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09화 (709/963)

◈709화. 죽음과 인연 사이 (9)

“연 공자. 거기는 식당 쪽이 아니에요.”

“알아.”

“아니 그보다, 거처에 있으면 내가 가져다줄게요.”

“됐어.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좋지 뭐.”

“몸은 괜찮아요?”

“안 괜찮은 몸 이끌고 굳이 산을 타겠냐.”

“글쎄요. 그런 바보짓을 수도 없이 봐 와서요.”

“하여튼 상관에 대한 존중이 없어.”

“컹!”

“소리 좋은데? 콧방귀 한 번 더 껴 봐라.”

“싫어요.”

티격태격하며 길을 걷는 두 사람.

조용히 뒤따르던 가득상이 입을 열었다.

“연 대수.”

“말씀하시오.”

“난 이만 가 보겠소.”

걸음을 멈춘 연호정이 가득상을 돌아보았다.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전후 처리할 게 꽤 많아서 말이외다. 처리할 거 다 처리하고,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오겠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까지 최대한 몸을 만들어 놓겠소.”

화진천 건을 얘기하는 것이다.

가득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극에 오른 괴물 싸다구를 어떻게 날리라고? 됐으니까 잊으시오. 나도 잊을 테니까.”

“괜찮겠소?”

“싸다구 쳐서 괜찮을 거면 댁이 누워 있을 동안 수도 없이 찰싹댔을 것이오.”

“흐음.”

“앞으로는 조심 좀 해 주시오. 뭐, 이런 말을 해 봤자 똑같은 상황이 오면 또 그 난리를 치겠지만.”

“안 그러겠소.”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최대한 인도주의적으로 처리하겠소.”

가득상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의 콧방귀는 묵비의 그것보다 세 배는 더 컸다.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는 게 아니오. 그리고 뭐, 서로 사정 봐주면서 할 만한 일도 아니고.”

“…….”

“적당히 삐쳐 있을 테니까, 기분 풀리면 그때 술이나 한잔 사든가.”

“그러겠소.”

“잘 쉬고 계쇼. 어디 또 일 터졌다고 발 질질 끌면서 쫓아가지 말고.”

가득상이 삽시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묵비가 말했다.

“연 공자가 쓰러져 있는 동안 후개가 걱정이 많았어요.”

“알아.”

“안다고요?”

“그래. 어지간한 상황은 다 읽고 있었으니까.”

연호정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아련해졌다.

그간 바빠서 예전처럼 술도 잘 못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술은커녕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양반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보니 좋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득상은 흑암제 시절 때부터 호감을 느꼈던 사람이다. 그때의 가득상과 지금의 가득상은 아무 차이가 없었다.

변하지 않는 정의, 의리, 그리고 인간다움.

‘한 번은 푸는 게 좋겠어.’

연호정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기실 가득상 입장에서는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번 종남 전쟁에서 연호정이 보여 준 모습, 그리고 조금 전 종남 장문인 순우와 진양, 소정광과의 대담에서 보여 준 모습.

그 모습에서 가득상은 이미 연호정에 대한 서운함을 다 풀었다. 애초에 서운함이랄 것도 크게 없었지만.

오히려 가득상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연호정은 연호정이다. 변함없이 거침이 없고 직설적이며, 동시에 생각이 깊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와 분위기가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것만으로도 가득상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연호정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나저나 어디 가는 거예요?”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

“누구요? 패율 선배?”

“가 보면 알아.”

잠시 후.

“음?”

방금 막 수욕을 마친 듯, 황석태가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나오고 있었다.

“연 부관.”

“피곤해 보이는군.”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다 죽어 가는 자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실제로 연호정의 기도는 꽤 불안정했다.

이룬 경지가 너무 높아서 어지간한 고수는 느끼지도 못할 정도지만, 그와 가까운 사람은 한눈에 연호정의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내가 여기서 지내는 건 어떻게 알았나?”

“몸뚱이는 이 모양이 되었어도, 감각은 죽지 않았어.”

“괴물이 따로 없군. 자네 거처에서 여기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황석태가 한쪽에 놓인 평상을 가리켰다.

“앉게.”

“그러지.”

황석태의 거처는 종남 본산 절반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황석태였다. 많은 문도가 죽었지만, 장로들은 황석태에 대한 대우에 신경을 썼다.

흐르는 구름. 감탄이 나오는 절경.

거기에 황석태의 거처 뒤에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연호정이 탄성을 질렀다.

“정말 좋은 곳이군.”

“전대 장문인이 등선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라고 하네.”

“굉장한 대우구만. 종남에서 꽤 신경을 썼어.”

평상에 앉은 황석태가 묵비를 힐끔 바라보았다.

묵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주 고개를 숙인 황석태가 연호정에게 물었다.

“역시 자네 동료였나?”

“아, 아직 서로 통성명도 안 했나?”

연호정이 묵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림맹 의정군 부장 묵비라고 하네. 의정군 이전에 멸사군 소속이었을 적부터 함께했지.”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귀궁신녀…….”

“알고 있나?”

“명성은 많이 들었지. 신들린 궁술 솜씨를 보며, 어쩌면 귀궁이 아닐까 싶긴 했네.”

황석태가 포권을 취했다.

“묵룡부 용아철기단 단주 황석태라 하오.”

묵비도 다시 예를 취했다.

“의정군 부장 묵비예요.”

연호정이 묵비를 보며 말했다.

“너도 서 있지 말고 앉아.”

“난 서 있는 게 편해요.”

“그래라, 그럼.”

황석태가 담담하게 말했다.

“찻잎은 없고 술은 좀 있네. 마실 거면 가져다주지.”

“어? 그거 좋지. 안 그래도 목이 칼칼했어.”

묵비가 도끼눈을 한 채 연호정을 내려다보았다.

연호정이 투덜거렸다.

“괜찮으니까 마시는 거야.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구. 뒤통수에 구멍 날 것 같잖아.”

“몸에 안 좋은 건 다 하네요, 정말.”

“소독이야, 소독.”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묵비가 혀를 찼다.

잠시 후.

서로의 잔을 채워 준 두 사람이 잔을 비웠다.

“커허!”

연호정이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속이 무지하게 쓰리구만.”

“안주는 없네. 한 잔 마셨으니, 이제 그만하게.”

“시큰시큰하니 좋은데, 왜. 한 잔 더 따라 주게.”

“……화살 조심하게.”

그렇게 두 사람은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연호정의 얼굴이 불콰해졌다. 고작 몇 잔에 불과하지만, 벌써부터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얼굴이 아주 볼만하군.”

연호정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뜨뜻하게 달아오른 게, 날 선 신경이 착 가라앉는 것 같았다.

황석태가 말을 이었다.

“강량에게서 연락이 왔네.”

“그러고 보니 그 자식 전쟁 끝난 지가 언젠데 왜 여태 안 오지? 지 소저랑 살림이라도 차렸나.”

“떠나기 전에 연락하라더군. 뭔가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야.”

연호정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살림이야 농담이고, 지 소저 때문이 맞을 거야. 스승과 작별 인사까지 한 마당에 제정신이 아니겠지. 강량 그놈 성격에 그냥 놔두기도 뭐할 거고, 애써 다독이고 있겠지.”

“녀석에게 그런 면이 있었나?”

“혼자가 된 심정, 그 녀석이 모를 리가 없잖나.”

황석태의 입이 다물어졌다.

귀철검문은 묵룡부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강량이었다.

“돌이켜 보면 정말 대단하군.”

“뭐가.”

“녀석에게 있어 부주님은 철천지원수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무 내색도 없이 잘 드나들지 않았나. 나라면…… 보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을 거야.”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강한 녀석이야. 원수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 정말 많지 않아.”

“그렇지.”

두 사람을 그 외에 잡다한 대화를 나누며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어떨 때는 진지했고, 또 어떨 때는 웃음보가 터졌다. 깊이 있는 대화는 없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편안한 자리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호정이 황석태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말게.”

분위기가 꽤 무르익었다고 생각해서일까. 연호정의 목소리는 한층 무거워져 있었다.

황석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가?”

“자네 잘못이 아니야. 종남 검사들의 죽음은.”

“…….”

황석태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상에 병을 내려놓은 연호정이 종남 본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대낮이라 세상이 밝았다.

“괜스레 마음에 걸렸더랬지.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왠지 자네라면 책임을 느낄 것 같아서.”

“…….”

“임시라지만 지휘관으로서 함께 싸웠어. 그것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만일 거야. 하지만 전쟁이라는 게 어디 그렇던가.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이라도 그 살벌한 적과 교전을 벌였는데, 내 지휘 아래 죽은 아군이 생기면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

“마음이 좋지 못한 것은 당연하네. 특히 자네처럼 책임감 강한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지.”

“…….”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네. 만약 종남 장로들에게 전투를 맡겼다면, 그 많은 검사들은 아마 제대로 대처도 못 하고 우왕좌왕하다 그대로 전멸했을 거야.”

황석태는 말없이 잔을 내려다보았다.

연호정이 다시 황석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전쟁은 자네 덕분에 이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마음 편히 가지란 말은 않겠지만, 그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지하게.”

가만히 술잔을 내려다보던 황석태가 그대로 잔을 비웠다.

“커허! 쓰군.”

황석태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철기단과 다르더구먼.”

“다르지.”

“철기단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어. 셀 수도 없이 많은 작전을 치렀지. 그 와중에 사상자도 많이 났네.”

“그랬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철기단은 강해졌어. 일 년에 수십 명씩 교체되었던 철기단은, 근 몇 년 동안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네.”

“괜히 묵룡부 최강이 아닌 게지.”

“맞네. 그래서 잊어버렸던 모양이야. 적의 창칼에 죽은 아군의 눈빛을 떠올리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황석태가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래도 철기단과 함께 싸웠다면, 철기단의 전사들이 죽었다면 분명 슬펐을 것이나 지금처럼 심란하지는 않았을 걸세.”

“…….”

“우리는 군인이야.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지. 어떤 전장에서라도 죽을 수 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함께하고 있네. 슬퍼도 담담하게 저승으로 보낼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종남 검사들은 아니었지.”

“그래, 아니었어. 내 나름대로 지닌바 역량을 마음껏 펼쳤지만, 정작 철기단과 함께했을 때처럼 마음을 다잡지는 못했던 모양이네.”

황석태가 씁쓸하게 웃었다.

“도대체 그 차이가 뭐라고 사람을 이리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네.”

연호정이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고는 그대로 비워 냈다.

가만히 황석태를 보던 연호정이 평상에서 일어났다.

“몸 좀 축났다고 더럽게 빨리 취하는군. 더는 못 마시겠어. 이만 가서 쉬어야겠네.”

황석태는 말없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푹 자고, 푹 쉬고 내일 보세.”

“조심히 들어가게.”

“적당히 마시고.”

“알겠네.”

그렇게 연호정과 묵비가 황석태의 거처를 나왔다.

황석태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술을 마셨다.

거처로 가는 길.

조용히 걷던 묵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위로해 주러 온 거였어요?”

“위로? 글쎄…… 저 남자한테 굳이 위로랄 게 필요할까 싶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거든.”

연호정이 살짝 비틀거렸다. 과음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그래도 그냥 놔둘 수는 없잖아. 종남 사람들은 저희끼리 감정을 나눌 테지만 황 단주는 혼자야. 아마 지금까지 쌓인 게 많았겠지.”

“그렇군요.”

“사람인 이상 쌓인 감정을 한순간에 다 풀 수는 없어. 하지만 반드시 풀어야 하는 때라는 건 있지.”

“그게 지금이군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승패가 나뉘었다고 끝나는 게 전쟁이라면 얼마나 편하겠냐. 이겨도, 져도 살아남은 자들을 자꾸만 죽이려 드는 것. 그게 바로 전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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