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화. 죽음과 인연 사이 (10)
밤이 찾아왔다.
거처 밖 바위에 앉아 흐린 구름 속에 숨은 달을 바라보는 순우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지쳐 보였다.
찬바람이 불어와도, 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올라가 앉은 바위처럼, 그 역시 바위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장문 사형.”
순우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구윤이 있었다.
구윤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순우도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슨 일인가.”
“…….”
순간 구윤은 할 말을 잃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전달해 주는 장문 사형의 목소리는 마치 다 죽어 가는 이의 목소리 같았다.
그 앞에서 어찌 업무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빠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찹니다. 그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순우가 피식 웃었다.
쓴웃음인지 비소인지 모를 웃음이었다.
“그 많은 제자들이 죽었거늘 내 몸뚱이가 대수인가.”
“대수지요.”
“……?”
“우리 제자들은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감히 장담하건대, 죽은 사형제들은 물론 제자들 모두가 죽는 그 순간까지 종남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
“사형의 마음이 결코 편치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럴 때일수록 힘을 내셔야 합니다.”
“사제는 마치…….”
순우가 눈을 감았다.
“마치 연호정 그 녀석과 비슷한 말을 하는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좋은 청년입니다.”
순우는 말이 없었다.
구윤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연 대수가 없었다면, 종남은 우리 대에서 멸망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
“연 대수는 그 공을 용아철기단의 단주에게 돌리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연 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연 대수가 하루라도 늦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순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채색 없이 묵으로만 그린 그림 같았다.
구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장문 사형.”
“…….”
“사형 탓이 아닙…….”
“아니, 내 탓일세.”
“사형!”
순우가 고개를 저었다.
“일대에 지진이 나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폭우로 제자를 잃어도 모두 나의 책임일세.”
“…….”
“수장이란 그런 것이야. 천재지변은 물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제자들이 다치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 자리. 그것이 바로 수장이고, 문주이며, 장문(掌門)일세.”
“……그렇군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순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아네.”
“예?”
“내가 지금 이렇게 슬픔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나 또한 잘 알고 있네. 이 들끓는 분노와 한을 잘 간직해야 할 때라는 것도 아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해. 모름지기 수장이라면 문파의 미래를 위해 슬퍼도 괜찮은 척해야 하고, 화가 나도 웃을 줄 알아야 하지.”
“…….”
“하지만 말일세.”
순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그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것이었다.
“눈 한 번 깜빡할 때마다 죽은 제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
“얼마나 춥고 고통스러울 것인가. 그 멀고 서늘한 저승길을 가느라 얼마나 고되고 한스러울 것인가. 뜻을 세워 보지도 못한 채 종남의 검학을 배운 어린 제자들이 그리도 많이 죽었네.”
구윤이 눈을 감았다.
다른 모든 이가 순우를 나약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순우가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는지.
그는 친자식에게도 주기 힘든 애정을 종남 문하 모두에게 베푼 사람이었다. 이토록 거대한 문파를 운영하면서도 일탈 한번 한 적 없이 오직 문파와 제자들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크기의 사랑. 그랬기에 닥쳐온 비극 앞에서 견디기도 힘들다.
도가신공을 익혔다? 부동심을 이루었다?
그런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혈육보다도 더 혈육처럼 대하던 아이들의 죽음을 겪은 순우의 마음은 그야말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을 것이다.
한참이나 흐느끼던 순우는 이각이 지나서야 겨우 눈물을 멈추었다.
구윤이 말했다.
“장문 사형.”
“미안하네. 내가 사제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어.”
“저와 함께 가실 곳이 있습니다.”
“……갈 곳이라니?”
“대장로에게 갈 것입니다.”
순우의 눈이 흔들렸다.
구윤이 말을 이었다.
“대장로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보고는 다 들으셨지요?”
“…….”
“시간 끌 일이 아닙니다. 어떤 판결을 내리든, 장문 사형께서 직접 가셔야 합니다.”
“…….”
“애들 다 보는 대낮에 처리할 만한 일도 아니잖습니까.”
순우는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구윤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일각이 지났다.
“가세.”
순우가 바위에서 내려왔다.
“대사형에게 가세.”
잠시 후.
쿠르릉.
동혈의 문이 열렸다.
동굴 안쪽은 무척이나 잘 관리되어 있었다. 동굴답지 않게 습도도 낮았고, 입구 좌우에 수많은 화등이 설치되어 있어 사물을 구분케 하였다.
이곳은 바로 종남의 세오동(洗汚洞)이었다. 잘못된 것, 불결한 것을 씻어 내는 동굴이라는 뜻으로, 문파의 큰 죄인들이 갇히는 동굴이었다.
근 십 년 동안 누구도 갇히지 않았던 이곳에, 한 명의 노인이 갇혀 있었다.
“누, 누구냐?!”
동혈 안에는 이십여 개의 철창 달린 방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첫 번째 방에 여광이 있었다.
순우의 눈이 슬픔으로 젖어 들었다.
“대사형.”
“장문인!”
여광의 몰골은 그야말로 피폐했다.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고, 씻지 못해 땟물이 흘렀으며, 옷은 여기저기가 해져 있었다.
그가 갇힌 뇌옥의 철창 앞에는 그릇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식사를 넣어 줬지만, 물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먹지도 않은 것이다.
“장문인이 오셨구려!”
여광의 얼굴에 환한 빛이 어렸다.
그의 눈은 오로지 순우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뒤에 선 구윤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참으로 반갑소이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이 철창을 열어 주시오! 장문인이 오셨는데 이런 꼬락서니로 뵈어서야 되겠소?”
어딘지 모르게 횡설수설하는 듯한 느낌.
순우는 여광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늙은 대사형의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광인(狂人)이라고 오해할 만한 눈이었다.
순우가 탄식을 토해 내자 여광이 재차 말을 이었다.
“아, 혹시 얘기를 들었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전부 오해요! 일단 이 철창부터 열어 주시오! 내 장문인께 전부 설명……!”
“대사형.”
“오, 말씀하시오!”
순우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왜 그러셨습니까?”
“무엇이 말이오? 아니, 일단 이 철창부터…….”
“어찌 제자들에게 종남의 정신을 그릇되게 가르치셨습니까?”
“장문인! 내 말부터 들어 보시오!”
“어찌 삼장로를 죽이려 하셨습니까?”
“장문인!”
“도대체 어쩌다가 그리되신 겁니까?”
“순우 이놈!!”
구윤은 깜짝 놀랐다.
여광의 표정과 목소리가 한순간 달라졌다. 다급함이 가득했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지고, 충혈되었던 두 눈에서 진짜 광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대사형의 말을 어찌 그리 끊느냐! 네가 장문 자리에 오르더니, 이제는 어른에 대한 예법도 잊은 것이냐?!”
구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여광을 바라보았다.
여광이 마구 발악했다.
“나는 종남의 대장로이자 너희 모두의 사형이다! 내 죄가 어찌 되었든 문파의 큰 어른을 이따위 냄새나는 곳에 가둬 두다니! 너희 모두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구윤의 얼굴에 생생한 분노가 떠올랐다.
그 역시 여광을 사형으로 존중하고 존경하던 사람이지만, 일전에 자신을 죽이려 들었을 때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았더랬다. 심지어 얌전히 죽을 생각까지 했다.
그 정도 예의를 보여 주었다면, 그리고 이곳에서 반성이라는 걸 했다면 지금 저런 모습을 보여 줘선 안 되었다.
오랫동안 억눌러 놓은 성격이 뱃속에서부터 무섭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장로!”
“닥치거라, 구윤!”
“장문인 앞에서 그 어인 망발이오! 당장 고개를 조아리고 사죄하시오!”
“입 닥치지 못할까! 네놈이야말로 고개 숙여 사죄부터 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소리를 질러 대는 게야!”
어이가 없다 못해 분노를 일으키는 말이었다. 사제를 죽이려고 칼까지 뽑아 든 인간이 할 말이 아니었다.
구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녕 노망이라도 나셨단 말이오?!”
“저 못 배워 처먹은 놈이 감히!”
그때, 순우가 손을 들었다.
순간 두 사람의 입이 저절로 닫혔다. 손을 든 순우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도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순우가 여광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광의 눈이 흔들렸다.
“대사형.”
“…….”
“대사형의 정신이 멀쩡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앞에서 언제까지 그런 연기를 하실 겁니까?”
“……!”
“죽음이 두려우신 겁니까? 아니면 잊혀지는 것이 두려우신 겁니까? 그도 아니면…….”
순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 외면하는 것입니까?”
“……장문인.”
여광이 침을 삼켰다.
“자네는 내 말을 들어야 하네. 다 사정이 있었어. 지금 자네 주변에는 나와 자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배은망덕한 망종들만이 가득하네.”
“…….”
“물론 내게도 죄가 있네. 나이를 먹으니 사람이 편협해진 모양이야. 그러나 설명할 수 있네. 내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한들, 설마하니 이유도 없이……!”
“틀렸습니다.”
“무, 무슨 말인가?”
순우가 재차 눈을 떴다.
순간 여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슬픔으로 가득했던 순우의 눈에서 매서운 한광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대사형께서 정녕 반성을 하셨다면, 삼장로에게 사과부터 하셨어야 합니다.”
“장문인!”
“또한!”
순우의 강렬한 목소리가 동혈 전체를 울렸다.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종남의 장로가 제자들에게 속세의 위선자들이나 뱉을 법한 흉한 가르침을 진리인 양 설파한 것 역시 중죄 중의 중죄입니다!”
여광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표정과 달리 다급했다.
“말했잖은가! 나에게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었어! 저 무도한 흑도 놈들의 뒤를 쫓느라 나도 날이 서 있었단 말일세!”
“흑도?”
순간 순우의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흑도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여광은 당황했다. 순우가 일련의 과정을 전부 듣고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이 말할 때를 놓쳤다.
구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쟁이 벌어지기 수일 전, 대장로가 검사들을 데리고 하산하였습니다. 장로 회의를 거치지 않은 독단이었지요.”
“그래서?”
“대장로는 섬서로 들어오려는 연 대수 일행을 막았습니다.”
순간 순우의 두 눈이 시퍼런 광채를 발했다.
얘기에 끼어들려던 여광은 침만 삼켰다. 내공이 봉쇄된 건 물론 갇혀 있기까지 한 그에게, 순우의 기도는 지나치게 두려운 것이었다.
구윤은 그간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잠시 후.
“…….”
순우가 탄식을 토해 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경황 중에 대장로가 저지른 죄목들 위주로 보고를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여광이 끼어들었다.
“장문인이라면 내 마음을 알 것이네. 섬서는 우리 종남의 노력 덕에 사마외도가 발도 붙이지 못할 만큼 깨끗해졌어. 그런 곳에, 제아무리 맹부가 동맹을 맺었대도 어찌 흑도를 들일 수 있겠는가?”
“…….”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나는 종남을, 나아가 섬서 전체를 위해…….”
구윤이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여광의 말을 끊었다.
“연호정 대수가 데리고 온 흑도인들의 도움으로 종남산은 멸문을 면했소.”
“뭐?”
“그들이 아니었다면 대장로도 지금쯤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오. 적도들이 본산을 점거하고 문도들의 씨를 말려 버렸을 테니까.”
여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 설마 흑도 놈들을 본산에 들였단 말이냐?”
“당연한 것 아니오?”
“이런 정신 나간 놈들!!”
여광은 진심으로 분노한 듯 살기까지 드러내며 외쳤다.
“네놈들이 정녕 종남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구나! 그런 쓰레기들을 신성한 종남산에 들이다니, 부끄러운 줄 알거라!”
콰앙!
순간 여광이 기겁하며 벽 너머로 물러났다.
순우의 주먹이 철창을 후려쳤다. 주먹에 맞은 철창이 움푹 들어갔다.
순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삼장로.”
“예, 장문인.”
“내일 아침, 대장로 여광의 단전을 폐하고 사지근맥을 자를 것이다.”
여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장문인!”
순우가 여광을 바라보았다.
여광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순우의 눈빛은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살벌함으로 가득했다.
말없이 한참이나 여광을 노려보던 순우가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구윤은 고개를 숙이며 그 뒤를 따랐다.
점점 멀어지는 뇌옥.
두 사람의 귀로 여광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릉.
세오동에서 나온 순우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문 사형, 괜찮으십니까?”
“사제.”
“……예, 사형.”
“내일 아침 연 대수에게 따로 기별을 넣어 주게. 저녁에 밥 한 끼 같이 하자고.”
구윤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