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08화 (708/963)

◈708화. 죽음과 인연 사이 (8)

연호정과 묵비, 가득상이 사라지고.

거처 앞에는 진양과 소정광만이 남았다.

“…….”

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소정광이었다.

“인사나 하러 왔다가 뭔가 어마어마한 얘기를 들어 버렸네요.”

진양은 말없이 허공을 노려보았다.

소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시죠?”

“정광.”

“말씀하세요.”

진양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나, 문주로서 실격이냐?”

소정광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실격까지는 모르겠지만 모범적인 수장은 아니죠?”

진양이 얼굴을 구겼다.

“정말 그랬다고?”

“무슨 대답을 바란 겁니까? 그럼 세상 어떤 문주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했지.”

“나쁘진 않아요. 적어도 제 입장에선 그래요. 다른 문도들은 모르겠지만.”

소정광이 피식 웃었다.

“저 양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솔직히, 무서울 정도로 문주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그러게.”

“다만, 문주님 말씀도 맞아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아 보겠다는데, 천품이니 재지니 하는 말로 꼬드겨 봤자 의미 없죠.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의 의사 아닙니까.”

“너는?”

“뭐가요?”

진양이 소정광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혼란으로 가득했지만, 그만큼 진지했다.

“모범적이지 못한 문주에게 몇 번이나 직언을 건넸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도망치고 싶진 않았냐?”

소정광이 인상을 찡그렸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제대로 해야죠. 막말로, 나 아니었으면 화웅문이 이렇게 컸겠어요? 도망치고 싶어도 아까워서 못 치죠.”

“결국 치고 싶었다는 거구만.”

“꽤 자주? 하지만 뭐, 그 정도 답답해서 연 끊을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겠죠. 요즘은 그런 것도 없어요.”

참으로 소정광다운 말이었다.

유약하고 때로는 경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누구보다도 의리가 넘치는 남자다. 어릴 적부터 진양과 죽이 맞았던 것도 두 사람의 그러한 성격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정광의 발언이, 지금의 진양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주 떠나고 싶을 정도였다…….’

문주와 부문주이기 이전에, 두 사람은 친구였다. 진양 역시 소정광에게 그런 순간이 없진 않았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들어 보니,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자주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화웅문이 과도기에 접어든 이후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처음처럼 부딪치진 않았지만, 가끔 서로에게 냉랭했을 때도 있었으니까.

진양은 나직이 탄식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나는 어느새 주변 사람의 마음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 버렸나.’

생각해 보니, 근래 들어 소정광과 진득한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실없는 농담을 나누거나 과거 치열하게 살았던 때를 추억하는 정도랄까.

그 옛날, 화웅문을 처음 만들었을 때의 치열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너는 어땠으면 좋겠냐?”

“뭘요?”

“혓바닥에 비수 달린 연 씨의 말 말이야.”

“그니까 뭘요? 한두 마디를 했어야죠.”

진양이 애써 퉁명스럽게 말했다.

“함께하자고 하는 저 말, 너라면 어쩌겠냐?”

“못된 버릇 나오시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문주님께서 정하셔야지.”

“부문주이자 군사인 소정광한테 묻는 말이 아니야.”

“…….”

“내 친구 소정광에게 묻는 말이다.”

장난기 넘치던 소정광의 얼굴이 서서히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진양은 내심 놀랐다.

소정광의 저런 표정,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모르게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나에게 그런 걸 물어 봤자 의미 없어.”

목소리는 같지만, 말투가 바뀌었다. 그래서 더더욱 깊고 묵직하게 들린다.

“고민이 많은 건 알겠지만, 타인의 생각이나 경험을 참조해서 답이 나올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 너도 알 거야.”

“…….”

“솔직히 말할까?”

“뭘?”

“넌 문주로서 낙제점이야.”

진양이 얼굴을 구겼다.

“아깐 나쁘지 않다며?”

“내 친구니까. 대신 칼 맞아 줘도 아쉬울 거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적 인연을 지닌 문주니까 나쁘지 않지. 부문주이자 군사로서는 그랬어.”

“…….”

“친구로서 냉정하게 말해 주자면, 넌 절대 좋은 문주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그래…….”

“화웅문을 만들 때의 너는 그렇지 않았어. 지금과 분명히 달랐지.”

“그랬겠지.”

“과거, 큰 군벌을 거느린 지역의 패자가 몇 개의 지역을 통합한 후에 나라를 세운 적이 있어. 군 지휘관에서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 온 거지.”

“…….”

“통치자로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변화를 받아들인 이들은 후세가 인정하는 태조(太祖)가 된다. 그러나 통치자로서의 올바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는 끝내 지역 패자 정도의 그릇으로 남는 거야. 그럼 그 나라는 삼대(三代)는커녕 이대(二代)도 못 가서 망해.”

“…….”

“지금 네가 그래. 통치자, 문주로서 살아가야 할 녀석이 아직도 과거 화끈하고 강했던 장수 시절에서 벗어나질 못했어.”

“…….”

“덕분에 잘 살아남았지. 정파 놈들이 근처에 오면 짐 싸 들고 도주하는 거, 치고 빠지는 것 하나만큼은 수준급이었잖아. 문파를 건립하기 전, 우리가 숱하게 많이 해 봤던 짓이지.”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소정광의 표정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 역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심정이 좋을 리 없었다.

“연 대수의 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어. 하지만 변화는 필요해.”

“…….”

“사실은 너도 알잖아? 이대로 살면 안 된다는 거. 이대로 살다간, 언젠가 네가 책임져야 할 문도들이 죽어 나자빠지거나 화웅문을 외면하리라는 거.”

진양이 눈을 감았다.

가만히 그를 보던 소정광이 팔짱을 꼈다.

“나는 화웅문의 부문주이자 군사야. 문주의 선택에 목숨을 건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해.”

“…….”

“그러니 친구로서의 내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의 직책에, 삶에 책임을 져 봐.”

연호정이 던진 폭탄 위로 소정광이 화려한 불씨를 지폈다.

진양은 생각했다.

‘맞는 말이야.’

친구의 말도, 연호정의 말도.

다 맞는 말이다.

특히 소정광의 말이 마음에 강하게 남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이 험난한 강호를 헤쳐 왔으니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광에 대해 제대로 알려 하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을 아는데, 자신은 근래 상대의 언행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유는 명백하다. 굳이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함께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살아 버렸다.

‘화웅문주라는 직책에 만족한 게 아니야. 그런데도 현실에 안주해 버렸지. 도대체 왜?’

순간 진양은 연호정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천품, 스스로의 열망을 알고도 거기서 눈을 돌려 현실에 안주하고 있으니, 이 어찌 엇나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품. 열망.

진양은 생각했다.

‘내 천품이 뭐지?’

알 수 없었다. 천품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들렸다. 애초에 그런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내 열망은?’

순간 진양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열망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 머리에서 저절로 그림이 그려졌다.

저잣거리 안, 큼직한 칼을 메고 다니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하게 웃으며 인사하거나 툭툭 건드리며 농담 따먹기를 한다. 자신은 괜스레 몸을 사리며 아픈 시늉을 하다가 결국에는 또 껄껄껄 웃음을 터트린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후우우우웅!

또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이름 모를 산적들, 혹은 악인들이 마을을 침략한다.

자신은 사람들 모르게 그들을 모두 물리친다. 누구 하나 마을에 손대지 못하도록, 아예 싹을 잘라 버리고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의 반복.

‘…….’

가만히 진양을 보던 소정광은 내심 깜짝 놀랐다.

진양의 눈이 조금씩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끝끝내 흘러내리지 않은 맑은 액체가 눈에 한가득 고여 있었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

진양은 탄식했다.

‘나는 괴물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커다랬다. 코 밑이 거뭇거뭇해지기 전에도 이미 어지간한 성인보다도 키와 덩치가 컸다.

사람들은 그를 경외의 시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꺼림직하게 여겼고, 점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험악하기 그지없는 세상, 마을에 장사가 태어나면 모두가 기뻐한다. 거대하고 힘이 센 것은 그 자체로 미덕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그러한 인식조차 벗어날 정도로 거대했다.

만약 스승을 만나 체내의 기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한 자는 더 커졌을 것이다.

‘나는 왜 화웅문을 세웠지?’

답은 간단했다.

울타리를 만들고 싶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을 지키고 싶었다. 그 안에 녹아들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화웅문이 세워지자 사람들은 그를 흑도 문파의 수장으로 대하며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문파를 옮겼다. 내가 나고 자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자 했는데, 정작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했으니까.

진양은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하기를 바랐다.

천고의 재능 덕에 이른 나이로 무종지벽을 돌파했지만, 그따위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절정고수 수준이면 어떻고, 삼류를 전전하면 어떤가.

함께 웃고 서로가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런 세상에 속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살 만하지 않은가.

모범적인 문주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배하여 다스리고자 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애초에 그가 바라는 인생이 아니었다.

함께하고, 또 함께하는 것.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상대를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여겨 주는 것.

“정광.”

가만히 진양을 바라보던 소정광이 고개를 숙였다.

“예, 문주님.”

“본문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애들에게 말해 놓지요.”

“너는 안 간다.”

“네?”

진양이 소정광을 바라보았다.

모든 혼란을 걷어 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더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작은 의지 하나가 담겨 있었다.

“너는 여기 남아라. 나와 애들만 갈 거야.”

말없이 진양을 보던 소정광이 미소를 지었다.

“얼른 다녀오십시오.”

“중간에 생각 바뀌면 연락하지.”

“언제든지요.”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죠.”

“…….”

“맞죠?”

진양이 피식 웃었다.

“종남 놈들 너무 믿지 말고. 흑도라고 또 시비 털라.”

“연 대수님 옆에 찰싹 붙어 있을 겁니다.”

“되지도 않는 아양은 안 떠는 게 좋을 거다. 그 양반 눈에서도 도끼가 나오더만.”

“그러니까 더더욱 아양을 떨어야죠.”

“간다.”

진양이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소정광이 입을 열었다.

“문주님.”

“왜?”

소정광이 포권을 취했다.

“그동안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뭔 죽으러 가는 사람한테 하는 인사를 하고 있어, 불길하게.”

“죽을 것 같은데요?”

“뭣이라?”

“적어도 제가 알던 문주님 한 분은 방금 뒈지셨습니다. 또 몇 분이나 뒈지실지 기대가 되네요.”

진양이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팔자걸음으로 걷는 그의 뒷모습은 묘하게 시원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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