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12화 (712/963)

◈712화. 깨달음의 보고 (2)

태을단.

소림에 대환단이 있듯, 무당에 자소단이 있듯.

종남에도 문파를 대표하는 영약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태을단이다.

구파일방의 각파에서 자랑하는 영약들은 약력(藥力)을 극한까지 응축시켰다는 공통점을 제하면 제각기 특성이 다르다.

소림의 대환단은 지극히 양강하지만, 불문의 영약답지 않게 그 약성이 몹시 독하다. 모르는 사람이 그냥 먹으면 범부의 경우 약력을 이기지 못해 즉사에 이르고, 일류고수라도 기력을 다스릴 만한 내공심법이 없으면 주화입마에 걸린다.

무당의 자소단은 음양(陰陽)이 조화되어 있어 대환단보다는 훨씬 더 안정적이다. 하지만 그 약력은 대환단에 필적하는지라, 섣불리 취하면 목숨을 잃는 정도는 아니어도 되레 몸이 허해지거나 탈이 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도가의 신공을 연성하지 못하면 약력을 버틸 수 있어도 기운 대부분이 소실된다. 악인의 손에 들어간다 한들 악인의 힘을 키워 줄 수 없는 영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종남의 태을단은 어떠한가?

종남의 태을단은 대환단이나 자소단만큼의 막강한 내공력을 선사하진 못한다.

그러나 근골을 완성시키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구파 제일이라 할 만한 영단이었다. 종남의 수련 자체가 여타 도문과 달리 내기(內氣)보다 신체의 완성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영단 역시 그러한 특성을 가진 것이다.

연호정은 태을단에 대해 잘 몰랐다. 애초에 유명 문파의 영단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그였다.

다만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음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대단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장문인.”

“거부해도 되네. 정히 필요가 없는데 굳이 억지로 손에 쥐여 주고 싶지는 않아. 아까워서가 아니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세.”

순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자네가 받아 줬으면 좋겠네. 이것은 비단 사과하기 위해서, 혹은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 아니야.”

“…….”

“자네는 앞으로도 중원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외적들과 싸움을 벌이겠지. 내 감히 예상컨대, 일파의 수장들보다 훨씬 더 격정적인 인생을 보낼 것이네.”

“…….”

“나는 자네의 심성, 실력, 영향력 등을 논하고 싶지 않아. 그저 자네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뿐이야.”

“장문인.”

“또 다른 비극을 막아 주게.”

순우의 눈이 깊어졌다.

“만일 우리 종남과 같은 상황에 처한 문파가 또 나타나면, 자네가 꼭 힘을 써 주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저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당연히 우리 모두 그리해야 하네. 그래도 나는 자네에게 이것을 전해 주고 싶네.”

연호정의 눈이 진지해졌다.

이번 전쟁으로 종남은 수많은 제자를 잃었다. 그 피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리라.

앞으로 또 다른 제자들을 키워야 할 것이고, 당장 중상자들의 치료에 필요한 돈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영단을 제게 주겠다는 것이다.

“어찌하겠나? 받아 주겠는가?”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꼭 좋은 곳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순우가 활짝 웃었다.

“성의를 받아 주어 고맙네.”

순우가 연호정에게 태을단을 건넸다.

가볍지만 또한 무거웠다. 이 영단은 그냥 영단이 아니라 순우의 좌절과 분노, 희망과 미안함이 가득 담긴 보물이었다.

순우가 몸을 돌렸다.

“식사나 하세. 나도 오늘 온종일 먹은 게 없군.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속세의 기름진 음식은 없다네.”

“좋습니다.”

연호정이 그의 뒤를 따랐다.

순우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연 대수.”

“예, 장문인.”

“고맙네.”

사과가 아니라 감사다.

“자네 덕분에 종남이 살았어. 이 은혜, 훗날 꼭 갚음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태을단으로 충분하지만,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꼭 갚아 주십시오.”

순우가 피식 웃었다.

“묘한 사람이로고.”

* * *

순우와 식사를 하고 거처로 돌아온 연호정을 묵비가 맞아 주었다.

“잘 다녀왔어요?”

“어. 맛있게 먹고 왔어. 선물도 받고.”

“그렇군요.”

“밤이 늦었는데 왜 여태 안 자고 있었어?”

묵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이제 자려고요.”

“그래. 내일 보자고.”

연호정이 계단 앞마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묵비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안 자요?”

“생각할 게 있어서. 먼저 자도록 해.”

“그래요. 무리하지 말고요.”

“알았다니깐.”

묵비가 거처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자는 객당은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다.

혼자가 된 연호정이 품에서 태을단을 꺼내 들었다.

‘…….’

금낭에 싸인 태을단에서 은은한 약향이 흘러나왔다.

독하거나 강하진 않았다. 품에 넣으면 어지간한 사람은 맡지도 못할 정도였다.

연호정은 가만히 태을단을 내려다보다 다시 품에 넣었다.

‘큰 보물을 받았어.’

태을단.

그저 문파를 대표하는 영단 정도가 아니다. 순우의, 그리고 종남의 피와 땀이 묻은 황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보물은 따로 있었다.

‘대단했다.’

연호정은 순우의 검을 떠올렸다.

‘놀라워. 내가 아는 무학(武學)과는 또 다른 이치를 품고 있었다.’

종남의 천하검을 정식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천하삼십육검. 종남파 최강의 검법.

밟아 가는 투로(套路)보다 검에서 피어오르는 발경법이 훨씬 더 기기묘묘한 검법이었다.

검로(劍路)만 보자면 사실 그렇게 대단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절묘했지만, 그 정도 검법은 찾아보면 생각보다 쉽게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힘, 기세에는 천하 어떤 무공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함이 있었다.

기세는 불처럼 사납고 화려했지만, 흘러나오는 검력은 도도한 물살과도 같았다. 한번 휩쓸리면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는 검파(劍波)의 정점이었다.

‘화산의 매화검은 정교함의 극치다. 오히려 그건 익숙해.’

연호정의 무공은 공방과 회피, 반격이 절묘한 균형을 이룬 전투술이었다.

다만 무공 자체가 극단적으로 파괴적이라, 그 반대되는 길인 화산의 무공을 오히려 손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매화검의 운용법을 얼추 예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천하검은 달랐다. 사나움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 무당파의 태극혜검 못지않은 부드러움이 숨 쉬고 있었다.

부드럽고 또 부드러운 이치가 모이고 모여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파도가 되는 것.

말 그대로 물과 같은 검이었다. 한 방울 물은 쉽게 흩어지지만, 모여서 거대해진 물살은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내 무공은 단순하다. 단순하기 때문에 빠르고 강한 것이야. 기공술은 그렇지 않지만, 투로 자체는 이치를 머금지 않고 휘두르는 게 전부다.’

사신무는 도가의 무공이나 불문의 신공과는 다르다. 깨달음을 추구하지 않고 철저하게 상대를 박살 내는 극단적인 실전 무공인 것이다.

연호정은 한 번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금의 경지에 오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사신무는 그 자체로 완벽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흑암제 시절에도 느껴 본 적 없던 타류 무공의 장점이 연호정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아니지.’

연호정은 또 생각했다.

‘비단 천하검만이 아니야.’

명극의 도화천신공.

상단전의 신기(神氣)를 활용하여 술법에 가까운 무공을 만들어 냈다.

상대가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박자감을 흐리는 기묘한 무공은, 그 자체로 신공절학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그 절대의 방어력과 공격력을 만들어 내는 진기의 경도.

갑주이자 검이다. 부서지지 않는 강철의 진기가 공방 양면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볼 수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살짝 멍해졌다.

‘놈과 싸울 때, 나는 정의하기 힘든 영역에 들어섰다. 단순한 몰입이 아니었어. 그보다 훨씬 깊은 세상에 들어가 놈을 위협했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손에서 환한 진기가 피어올랐다.

사신기(四神氣)가 아니었다. 연호정 내력의 핵심, 순수한 광명기(光明氣)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놈의 움직임은 물론 놈이 구사하는 내공력의 핵심도 볼 수 있었어.’

지이이이잉.

성스럽게 피어오르던 기운이 이내 강철처럼 딱딱해지며 그의 팔뚝 전체를 물들였다.

‘이런 느낌이었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구결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낌만으로 그 비슷한 길을 갈 수 있었다. 광명기로 도화천신갑(導禍天神鉀)을 흉내 내는 그였다.

파아악!

잠시지간 그의 팔을 보호했던 광명기가 튀는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느낌을 기억하여 본능대로 운용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었다. 운용을 지속할 수 없으니 실전에서 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연호정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저 멀리 떨어진 나무를 향했다.

‘음제 선배의 암공파 역시 너무나도 뛰어난 절기였다.’

우우우우웅.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광명기가 이내 무형의 기로 바뀌었다.

연호정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자연스레 펼친 손을 오므린 그가 중지와 엄지를 튕겼다.

딱! 퍼어억!

손가락을 튕기자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가 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진동의 힘이다. 명극의 도화천신공과는 달리 그 원리를 대략적으로 이해했기에, 음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암공파(暗空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대단한 절학이다. 이 또한 구결은 모르지만, 원리를 알기에 순간적으로 뽑아 쓸 수 있어.’

명극과의 만남은 생사결의 싸움 한 번으로 끝이었지만, 음제와는 하루 내내 대화를 나누었다.

심지어 그녀는 망가진 몸을 치료하기 위해 내공까지 다스려 줬다. 그 힘을, 체내로 들어오는 절대고수의 진기 특성을 읽은 그는 암공파의 원리까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음제 선배, 그리고 적장의 무공. 나아가 종남의 천하검까지.’

연호정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세상에 배울 것이 이리도 많거늘, 나 스스로의 완성을 위해 지나치게 편협한 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조차 외면하고 지냈다.’

스스로를 완성해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법.

그런 면에서 연호정의 방식은 옳았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흑암제 시절처럼, 그의 무도(武道)는 더 이상 그 자신만의 길이 아니었다.

그때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지금의 연호정은, 전투와 파괴만을 위한 무도에서 모든 것을 지키고자 하는 성(城)과 같은 무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더 강해질 수 있다.’

연호정의 손이 부드럽게 허공을 휘저었다.

명극과의 싸움, 그때 진입했던 미지의 세상.

‘어느 순간 탈선해 버린 이치로 나 자신을 던질 수 있다면.’

연호정은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무(武)의 이치로 빠져들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힘을 담아 내치지 않았음에도 명극의 빗장뼈를 뽑기 직전까지 갔던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우우우우우웅.

광명신단이 은은한 울음을 토해 냈다.

집중, 나아가 몰입.

실로 오랜만에 연호정은 좌선에 들어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치이이이익!

외부의 자극 없이, 오로지 스스로에게 완전히 집중하는 그 순간.

광명신단은 이전보다 더 빠르고 부드럽게 전신을 누비며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연호정이 좌선에 빠져든 지 사흘이 지났다.

묵비가 찾아왔고, 어디서 지내는지 몰랐던 소정광도 그의 곁에 머물렀다.

할 일을 끝낸 황석태 역시 이틀 차부터 연호정 곁에 머물렀고, 연락을 받은 강량과 지소현도 종남에 올랐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번쩍!

연호정의 눈이 뜨였다.

묵비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깼어요?”

“응.”

“오래도 집중하네요. 벌써 나흘이나 지났어요.”

“그랬군.”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슬슬 정리하자. 갈 때가 된 것 같다.”

“네.”

“아, 그전에 밥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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