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15화 (715/963)

◈715화. 깨달음의 보고 (5)

“임무요?”

“그렇다.”

차를 마시는 연위는 생각보다 훨씬 담담해 보였다.

“언제 출발을……?”

“음, 오늘 자정을 기해서 출발할 듯하다.”

당상아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깃들었다.

자정이라 하면 당장 한나절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위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가주님께서 직접 가실 정도면, 아무래도 상당히 위험한 임무인가요?”

“위험이라…….”

찻잔을 놓은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무력 충돌이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이왕이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그, 그렇군요.”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홀로 지내기 적적하다면 의정군과 교류해 보는 건 어떠하냐? 너 역시 과거 한 번은 탕마군 소속이지 않았더냐.”

당상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유대감이 생기기도 전에 빠져나와서요.”

“마음에 거리낌이 생길 만도 하겠다. 그래도 모용 군장과는 자주 만남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모용 군장이요?”

“내 얼마 전, 모용 군장과 대담을 나눠 보았지. 예전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 되었더구나. 일군을 거느리며 숱한 싸움을 벌이고 나니, 다소 유약했던 인상도 사라졌어.”

“그렇군요.”

“출중한 무공, 대협의 성정, 거기에 아랫사람을 통치하는 능력도 몹시 뛰어나다. 전 중원을 뒤져 봐도 그런 인재는 찾아보기 힘들 게다.”

당상아는 상당히 놀랐다.

연위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당장 자식인 연호정과 연지평에게도 어지간해서는 칭찬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자식이라 더욱 엄격하게 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당상아가 미소를 지었다.

“가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니 불현듯 흥미가 생기네요.”

“허허, 그러하냐?”

“예전에 아버지께서는 저와 모용 군장을 혼인시키려 하셨죠. 괜한 반발심 때문인지 몇 번을 봐도 가까워지기 힘들었어요.”

“그랬구나.”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애정을 염두에 두고 만날 필요가 없어졌으니 부담 갖지 말고 교류하거라. 비슷한 세대, 준수한 무공을 지닌 무인들끼리 서로의 경지를 높일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니라.”

“네.”

당상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한데 지평은 요새 잘 안 찾아오네요?”

의정군과 함께 움직였던 연지평이다. 모용우와도 친분이 있어, 사실상 연가 소속이기 전에 의정군 소속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의정군과 모든 훈련을 함께한다고 한다.”

“그, 그래요?”

“좋은 일이지. 예전과 달리 지평은 연약하지 않다. 하지만 더 깊은 검도(劍道)를 위해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이 잦았었다.”

“그랬었죠.”

“그런 지평이 의정군과 점점 하나가 되고 있으니, 이는 의정군에도, 지평에게도 좋은 일이다.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바, 산중에서 은거 기인으로 살 게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부딪치며 강호를 살아가는 법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이런 부분이 다른 수장들과의 차이점이라고, 당상아는 생각했다.

명문의 수장들은 대개 자식이 밖으로 나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그 자식들은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무예를 수련하고 경영 수업을 받아 가며, 차기 가문의 기둥으로 성장하도록 엄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장 아버지인 당관만 해도 당양선을 그리 키웠더랬다. 결과를 떠나, 그것은 무림 명문의 상식이었다.

연위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 가문의 장자인 연호정이 밖으로 나도는데도 안위를 걱정할 뿐, 그러한 행동 자체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나가야 어른이 된다며, 연지평에게도 은근히 연호정의 방법을 추천할 정도였다.

‘사실 지극히 위험해. 다른 가문에서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방법이야.’

명문에서 나고 자랐다 한들 젊은 나이에는 실수가 잦고 실력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강호에 나갔다가 사소한 시비에 휘말려 죽을 위험도 크다.

내 핏줄이 험한 세상에 나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떤 부모가 그것을 흔쾌히 용인하겠는가? 자칫 잘못하다간 가문의 대가 끊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을 안고도 두 아들 모두를 세상과 부딪치도록 방목하는 연위는 실로 대단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자식들을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 선택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당상아가 고소를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육대세가는 영원히 구파일방을 넘어서기 힘들 거야.’

구파일방은 가문이 아닌 문파다. 그들 문파는 핏줄이 아닌 사제지간으로 이어지며, 능력과 덕이 있는 사람에게 문파의 좌장 자리를 물려준다.

즉, 능력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나가 본인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파견하는 일도 잦다.

그렇게 세파를 맞아 가며 완성되어 온 구파일방의 힘은, 육대세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넘기 힘든 벽이 되었다.

그러나.

‘연가는 다를까?’

기존 명문가의 가주들과 다른 연위만의 사상, 가르침.

그리고 그런 아버지 못지않은, 가능성만으로는 연위 이상인 두 아들들이 강호 무림에 족적을 남기고 있다.

‘어쩌면.’

당상아는 생각했다.

누구도 넘어서기 힘든 구파일방의 위상을, 강동의 연가라면 넘어설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허허,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네? 아,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

당상아는 활짝 웃으며 연위와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이 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평소와 달리 당상아는 말이 많았고, 연위 역시 평소보다 훨씬 인자하고 재치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졌다.

“연 가주 계시오?”

“들어오시오.”

끼이익.

문이 열리며 하북팽가의 가주, 팽무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는 긴장한 얼굴의 제갈아연과 무사 몇 명이 도열해 있었다.

연위가 웃으며 일어났다.

“벌써 때가 되었구려.”

“그렇소. 한데…….”

팽무강이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판관검답소이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하오?”

“긴장해서 잘 풀릴 일이었다면 며칠을 고민했을 게요.”

“하하, 그것도 맞지만.”

멋쩍은 듯 웃는 팽무강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감탄이 어렸다.

‘판관검 연위라.’

기실, 두 사람 사이엔 별다른 교분이랄 게 없었다. 딱히 대비되는 성향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만나서 술 한잔할 만큼의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위도 팽무강에 대해 잘 모르고, 팽무강 역시 연위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팽무강은 하나의 사실만큼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강한 남자야.’

그러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번 임무를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기지도 않는 듯했다. 물처럼 잔잔하면서도 깊이감 있는 기도는 언제, 어느 때라도 출수할 수 있을 만큼의 팽팽함도 함양하고 있었다.

‘하긴, 비범한 게 당연한가.’

천하제일 후기지수, 벽산호장 연호정의 아버지다.

비범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모인 무림맹이지만, 그중에서도 연호정은 특히 돋보이는 일세의 명장이었다.

연위는 그런 명장을 길러 낸 아버지이자, 강동의 평화를 유지한 일문의 수장이다. 비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데…….’

팽무강은 당혹스러웠다.

‘어찌 보이지 않지?’

연위의 힘.

지극히 잠잠하고 도도하다. 이 사람이 검을 구사하면 어떤 검을 보여 줄지 대략이나마 짐작이 간다.

한데 힘의 깊이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무겁고 어두워지는 기도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처럼 화려하고 화탄처럼 맹렬한 팽가의 무공과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모호한 기도는 소림과 무당의 전대 고수들을 제하고는 처음이었다.

“팽가주?”

“음? 아! 실례했소.”

팽무강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연가주의 기도가 너무나도 깊고 웅대하여 순간 넋을 잃었소이다. 정말 대단하시오.”

속내를 감추지 않는 호탕함. 그 단순하고도 깊이 있는 진실함은 연위에게도 큰 감흥을 주었다.

“부디 모자란 이 사람을 잘 이끌어 주시길 바랄 뿐이오.”

“그러려고 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까 이끌기는커녕 연가주 검 아래 숨어 있어야겠소.”

“허허허.”

호기롭고도 솔직하며,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회의 때 말고도 따로 술자리를 했다면 좋았을 듯싶었다.

“자, 슬슬 움직입시다.”

“그럽시다.”

연위가 당상아를 돌아보았다.

당상아가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가주님.”

연위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힘들면 기댈 사람은 많다.”

“…….”

“돌아와서 보자꾸나.”

“네.”

고개를 든 당상아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임무가 얼마나 위험하고 살벌한 것인지를.

애초에 육대세가의 가주를 보낼 정도의 임무이니 오죽하겠는가. 그간 누구보다도 자신을 이해해 주고 보듬어 준 어른이 위험한 임무에 나간다니 걱정이 컸다.

연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연위와 팽무강, 제갈아연과 수행 무사들이 내성 회의장 앞에 섰다.

그곳에는 나머지 십이봉공들은 물론 장로원의 장로들까지 전부 도열해 있었다.

공공대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반장례를 올렸다.

“이토록 위험천만한 일에 나서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고, 또한 미안할 따름이오.”

연위와 팽무강이 고개를 숙였다.

“일세의 검협 연가주와 기개 높은 호협 팽가주의 앞날에 부디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바라겠소.”

“감사합니다.”

“조심히 다녀오시길.”

“예.”

그때였다.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떠나시기 전에, 연가주님께서 안심하실 만한 소식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연위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연 대수 일행이 안전하게 호남으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호남은 묵룡부의 세력권이니, 당분간은 부에서 푹 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구려.”

“이번에 연 대수가 세운 공은 크고도 큽니다. 그만큼 고생도 심했을 터, 그릇이 큰 묵룡부주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겝니다. 당장에 별다른 일을 시키진 않을 겁니다.”

“다행이오.”

“자제들 걱정 없이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제갈문호가 제갈아연에게 말했다.

“너는 두 분 가주님을 잘 모셔야 할 것이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숙였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냐.”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저 사람은 정보 고문의 심복이 아닌가?”

그의 말대로 달려온 사람은 개방의 제자였다.

“봉공분들과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그래, 어인 일인가?”

“급보입니다! 정보 고문이 아닌 본방의 방주님께서 직통으로 연락을 보내셨습니다!”

모두의 눈빛이 돌변했다.

“용두방주께서 직접?”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일로?”

침을 꿀꺽 삼킨 개방도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성천십삼좌의 일인, 비왕(飛王)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비왕 공손백룡, 당대 무림을 넘어 고금에서도 견줄 이가 없는 신법의 제왕이었다.

실질적인 무력은 삼군급이지만, 그 독보적인 신법만으로도 무력 격차를 메워 버린 또 한 명의 절대자.

근래 무림에 잘 나서지 않던 비왕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제갈문호가 서둘러 물었다.

“어디서, 어디서 나타났다고 하더냐?”

“……호북 균현, 무당산 인근입니다!”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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