했으니, 폐하의 시험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공산이 크오.]
[허!]
[달리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일이오. 그분으로서는 무림맹을 대표하는 가주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싶으시겠지.]
[일리가 있소.]
[만약 정말 그러하다면.]
재차 천천히 눈을 뜬 연위의 안광이 퍼렇게 빛났다.
“……비왕.”
* * *
“외척의 거짓 정보라…….”
양천의 얼굴에 살얼음이 끼었다.
“참으로 기가 차는군. 정말 거짓 정보를 준 것이라면, 우헌 태감으로 하여금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의도 외에는 찾을 수가 없어.”
“그렇겠지요.”
“만약 거짓 정보가 확실하다면, 그 내용은 무림맹에서 황궁 측을 신경 쓰고 있다는 종류겠지.”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비왕의 출현을 둘로 해석할 수 있겠군.”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시선을 돌리는 용도, 혹은…….”
“의도를 알아챌 경우, 언제 어디서든 성천급 고수가 공격할 수 있으니 알아서 사리라는 경고…… 정도로 볼 수 있겠군.”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비왕이 정말 우헌 태감과 관계가 있다면 그렇다는 겁니다. 아직 밝혀진 게 하나도 없으니 섣부른 추측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자네는 상황을 믿는다고 했네. 자네가 생각하는 상황상, 비왕의 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우헌 태감인지 외척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왕이 필경 황궁 쪽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한쪽이 아닌 황궁 전체를 생각한다면, 십중팔구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군.”
“만약 황후 폐하 측과 연관이 있다면, 이는 더 무섭지요.”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섣불리 배신하지 마라. 나는 비왕이라는 막강한 패까지 가진 사람이다. 뭐, 이런 건가?”
“정확합니다.”
양천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황후 쪽이든 태감 쪽이든, 참 독사 같구만.”
불경하기 그지없는 언사였지만, 연호정은 그의 말투를 탓하지 않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생존 투쟁입니다. 이길 수만 있다면 무슨 수라도 써야지요.”
“그 말도 맞긴 하다만.”
“그리고 만약 비왕이 황후 폐하 측 사람이라면,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해집니다.”
“음?”
“우헌 태감은 신화교 사람입니다. 분명 여러 고수가 황궁에 암약해 있을 터. 그런데도 비왕을 궁이 아닌 중원에 내보냈습니다.”
“……허!”
양천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태감 쪽의 전력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
“비왕이 황후 폐하 사람이라면요.”
“잘들 노는구먼.”
양천이 답답한 듯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적당히 드십시오. 고수라도 건강은 챙겨야 합니다.”
“됐네. 하도 기가 막혀서 취기도 안 올라와.”
빈 술병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양천이 자세를 방만하게 고쳤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양천의 눈빛이 기묘해졌다.
“비왕…… 황궁…… 전쟁이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한참이나 하늘을 보던 양천이 자세를 바로 했다.
“괜찮겠나?”
“뭐가 말입니까?”
“황궁은 복마전일세. 부친이 그곳으로 향했다 하니 아무래도 걱정이 될 텐데.”
“물론 걱정되지요.”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아마 아버지께서는 항상 그런 심정이셨을 겁니다. 제가 어디를 갈 때마다 걱정에 휩싸인 채 검을 휘두르셨겠지요.”
양천이 피식 웃었다.
“괜한 정에 황궁으로 가겠다고 날뛰면 어쩌나 했더니 한시름 놨군.”
“그곳은 아버지의 전장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요.”
“물론 그래야지.”
양천이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터가 널찍하니 괜찮지?”
“……?”
“그만하면 입은 부상도 잘 복구된 것 같군. 완벽하진 않지만, 지닌바 역량을 보여 줄 정도는 되는 것 같아.”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한판 하자고요?”
“두 판은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 상황에서요?”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
이미 양천은 바위 앞 공터로 내려와 소매를 걷고 있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바위에서 내려왔다.
“도끼 꺼냅니까?”
“도끼질 시작하면 적당히 끝낼 자신은 있나?”
“부주님이 저보다는 강하실 것 아닙니까.”
“죽이자고 하면 못 죽일 건 없겠지. 하지만 자네가 진심으로 들어오면 나도 적당히 할 수 없어, 이제는.”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은 무극에 올랐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양천의 저 말에, 이제는 적당히 할 수 없다는 말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실감한 것이다. 자신 역시 산의 정상 부근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든 태산의 정점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해 버린 것이다.
‘웃기는군.’
이미 이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굳이 지금 와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연호정 역시 소매를 걷었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흑암제 시절의 나를 진정으로 놓았는지도 모르지.’
양천이 두 주먹을 마주 두들겼다.
쿵! 쿵!
뼈와 살로 이뤄진 주먹인데도 서로 부딪치자 북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흉기이길래 그런 소리가 납니까?”
“깨달음이 있었지.”
“예?”
양천이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동작만 보면 도인 체조를 하는 것처럼 느릿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깊은 인내와 섬세한 자기 성찰을 동반하는 행위더군. 솔직히 답답하기도 답답했지. 가르치다가도 ‘왜 그걸 모르지?’ 하는 순간을 수도 없이 겪었거든.”
“천재는 좋은 스승이 되기 힘들지요.”
“그것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어. 이제 내게 남은 제자는 그 녀석 하나뿐이야. 가르쳐도 모른다면, 알 수 있도록 최대한 잘 풀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좋은 스승이군요.”
스르륵.
양천이 자연스레 자세를 낮추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 푼의 힘이 두 푼으로 늘어난 건 아니야. 오히려 약해진 것 같기도 해. 지금의 자네라면 내 말을 이해하겠지.”
“예. 이 경지에서의 깨달음은 종잡을 수 없는 것이지요.”
“맞아. 그 깨달음이 내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무엇을 주었는지 자네를 통해 확인해 보고 싶군.”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광포한 야수의 웃음이었다.
“겸사겸사 자네 힘도 알아보고.”
가만히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나도 정상은 아니야. 방금 나발 분 거 못 봤나?”
“몸 상태 좀 끌어 올린 연후에 붙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최상의 몸 상태로 싸우는 무림인이 어디 있나? 팔 하나 날아갔다고 적이 봐주던가?”
“그 정도로 살벌한 사이였습니까, 우리?”
“그래서 언제 시작할 텐가?”
그때였다.
딱! 퍼어어엉!
양천의 상체가 가볍게 흔들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의 왼손 중지와 엄지가 맞붙었다 떨어졌던 것이다.
“역시 막으시는군요.”
오른손을 올려 안면부를 보호한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진동인가?”
“그렇습니다.”
“자네 무공이 아닌데?”
“음제 선배의 무공입니다. 암공파라고 하더군요.”
“……자네, 음제한테 무공도 사사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선배의 제자는 종남에 있습니다. 그냥…….”
연호정의 자세도 낮아졌다. 양천보다 조금 더 낮은 자세였다.
“무리(武理)를 훔쳤지요.”
치이이이익!
양천의 몸에서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살벌해진 눈빛, 그 속에 은은한 호승심이 깃들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군.”
“잘 훔쳐 먹겠습니다.”
“어디 훔쳐 가 보게.”
파아아아악!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차이를 알아보기 힘든, 거의 같은 속도의 돌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