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18화 (718/963)

◈718화. 깨달음의 보고 (8)

이틀 뒤.

“왔나?”

“네.”

패율이 묵비의 뒤를 바라보았다.

묵비의 한참 뒤에는 청룡도를 어깨에 걸친 진양이 걸어오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패율은 진양과 얘기를 나눠 보지 않았다. 애초에 사회성이 좋은 편도 아닌 데다가, 굳이 얘기를 나눌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패율은 새삼스레 생각했다.

‘정말 크군.’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칠 척에 달하는 체구다.

떡 벌어진 어깨에, 팔다리는 통나무처럼 굵고 길었다. 그야말로 장군감이라 할 만했다.

게다가 손에 든 청룡언월도까지.

‘역시.’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보통이 아니야.’

덩치에 맞지 않는 건들거리는 보행.

하지만 갈무리된 기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장 생사결을 나눠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기가 막히는군.’

언뜻 보아도 이제 서른이나 되었을까 싶다.

세상에 천재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연호정 주변에는 그중에서도 괴물들만 득실거리는 것 같았다. 저 나이에 점창의 장로가 승부를 논하기 어려워하는 무력이라면, 그 얼마나 대단한 재능인가.

게다가 무종을 넘어 새로운 무공까지 창안한 자신에 비빌 정도라면…….

“무시무시한데요.”

강량의 얼굴에 절로 긴장이 깃들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강자가 튀어나왔답니까?”

아직 제법 멀리 있었지만, 목소리는 충분히 들릴 만한 거리였다.

척.

진양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을 튀겼다.

진양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일었다.

‘뭐지?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못해도 네다섯 살은 어린 것 같다. 한데도 벌써 검으로 일가를 이룬 기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종남 전쟁을 이끈 붉은 창의 주인과 아무리 봐도 승부를 점치기 힘든 두 자루 단창의 주인.

거기에 자신을 마중 나왔던 붉은 활의 여인까지.

‘새삼 정말…….’

괴물들밖에 없군.

진양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진양이라고 하오. 문파 정리하고 왔소.”

지닌바 무력과 덩치와는 별개로 말투가 제법 거칠다.

패율은 콧방귀를 뀌었고, 황석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괜히 무안해진 진양이 머리를 긁적였다.

강량이 말했다.

“강량이오.”

“강량? 귀검의?”

“아무래도 내가 유명하긴 한가 보오.”

“유명하다마다. 흑도제일검문의 후계자를 모를 수가 없지.”

진양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귀검의 후예에 구파의 장로, 묵룡부 출신 고수에 무림맹 의정군 부장까지…… 무슨 조합이 이러지?”

생각해 보면 기가 찰 만도 하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인 일행이지만, 하나하나 면면을 따져 보면 이렇게나 독특한 집합이 또 있을까.

진양이 묵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 양반은……?”

그때였다.

후욱!

숲 너머 저 멀리서부터 은은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진양의 눈이 깊어졌다.

‘뭐지.’

익숙하면서도 지극히 낯선 기도.

순간 진양의 눈이 커졌다.

“어? 정광?”

그의 말대로였다.

나무들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소정광이었다. 그리고 연호정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

진양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라진결의 기운을 기억하는 묵비와 강량, 패율 모두가 놀랐다. 그나마 황석태만이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르륵.

일행 가까이 온 소정광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딘지 모르게 지친 기색. 하지만 몸 전체에 이는 생기는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직 수습하지 못한 기운이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데, 그 농도가 무시무시했다.

“……정광.”

“왔냐.”

소정광이 미소를 지었다.

“문파 정리는 잘했어?”

“어? 어어, 잘했지. 한데…… 너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됐어.”

“뭐, 뭐가 그렇게 돼? 너 설마 다른 무공 배웠냐?”

“어.”

“인마! 누구한테 무공을 배웠어?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탈 날 무공 따위 안 가르친다.”

진양이 저도 모르게 헙!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내 눈에는 무공을 갈아엎은 이 녀석보다 네 녀석의 변화가 훨씬 커 보이는군. 눈빛이며 기도며, 그때와는 딴판이야.”

“…….”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다. 어제 올 줄 알았는데 좀 늦었군.”

당황했던 진양이 이내 차분함을 되찾았다.

“같이 오는 애들과 술자리 한 번 가졌소.”

“그래, 그런 건 꼭 필요하지. 동료들은 마을에 있나?”

“그렇소.”

“나와 함께하겠다면, 너의 동료들은 곧 나의 동료들이다.”

“…….”

함께하겠다.

이미 문파까지 정리하고 온 마당에 다른 길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진양의 입에서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소정광이 진실을 알고 싶어 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연호정의 일갈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문파를 정리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진양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어리지. 대신 너보다 강해.”

진양이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문제지, 빌어먹을.”

호쾌하게 싸움박질이라도 한 연후에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연호정과는 싸움이 되질 않았다. 작정하고 붙어도 열 합, 아니 다섯 합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게 훤히 보였다.

쿵!

청룡도를 땅에 찍어 고정한 진양이 말했다.

“정광은 바보가 아니오. 좋은 무공이랍시고 냅다 받을 만큼 어리석은 놈이었다면, 화웅문을 그렇게 키워 내지도 못했을 테지.”

“그래.”

“정광의 마음은 얻은 것 같소만, 나는 아직 아니오.”

“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소?”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것 하나만큼은 알고 있다. 너에게는 마음을 나눌 안식처가 필요하다는 것.”

“……!”

“함께한다면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놀아라. 대신, 그 안식처를 제공하는 대가로 너의 힘을 받겠다.”

진양의 눈이 번뜩였다.

“내 힘으로 뭘 하시려고?”

“외적을 박살 내고 평화에 이바지할 것이다.”

“웩! 샌님들이나 하는 대사로군.”

“샌님들이 하는 말이 유치하게 들리는 까닭은, 너무나도 당연한 그 발언을 아무도 실현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

“후세의 평화는 후세에게 맡긴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터질 전쟁은 우리가 막는다.”

“…….”

“너에게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지.”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천하가 되었다. 천하를 지키는 것이 곧 네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다.”

“…….”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날뛰어 봐라. 적어도 네 힘이 애먼 곳으로 향하진 않을 거라 장담하지.”

“그러다 뒈지면?”

“개죽음은 당하지 않게 해 주겠다.”

“……참나, 말은 좋아요.”

진양이 청룡도를 뽑아 들고는 보란 듯이 어깨에 걸쳤다.

“중간에 개 같으면 곧장 뛰쳐나갈 거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죽어도 나갈 일 없을 거다.”

“난 많이 먹소.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하면 눈 돌아가니까 명심하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 같다만, 알겠다.”

“쳇.”

그렇게 진양과 소정광은 연호정의 일행이 되었다.

연호정은 일행에게 두 사람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그나마 사회성이 있는 사람은 강량 정도라, 아직은 분위기가 무척 어색했다.

그렇게 소소한 인사를 나누던 때.

파아악!

야산을 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진양과 소정광, 강량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때, 황석태가 일어났다.

“부에서 나왔군.”

잠시 후, 검은 복면의 사내가 황석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철기단주님과 부관님을 뵙습니다.”

“부로 돌아가는 중일세. 무슨 일인가?”

“서둘러 오시라는 부주님의 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중간 주루마다 역참을 두었습니다. 하나같이 발이 날랜 명마들로, 사흘 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석태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굳이 사람까지 보낼 정도면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인데.”

“빨리 가야겠군.”

“그러세.”

복면인을 따라 빠르게 하산한 일행은 묵룡부 산하 주루의 역참에 들러 말을 타고 이동했다.

복면인의 말은 맞았다. 일행이 탄 말들은 하나같이 지구력이 좋고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수면과 식사는 최소로 하고 달리는 데에만 집중하니, 어느새 묵룡부가 코앞이었다.

히히히힝!

저 멀리서 경갑주를 걸친 일천 기병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석태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오랜만이군.”

“단주님!”

대열을 맞춰 다가오던 철기단이 일제히 말을 멈추곤 모두가 땅에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철기단이 단주님을 뵙습니다!”

일대를 뒤흔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황석태가 적룡창을 들었다. 그러자 철기단 모두가 다시 말에 올랐다.

“마중을 나온 모양…… 음?”

“…….”

“연 부관?”

연호정은 철기단이 아닌 좌측 멀리 떨어진 산 위의 절벽 쪽을 보고 있었다.

“연 부관.”

“먼저 들어가게.”

“뭐?”

황석태는 당황했다.

“부주님께서 빨리 오라고 하셨네.”

“그 양반 저기 계셔.”

“응?”

연호정이 말에서 내렸다.

“나를 따로 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계속 기운을 보내고 계시는군.”

“……!”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부주님 만나고 나서 들어갈 테니까.”

“네. 이따 봐요.”

“그래.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래요?”

연호정이 턱으로 진양을 가리켰다.

“가면 저놈 밥부터 먹여. 볼이 쑥 들어갔네.”

“커험!”

“그럼.”

파아아아앙!

연호정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사방이 탁 트였는데도 순식간에 점이 되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법이었다.

진양이 애써 놀란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저 속도면 먼저 출발하지, 뭐 하러 말을 탔대?”

황석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지.”

파라라라락!

오랜만에 펼치는 천종운행비는 연호정을 한 마리 매처럼 만들어 주었다.

무서운 속도로 산에 올라 절벽 앞까지 도달한 연호정의 눈에, 평평한 바위에 앉아서 독작을 하는 양천이 보였다.

훅!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다르군.’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양천의 경지가, 무극을 연 채로 받아 내니 확실하게 와닿는다.

‘진정 괴물이야.’

저런 인간을 잘도 때려잡고 흑제성을 세웠구나 싶었다. 그 이후 양천보다도 실력이 좋아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하게도 덤볐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양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혹시나 했지.”

천천히 잔을 비운 양천이 가만히 술병을 흔들었다.

“오늘 아침부터 자꾸 신경이 쓰이는 뭔가가 있었어. 나는 그게 현 상황 때문인 줄 알았는데…… 자네 때문이었군.”

“…….”

“내가 보낸 기운, 언제부터 알아챘나?”

“오 리(五里).”

“오 리…….”

양천이 헛웃음을 흘렸다.

“크게 성장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거기까지 도달했을 줄은 몰랐는데.”

천천히 양천의 앞까지 걸어간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부관 연호정, 돌아왔습니다.”

“잘 돌아왔네.”

“천만다행이지요.”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전할 생각 없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삼대가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주지. 본부 소속으로 들어오게.”

“저는 지금도 묵룡부 소속입니다만.”

“후계자 자리는 어떤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게. 농담이라도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자네가 하게 만드는구먼.”

양천이 탄식했다.

“쥐고 휘두를 수 있는 보검이 신검(神劍)으로 변모했는데, 어찌하여 나는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가.”

“베이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시끄럽다, 이놈아! 와서 잔이나 받아.”

연호정이 웃으며 양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잔을 채워 주며, 양천이 말했다.

“고생이 많았네, 정말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술잔을 부딪혔다.

“고생은 많았는데, 머리 쓸 일이 또 생겼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또 뭔 일이 터졌답니까?”

양천의 눈이 빛났다.

“발에 날개 단 놈이 세상에 나왔네.”

“……비왕.”

연호정이 머리를 짚었다.

“어딥니까?”

“무당산.”

“빌어먹을.”

“어떻게 할 텐가? 한번 가 볼 텐가?”

“좀 쉬면 안 됩니까?”

“그래, 자네는 좀 쉴 필요가 있어. 그래서 말인데…….”

양천이 피식 웃었다.

“이번엔 내가 가 볼까 생각 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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