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4화. 죽음과 인연 사이 (4)
“후우.”
언제나처럼 깊은숨을 몰아쉬며 수련을 끝낸다.
당상아는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연위를 바라보았다.
제법 추운 날씨임에도 가벼운 경장 차림을 했다. 그러고도 온몸이 땀으로 가득했다.
대개 무종지벽을 돌파하면 한서(寒暑)가 불침한다. 더위와 추위는 분명히 느끼지만, 신체가 매 순간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땀 흘릴 일도 없다.
연위는 그러한 경지에서도 거의 끝에 도달한 자였다. 그런 고수가 온몸이 땀에 푹 젖을 정도로 수련을 한 것이다.
‘대단하시다.’
당상아는 경외를 느꼈다.
‘단순히 노력한다고 저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을 거야.’
내로라하는 고수 중 노력 안 했던 사람이 없고, 노력 안 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연위는 뭔가가 달랐다.
거의 광기에 젖어 수련하는 이들을 보면 사실상 정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연위는 수련 시간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 외의 시간에는 온화하고 엄격한 모습을 유지했다. 흔히들 말하는 고수일수록 성장하기 위해선 미쳐야 한다는 모습이, 연위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당상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연위가 그 누구보다도 깊게 노력하고 있음을.
노력의 방법은 개인마다 다른 법. 연위는 정해진 시간 안에 밀도 높은 수련으로 스스로를 성장시켰다.
그러한 모습이, 당상아에게는 큰 영감과 감동을 주었다.
“끝나셨나요?”
“음?”
연위가 빙긋 웃었다. 날이 갈수록 온화해지는 미소였다.
“그래, 끝났구나.”
“뭔가 성취가 있으신 것 같아요.”
“허허, 성취는 항상 있지.”
“네?”
“무공이 퇴보해도 성취요, 경지가 정체되어도 성취다. 하루하루 내가 정한 약속을 분명하게,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취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의 범위를 스스로 축소할 필요는 없느니라. 중요한 건 이룬 성취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지.”
독특한 관점이었다. 적어도 당상아에게는 그러했다.
연위가 물었다.
“네 수련은 끝이 났느냐?”
“네? 아, 네. 저도 마침 방금 끝났어요.”
“달리 약속이 없다면 씻고 밥이나 먹자꾸나.”
“네!”
당관이 사천으로 가기 전, 연위에게 딸을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당관이 떠난 이후, 연위는 당상아를 가족처럼 보살폈다.
진짜 아버지 같다고 해야 할까.
필요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았지만, 한 번씩 튀는 행동을 할 때면 반드시 주의를 주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웠지만, 칼 같을 때는 누구보다도 단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당상아로선 참으로 낯설고도 친근한 아버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위의 그러한 언행은, 오히려 당관보다도 어렵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당상아는 더더욱 조심했고, 한편으론 더 친근감을 느꼈다.
“정 숙수가 어제부터 만든 돼지고기 요리를 낼 거래요. 그쪽으로 가 볼까요?”
“좋지. 먼저 도착하면 먹고 있거라.”
“네!”
그때였다.
“가주님!”
문밖에서 제갈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제갈문호가 들어왔다. 꽤 다급해 보이면서도 밝은 얼굴이었다.
“종남이……!”
순간 제갈문호가 당상아를 보았다.
당상아가 고개를 숙였다.
“먼저 나가 볼게요.”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때, 연위가 손을 들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인데 굳이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맙시다.”
“……?”
“상아는 입이 무거운 아이라오. 걱정하지 말고 말씀해 주시오.”
격식과 법도를 중요시하는 연위답지 않은 말이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겼답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다행이구려.”
종남의 소식은 몹시 은밀하고도 발 빠르게 전달되었다. 당장 소식을 들은 종남 장문인이 자리를 뜬 지가 닷새 전이었다.
“다만, 피해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그랬겠지.”
“피해 정도를 비롯한 자세한 상황은 봉공회의에서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아, 그리고.”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 싸움에서 연 대수가 또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상태도 멀쩡하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 전해 줘서 고맙소.”
“그럼 이만.”
이런 소식이라면 아랫사람을 시켜 전해도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직접 찾아왔다는 건 그만큼 제갈문호가 연위를 친근하게 여긴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연호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갈문호가 떠난 후,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자 씁쓸함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다행이고도 불행이구나.”
당상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연 대수가 또 위험한 임무에 뛰어들었었나 보죠?”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외세, 삼교 중 하나에서 종남을 쳤다.”
“……네?!”
“굉장한 병력을 보냈다더구나. 다만, 호정 일행과 화산 문하 등이 힘을 보태 결국 적을 무찌른 모양이다.”
당상아는 깜짝 놀랐다.
“조, 종남을 쳤다고요?!”
“그래.”
“그건…… 전쟁이잖아요!”
“그렇지.”
순간 당상아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사실을 맹의 수뇌부들끼리만 공유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기야, 구파일방 중 하나인 종남파가 외세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서는 안 될 것이다.
연위가 눈을 감았다.
“호정이 살았으니, 이는 참으로 다행이다. 하나 적의 공세에 많은 종남인들이 죽었다 하니,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다.”
“…….”
“종남 장문인께서 많이 슬퍼하시겠구나.”
가만히 연위를 바라보던 당상아가 입을 열었다.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
“섣불리 퍼져서는 안 될 정보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무림맹에서 따로 병력을 보내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중원 천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파 중에서도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를 최고로 꼽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종남은 그 자체로 강하다. 굳이 도움의 손길 따위는 필요치 않을 정도로.
문제는 외세의 힘이 중원 무림 전체와 전면전을 벌일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이다.
지역의 패자 정도의 힘으로는 막기가 힘들다면, 무림맹에서 따로 병력을 파견해 도움을 줘야 했다. 한데도 그러지 않은 것이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그 정보를 알았을 때, 이미 적은 종남에 도달해 있었다.”
“아……!”
“그리고 설령 그 이전에 알았다 한들, 맹이 섬서로 병력을 파견했을 것 같지는 않구나.”
“네? 그건 왜……?”
“전쟁이기 때문이다.”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역 한두 개를 내주고 말고의 전쟁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기에 그렇다.”
“……!”
“적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중원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적아 구별조차 쉽지 않을 지경이야.”
“하, 하지만……!”
“놈들이 종남을 친다고 했을 때, 동시에 다른 문파를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면?”
“……?!”
“아무도 모르는 새에 적이 무당산 인근에 주둔 중이었다면? 혹은 무림맹의 병력이 빠지는 것을 기다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곳을 칠 작정이었다면?”
당상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개를 내린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런 일은 어지간해선 없을 것이다. 지형도 지형이지만, 중원의 정보망은 새외보다 빠르고 정밀하니까. 하물며 묵룡부와도 손을 잡지 않았느냐.”
“그, 그렇지요.”
“다만, 우리 역시 적에 대해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입을 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이다.
속에 담고 있을 뿐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연위의 입 안에서 뱅뱅 맴돌았다. 지금 당상아에게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이것 하나만 알아 두거라. 우리도 철저히 준비 중이라는 것을. 수백, 아니 수천 년 동안 고향을 지켜 왔던 중원 무림이, 다시 한번 외세의 침략에 맞서 승전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당상아가 고개를 숙였다.
“괜한 질문으로 가주님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군요.”
연위가 껄껄껄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다만, 너는 당가의 일원이다. 사천의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나, 적들의 공격이 몹시 기기묘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않으냐?”
“……네.”
“세상은 그렇게나 급변하고 있다. 한층 위험해졌고, 동시에 찬란해지고 있지.”
연위가 당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멀리 보라고 하지 않겠다. 다만 인내가 힘들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
“이따 보자꾸나.”
당상아가 급히 물었다.
“봉공분들께 가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어찌 되었든 종남의 소식을 들으셨는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구나. 나는 그것을 위해 하루하루 충실히 사는 것뿐이다.”
“……?!”
연위가 몸을 돌렸다.
“나 또한 인내 중이니라.”
당상아는 생각했다. 연위가 어딘지 모르게 바뀐 것 같다고.
인자하고 엄격한 모습, 밀도 높은 수련과 평온한 일상의 대비.
어제 보았던 연위와 같지만, 또한 달랐다.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커지고 있다.
일반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무언가를 보며, 연위는 점차 범부(凡夫)의 영역을 초월하고 있었다.
* * *
“오셨소?”
자리에 누워 있던 용호진인이 상체를 세웠다.
황석태가 손을 들었다.
“누워 계시오.”
“아니오. 이제 많이 괜찮아졌소.”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았지만, 황석태는 굳이 그를 막지 않았다. 어차피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앉으시오.”
황석태가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황석태를 보던 용호진인이 피식 웃었다.
“묘한 광경이겠소.”
“음?”
“누가 이 광경을 보면 참 묘하다고 느끼지 않겠소? 정파를 대표하는 구파일방의 하나인 화산의 장로와 흑도 연합 최고 부대의 수장이 함께 앉아 있다니.”
황석태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팔은 괜찮소?”
“허, 농은 싫어하시오?”
“…….”
“허허, 생각보다 무뚝뚝하신 양반이군. 전장에서는 그리 날뛰시더니.”
황석태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아니, 무덤덤하다기보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것에 가까웠다. 그 역시 용호진인의 말처럼 이 상황이 어색했던 것이다.
용호진인이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부목을 댄 팔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타격 순간 오른팔로 막아서 다행이었소. 제대로 막지 못했으면 목숨이 위험했을 게요.”
“다행이오.”
“얼추 반년은 검을 쥐기 힘들 거라고 하더군. 다만, 노력 여하에 따라 더 빨리 쥘 수도 있다고 했소.”
팔을 내린 용호진인이 말을 이었다.
“제자들에게 듣기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보고 계시다고?”
황석태는 말이 없었다.
용호진인이 웃으며 재차 물었다.
“황 단주께서도 상처가 심하신데 어찌 쉬지 않으시고?”
“움직일 만하니 움직이는 것뿐이오.”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용호진인은 알고 있었다. 황석태가 왜 하루가 멀다 하고 환자들을 보러 다니는지. 왜 의원들과 함께 환자들을 챙기려 하는지.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은 분명 아군이 승리했지만, 그만큼 희생자도 많았다. 만약 황석태가 중심을 잡고 전략 전술을 짜지 않았다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석태는 죽은 이들은 물론 중상을 입은 이들에게도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부대 소속이 아니기에 더더욱 마음이 쓰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흑도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군.’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체감하는 건 처음이었다.
백도와 흑도, 살아온 환경이 다르지만 결국 사람은 거기서 거기다. 악랄한 인간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사람다운 사람도 있는 것이다.
황석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은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겠소.”
“차나 한잔합시다.”
“……?”
“얼굴만 보자고 불렀겠소? 차 한잔하고 싶어서 불렀소이다. 제자에게 시켰으니 곧 올 거요.”
“나는…….”
“별일 없으면 환자 부탁 거절하지 맙시다.”
가만히 용호진인을 내려다보던 황석태가 어색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용호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
잠시 침묵이 어렸다.
용호진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칙칙했던 분위기가 많이…….”
“조심하셔야겠소.”
“음? 그게 무슨 말이오?”
황석태의 눈이 깊어졌다.
“화검자 노선배가 종남 장문인을 만나고 있소.”
“……?”
“한바탕하는 것 같던데.”
용호진인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