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16화 (716/963)

◈716화. 깨달음의 보고 (6)

제갈문호가 물었다.

“홀로 나타났단 말이냐?”

“정보로는 그렇습니다.”

그저 한 명의 무림인이 나타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 무림인이 성천의 강자다. 신선제왕이든 삼군이든, 성천에 이름을 올린 고수는 단신으로 대문파급의 전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인외(人外)의 괴수였다.

말하자면 움직이는 폭탄이다. 심지어 비왕은 명백한 계파랄 것도 없었다.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닌, 중도(中道)로 대변되는 고수인 것이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절대고수의 출현. 좌중이 긴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군요. 난세의 격류 속, 그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비왕까지 나타났다니.”

복호신승은 괜스레 승현진인을 바라보았다. 하필 비왕이 출현한 곳이 무당파 인근이라고 하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도 승현진인의 얼굴은 담담했다.

“비왕은 협의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아니나, 그렇다고 무뢰배도 아니라고 들었소.”

“그렇긴 합니다만…….”

“대적이 불가한 고수가 출현했으나, 그것만으로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다만 지금 이 시점에 모습을 드러낸 저의가 있다면, 그 저의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겠지.”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얼마 전 종남파가 전쟁을 치렀다. 이런 상황에 비왕이 나타났다 하니 뉘라서 불안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승현진인은 능숙하게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호들갑을 떨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맞습니다.”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설령 비왕이 삿된 마음을 품고 있다 한들, 무당파는 종남파와 다릅니다. 특히 무당에는 탁무 도인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종남파 역시 도가에서 시작했지만, 당대에 이르러 그 성향이 속가적으로 변한 문파였다. 종남도문(終南道門)이 아닌 무문(武門) 출신들 대부분이 도명을 받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하여, 종남에는 여타 구대문파와는 다른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바로 종남의 전대 인물들 대다수가 천하 곳곳으로 퍼져 나가 따로 수행에 들어가거나 속가의 사업체들로 들어가는 것.

본디 제국이 힘을 잃기 전, 군부에는 종남 출신의 고수들이 많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전대 고수들도 황궁으로 가서 군사부 고문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힘을 잃고 관부가 제 역할을 못 하게 되면서 관계가 복잡해졌다.

결국 당대에 이르러, 전대의 고수들은 군부로 가지 않고 따로 협행을 하러 하산하곤 했다. 그것이 종남 산하 속가 무문이나 사업체로 가 후학을 양성하는 문화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다른 구파들은 그러지 않았다.

“근래 모습을 드러내시진 않았지만, 무당 본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무르신다고 들었습니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 속의 용과 같은 분이니 어디론가 떠나셨을지도 모르오. 하나, 내가 알기로는 아직 무당산 근처에서 수행에 힘쓰고 계실 것이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탁무자는 물론 꽤 많은 전대의 고수들이 무당산 봉우리 곳곳에 자리를 잡고 도를 좇거나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종남과는 상황이 달라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놀랄 만한 일이지만, 괜히 신경 쓸 일도 아닐 것이오. 그리고…….”

승현진인이 연위와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황궁으로 향하는 분들의 무운을 비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소.”

봉공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진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당금의 황궁은 무림 못지않은 복마전이라 들었소. 힘드시겠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라오.”

팽무강이 포권을 취했다.

“걱정하지 마시길.”

그때였다.

“군사.”

연위의 부름에 제갈문호가 답했다.

“말씀하시지요.”

“가능하다면, 언제든 출병할 수 있도록 의정군을 준비시켜 줄 수 있겠소?”

“예? 의정군을요?”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비왕이 허튼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를 잡기 위해 묵룡부에서도 나름의 조치를 취할 것이오.”

“물론 그렇겠지요.”

“당장에 묵룡부주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는 내 아들놈이오.”

“……음.”

“그쪽에서도 신경은 쓰겠지만, 아무래도 연호정 대수의 명령을 즉각 따를 수 있는 부대는 의정군이오. 만약 그쪽에서 출병을 요청하면 그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복호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가주 말씀이 맞습니다. 게다가 의정군의 기동성은 맹 내에서도 제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 대수의 전략과 지휘를 가장 잘 따를 수 있는 부대일 터이니, 만에 하나를 위해 준비시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갈문호가 물었다.

“묵룡부주가 연 대수에게 비왕을 데려오라 시킬 거라고 보십니까?”

“모르겠소. 이 사람은 필부에 불과할 뿐이오. 다만…….”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백병신군과 음제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연호정 대수를 보냈다면, 이번에도 가능성은 있으리라 보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갈문호는 아무래도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봉공분들과의 회의를 거쳐 신속히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알겠소.”

“이쪽 걱정은 말고, 몸 성히 잘 다녀오십시오.”

마지막으로 연위와 팽무강이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무운이 함께하기를.”

그렇게 황궁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연위와 팽무강, 제갈아연이 떠났다.

제갈문호가 개방도에게 말했다.

“방주께서는 어디 계시다든가?”

“현재 섬서를 넘어 하남으로 오고 계십니다. 조만간 무림맹으로 오실 것 같습니다.”

“음, 알겠네. 고생했어.”

개방도를 보낸 제갈문호가 봉공들과 함께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회의를 진행하면서도 제갈문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비왕…… 아마도 그는…….’

* * *

연호정 일행은 호북을 지나 호남 북부에 진입했다.

굳이 빠르게 이동할 생각은 없었지만, 천천히 갈 생각도 없었기에 상당한 속도가 붙었다. 게다가 개방 지부에서 배까지 수배해 준 덕에, 강을 타고 내려가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렇게 호남에 이른 일행은 완만한 야산에 자리를 잡았다.

강량이 투덜거렸다.

“추운데 또 노숙입니까?”

패율이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두 번도 아닌데 뭐가 그리 불만이냐?”

“불만이라기보다는…… 주루나 객잔에서 쉬어도 될 걸 굳이 노숙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주루에서 숙식하면 마음껏 수련할 수가 없잖아.”

“……또 수련하시게요?”

“죽는 그 날까지 수련해야지. 그리고 야숙이래도 딱히 자는 데 문제는 없잖아? 추워서 덜덜 떨지도 않는데.”

“그건 그렇지만요.”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뜨끈한 물에 수욕하고 나서 잘 데운 술 한잔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싶어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객잔이 있다. 원한다면 가서 쉬어도 좋아.”

“에이, 의리가 있지 또 어떻게 그럽니까?”

패율이 낭두창 끝으로 강량의 머리를 때렸다.

딱!

“컥!”

“그만 주절대고 나뭇가지나 주워 와. 모닥불 피우게.”

“말로 하지 왜 때립니까!”

“이 새끼가?”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묵비가 웃으며 일어났다.

“같이 줍자.”

“누님밖에 없습니다.”

강량과 묵비가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간 말이 없던 소정광이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저도 돕겠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옙?”

“너는 나랑 따로 할 일이 있다. 따라와.”

“……그럽죠.”

연호정이 황석태와 패율에게 말했다.

“꽤 걸릴지 모르니 먼저 주무십시오.”

황석태는 고개를 끄덕였고, 패율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무슨 괴물을 만들어 놓으려고 그러냐?”

연호정은 웃으며 몸을 돌렸다. 소정광은 그런 연호정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일행과 제법 떨어진 곳, 꽤 널찍한 공터가 나오자 연호정이 멈추었다. 맑은 달빛이 그대로 내리쬐는 공터였다.

“여기가 딱 좋겠군.”

소정광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겁나네요.”

“뭐가?”

“제법 멀리까지 따로 데리고 오신 걸 보면요.”

“그러게. 왜 데리고 왔을까.”

“……진짜 무서워지기 시작하네요.”

연호정이 뒷짐을 지고 말했다.

“진양 그놈에게서 따로 연락을 받았지?”

“알고 계셨습니까?”

“어제 마을에서 대장장이 하나와 접선한 걸 보았다.”

“눈치가 엄청나게 빠르시군요.”

소정광이 입맛을 다셨다.

“내일쯤 되면 합류할 것 같습니다.”

“문파는?”

“…….”

“해체한 모양이군.”

소정광이 눈을 감았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고생을 해 가며 만든 문파인데, 흩어지는 건 한순간이네요. 새삼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갈지 정말 모르는 거라니까요.”

“…….”

“그래도 그 양반, 흩어진 문도들 개개인한테 돈을 엄청 쥐여 준 모양이에요. 하긴, 그간 아득바득 모았으니까요.”

“다 흩어졌다던가.”

“딱 오십 남았대요. 그 오십은 무조건 따라붙겠다고 했고요.”

“오십이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놈, 인망은 있었던 모양이군.”

“뭐, 답이 없는 문주였지만 매력은 있지요. 제가 그동안 괜히 똥 닦아 준 게 아니에요.”

화웅문의 정식 문도는 약 이백여 명이었다.

그중 백오십이 떠나고, 오십이 인생을 함께하려 한단다. 문파의 주인이란 작자가 조직을 해체했는데도 오십이 남았다면, 인망 하나만큼은 제대로 얻었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소정광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셔도 될 것 같은데요?”

“본론 이전에 하나 묻자.”

연호정이 턱으로 일행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들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나?”

“……강한 사람들이구나?”

일견 생각 없는 대답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소정광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확실한 대답이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다들 강하지. 심지어 진양 그놈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야.”

“…….”

“그에 비하면 넌 많이 부족하다.”

연호정 주변 인물들이 하나같이 재능이 넘칠 뿐, 기실 소정광의 무공도 그 나이에 비하면 굉장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에게는 그럴듯한 스승도 없었다.

뒤늦게 연성한 무공, 그럼에도 절정고수 수준까지 올랐다. 단순 재능만 따지면 진양 이상일지도 몰랐다.

“나와 함께하면 지독한 꼴을 많이 보게 될 거야. 목숨이 위험한 전투를 수도 없이 겪을 거다.”

“그 말씀은……?”

“너의 무공을 끌어올리겠다.”

소정광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문파의 행정은 물론 군사 일까지 맡으며 바쁘게 지냈지만, 그 역시 무림인이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를 넘어 무극의 경지를 개방한 희대의 괴물이 자신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소정광이 고개를 숙였다.

“문주, 아니 진양과 함께하기로 했는데 쪽팔리게 저만 골골댈 수는 없지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그럼 뭐부터 할까요? 극법(戟法)부터 펼쳐 볼까요? 아니면 내력을…….”

“다 버려라.”

“에?”

“네가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 그리고 극법. 전부 버려라.”

소정광의 얼굴이 굳어졌다.

“버리라고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맞는 무공이 아니야. 불철주야 노력한다면 성과는 있겠지만, 끝을 볼 생각이라면 부족하다.”

“아니, 그럼 저는 무슨 무공을……?”

“네가 연성했던…….”

순간 연호정은 헛기침을 했다. 저도 모르게 흑암제 시절을 얘기할 뻔한 것이다.

“너에게 맞는 무공을 전수해 주지.”

소정광의 눈이 흔들렸다.

반면 연호정의 눈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재능과 운, 노력이 전부 뒷받침되어야 할 영역이지만…… 적어도 네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훗날 성천에 들 수 있는 기반이 될 절기다.”

“……!”

“받겠나?”

연호정 휘하, 무적의 무위를 발하던 다섯 신장은 저마다 화려한 별호를 갖고 있었다.

신궁(神弓) 묵비.

검왕(劍王) 강량.

마도(魔刀) 진양.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을 제외한 소정광의 별호는 무엇인가?

바로 난도혈귀(亂刀血鬼)였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소정광이 입을 열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