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07화 (707/963)

◈707화. 죽음과 인연 사이 (7)

가득상이 안타까운 눈으로 연호정을 볼 때.

연호정이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상체를 세웠다.

“아직도 삭신이 쑤시는군.”

묵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가며 말했다.

“더 누워 있어요.”

“괜찮아. 곧 밥 먹을 때도 됐고.”

연호정이 소정광과 진양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복잡한 얼굴로 연호정을 보고 있었다.

종남 장문인 순우와의 대화, 그리고 가득상과의 대화를 전부 들은 그들이었다.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번 전투에서 엄청난 공을 세운 연호정이, 정작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어느 정도 희생한 듯하다.

그러한 모습이 두 사람의 심경을 묘하게 복잡하게 만들었다.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만 가겠다고?”

소정광이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여기서 더 할 일도 없고 해서요.”

“그렇겠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공은 활발하게 회복되었고, 내상 역시 많이 호전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외상 치유가 더뎠다.

‘축적됐군.’

무극을 개방하며, 내기(內氣)는 물론 육체까지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발전했다. 근골, 신경, 혈관 등등 모든 것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명극과 만나기 전에 깨달았던 것과 같이, 그는 이 경지에 이른 뒤로 더 강한 출력의 무공만을 생각했을 뿐 스스로를 돌아본 적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의 피로가 알게 모르게 쌓인 건가.’

새 옷을 입었다면 그것이 몸에 맞춰지는 기간이 필요한 법.

한동안 전투를 멀리하고 몸과 진기를 안정적으로 다듬었다면 외상은 진즉에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한 탓에 몸에도 한계가 왔다. 그것은 무극의 경지에 든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당분간은 몸도 돌볼 겸, 이번에 얻은 깨달음을 정리해야겠군.’

연호정이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헛기침을 했다.

“잘 있으시오.”

“돌아와라.”

“……엥?”

“문파 정리하고 다시 돌아와. 그게 나을 거다.”

진양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망발이오? 내 문파를 왜 정리해?”

“큰물에서 놀아. 여기저기 눈치 보면서 돌아다니지 말고.”

진양의 얼굴이 멍해졌다.

제안인지 폭언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소정광 역시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도 봐서 알겠지. 전쟁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살벌한 것인지.”

“…….”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놈들은 높은 확률로 전면전을 펼칠 것이다. 그전에 이번 종남 때처럼 꽤 살벌한 전투가 수차례 벌어지겠지만.”

“그런데?”

“너희 역시 전화(戰火)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진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거지.”

“그때 가서 후회하느니, 지금부터 목숨 걸고 지켜.”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오.”

“너희 둘은 지금의 문파를 밑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렸다. 그 정도 수완이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 충분히 먹고 살 만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건 댁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거요. 우리에겐 우리 나름의 방식이 있소.”

“나름의 방식이 있어서 개방 장로의 협박에 여기까지 온 거냐?”

“…….”

진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사는 방식은 저마다 다른 법이지. 하지만 너희의 무력, 빛나는 재지(才智)를 이대로 썩히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워.”

“다시 말하지만 그건…….”

“왜 애들을 구했지?”

“……뭐요?”

“너희의 이동 경로를 유추해 보면, 종남 본산으로 오는 길이 훨씬 단순하고 빨랐을 것이다. 협박 비슷한 강권을 받은 너희로서는 대충 보여 주기식 전투만 치르고 사라지면 그만인데, 왜 굳이 애들을 구하러 간 거냐?”

진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무공을 배우든 말든 애는 애요! 애들 죽이려고 쫓아가는 놈들을 그냥 두고 볼 사람이 어디 있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묵비 역시 묘한 눈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잘 말했다. 너의 그 행동은 당연하기에 찬사받아 마땅하다. 말하자면, 너에게는 선(線)이라는 게 있는 거야.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됐소. 쓸데없이 보러 온다고 했군. 이만 가겠소.”

“그놈들은 그런 놈들이다. 애들이라고 봐주지 않아. 오히려 옳다구나 싶어 아이들의 목을 잘라 적의 사기를 망가트리려고 하는 미친놈들이다.”

진양이 외쳤다.

“정광! 이만 가자!”

소정광이 주춤했다.

진양이 재차 외쳤다.

“뭐 하고 있어! 가자니까!”

“언제까지 삶을 낭비할 셈이냐!”

쩌어엉!

갑작스레 터져 나온 연호정의 일갈에, 진양과 소정광은 물론 묵비와 가득상의 몸까지 굳어 버렸다.

화아악!

허허롭기 그지없던 연호정의 기세가 폭발하는 화산처럼 매서워졌다.

연호정이 찬란하게 빛나는 눈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강철처럼 단단한 자존심이 그것을 거부했다.

연호정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가 나는가?”

“……뭐요?”

“제삼자가 문파를 정리하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나? 개방 장로의 협박에 못 이겨 왔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건가?”

“당신의 말투 자체가 상대를 열받게 하잖소!”

“아니면, 정곡이 찔렸기 때문인가?”

“……!”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한결 깊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의 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사는지,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 어떤 미래를 지향하는지 모른다.”

“…….”

“하지만 지금의 네가 엇나가 있다는 건 안다.”

“내가 엇나갔다고?”

“엇나갔다. 엇나가도 한참 엇나갔지.”

“네놈이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진양의 입에서도 기어이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연호정의 얼굴에 다시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천품, 스스로의 열망을 알고도 거기서 눈을 돌려 현실에 안주하고 있으니, 이 어찌 엇나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천천히 진양에게 걸어간 연호정이 그의 가슴에 검지를 올려 두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진양이 일그러진 얼굴로 연호정을 내려다보았다.

연호정이 재차 말했다.

“광동에 똬리를 틀었다가, 무림맹 의정군이 작전을 나왔다 하니 곧바로 섬서로 올라와 또다시 울타리를 지었다. 그렇게 섬서에서 생활하다가 전쟁이 터졌다고 하니 또 한 번 벗어날 생각이었지만, 개방 장로의 협박에 가까운 강권에 못 이겨 전쟁에 참여하고야 말았다.”

“…….”

“그게 네놈이 원하는 삶이냐?”

진양이 으르렁거렸다.

“내가 어떻게 살지는 내가 정한다!”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하지 마.”

“네놈이 뭔데 그런 기회를 준다는 것이냐!”

“내가 아니면 누가 기회를 준단 말이냐? 누군가의 진솔한 걱정을, 한 번이라도 마음 깊이 받아들인 적이 있느냐?”

“……!”

순간 진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연호정이 손으로 소정광을 가리켰다.

“네놈과 가장 가까운 친구의 말조차도 너는 제대로 듣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를 친구로 여기고 있어. 가까운 타인의 마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인생을 제대로 꽃피울 수 있겠는가?”

진양은 저도 모르게 소정광을 바라보았다.

소정광의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갑작스레 불타오르는 분위기에 끼어들기도, 끼어들지 않기도 애매한 입장인 것이다.

연호정이 말했다.

“넌 왠지 모를 껄끄러움에 친구를 대동하고 여기까지 왔다.”

“……!”

“종남 장문인을 보았느냐? 수장이란 그런 것이다. 책임지지 못했음에 슬픔이 사무쳐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였지. 나서서 함께 죽지 못한 현실에 탄식하여 치솟는 분노를 제대로 해소조차 못 하고 있다.”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넌 달라. 언제나 소정광을 대동하고 다녔다. 하물며 껄끄러운 일이 있을 때면, 문주인 네가 직접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친우이자 아랫사람을 시켜 적당히 빠져나갈 구실을 찾았지.”

“이익!”

“그것을 사소한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진짜 위험할 때는 다를 거라고 말하지 마라. 이런 사소한 일마저 스스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 너는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진양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연호정의 목소리에 은은한 위엄이 실렸다.

“지금의 너는 수장의 그릇이 아니야.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진지하게 되돌아본 적 없는 너는 언제나 이 모양일 것이다.”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라.”

연호정이 한 발 뒤로 물러나 뒷짐을 졌다.

순간 진양은 그의 모습이 몇 배로 커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가까이 있을 때는 자신보다 작았던 남자가, 물러나니 산처럼 거대해진 것이다.

“나와 함께하지 않아도 좋다. 함께하길 바라지만, 네가 정히 싫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아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스스로의 삶을 바로잡고 싶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라.”

“…….”

“나에게는 그럴듯한 꿈이라는 게 없다. 그저 확고하고도 단순한 목표 하나가 있을 뿐이야.”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흑암제 시절, 수많은 시체 속에서 힘없이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자신에게 다가오는 거구의 사내가 있었다. 거구의 사내와 함께하는 지친 기색의 문사풍 사내도 있었다.

애써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등을 두들기는 진양. 기묘한 말투로 분위기를 쇄신해 주는 소정광.

저 멀리 앉아 가면을 쓴 채 이쪽을 바라보는 묵비와 검을 안고 있는 강량.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신장.

“나는 그 목표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그 이후의 삶은 상상해 본 적이 없어. 그런 면에 있어서, 어쩌면 난 너와 비슷할는지도 모른다.”

연호정이 다시 눈을 떴다.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는데도 내 삶은 이와 같다. 그때부터 이 생을 하늘이 내린 숙명이라 받아들였다. 또한 내가 바라마지 않는 삶이기에 이는 필연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진양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달관한 듯하면서도 분명한 확신을 지닌 연호정의 눈과 목소리가 기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함께했으면 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도 좋다. 이제 스스로의 열망에서 고개를 돌리는 짓은 그만둬. 너만 한 남자가 여태 그러고 사는 꼴,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왜지?”

“무엇이?”

진양이 무거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요?”

“…….”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나를 아는 기색이었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없소.”

“그렇겠지.”

“당신은 누구요? 왜 나를 끌어들이려는 거요?”

“너에게, 아니 너희에게 구함을 받은 사람이다.”

“뭐?”

“목적 없이 살아갈 뿐인 나의 인생에 빛으로 다가와 준 인연들이었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덕분에 나 또한 남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너희 모두가 나의 은인이다.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허락한다면, 이제부터 그 은(恩)을 갚겠다. 결정은 너희 몫이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