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화. 죽음과 인연 사이 (1)
만부부당(萬夫不當)이란 곧 만 명으로도 대적해 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인지적(萬人之敵)이란 곧 만인, 모든 사람을 대적할 정도로 용맹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이다.
만(萬)은 숫자이기도 하고 ‘모두’를 뜻하기도 한다.
지금 이곳, 사납기 그지없는 적도들은 물론 그 적도들의 공세를 막아 내기 위해 목숨을 건 무사들까지.
그들 모두는 깨달았다. 만부부당, 만인지적이라는 말이 담백하기 그지없는 사실 적시였다는 걸.
하늘이 내린 용맹, 지상에 뿌리내린 온갖 지략을 손에 넣은 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고수가 여기에 있었다.
퍼어어어어어억!
한 번 휘두름에 붉은 늑대들 십여 마리의 몸뚱이가 흩어져 날아갔다.
그리 큰 힘을 실은 것 같지도 않다. 말 그대로 휘둘렀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사나운 늑대들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육편이 되어 스러졌다.
퍼어억! 퍼어어어억!
언뜻 보아도 천하에 다시 없을 중병임이 분명했다.
그 무거운 도끼의 창대가 곡도의 칼날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재질이라 한들, 그 무거운 도끼날을 달아 놓았는데도 부러지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퍼어어억! 콰르릉!
단 네 번의 돌진에 전방 병력 대다수가 날아가고, 마지막 방점을 찍은 한 번의 공격에 대지가 초토화되었다.
사도암으로 이어지는 길 자체가 뚝 끊어져 보일 정도의 폭발력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발경이라는 기술로 가능할 리 없는 초월적인 무력의 등장이었다.
평소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저, 저건 뭐야?!”
인간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는 괴물의 등장.
패율이 씨익 웃으며 기검을 휘둘렀다.
“내 후배다!”
쩌어어어엉!
내리치는 검력에 막강한 힘이 깃들었다.
낭두쌍창으로 막았지만, 그 거센 위력에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화웅문이 나타났을 때도 그랬지만, 특히 연호정의 등장은 패율의 사기를 끝 간 데 없이 북돋고 있었다.
그 사기가, 그 힘찬 군기가 그의 검력을 종전보다 배는 더 강하게 만든 것이다.
쩌저저저저정!
단창과 기검이 절묘하게 휘몰아치는 공격은 파도처럼 거세기만 했다.
평소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러나야 한다!’
후우욱!
저 멀리서 부하들을 박살 내는 사신(死神)의 기운은 패율에겐 힘을 주었고, 제게선 기력을 빼앗아 갔다.
그렇지 않아도 태을무형검의 검력이 내상을 유발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 마지막 일격에 혼이라도 실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진기의 움직임이 무거워졌다.
거기다 말도 안 되는 고수의 출현까지.
평소가 외쳤다.
“전원 산……!”
퍼어어억!
패율의 각법이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픽!
평소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혓바닥을 깨물어 버린 것이다.
“부하들 걱정 말고.”
쩌저저저정!
신들린 듯 창검을 휘두르는 패율의 몸에서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 승부에 목숨을 걸어라!”
쾅!
창과 창이 부딪치며 폭음을 냈다.
‘…….’
패율은 손에 들린 창을 버렸다.
창날이 깨지고 창대가 구부러졌다. 적의 창격이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평소의 안광이 붉은 살기로 물들었다.
“죽일 놈이!”
쩌어어어어어엉!
낭두쌍창을 쳐 내는 기검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역시.’
평소는 능력 있는 장수였지만, 자존심도 엄청 강했다.
상대의 자존심을 긁을수록 과격한 힘을 뽐낸다. 그럼에도 정기신(精氣神)은 흔들리지 않는다. 각고의 노력으로 연마된 진짜 고수인 것이다.
‘하지만.’
파아아악!
자세를 낮추고 돌진하는 패율의 주먹이 평소의 턱을 노렸다.
고개를 틀어 주먹을 피한 평소가 패율의 옆구리로 창을 찔러 넣었다.
훅!
평소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느새 패율이 사라져 버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쾅!
허공에서 내리친 검력이 땅을 부쉈다. 평소 역시 본능적으로 그 공격을 피해 낸 것이다.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검?’
방금의 일격.
창이 손에 없으니, 검을 창처럼 내리쳤다. 끝장을 볼 요량으로 관일공(貫日功)을 펼쳤는데, 그것이 관일검이 아닌 관일창이었던 것이다.
검과 창의 차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구현하는 무공은 병기의 구분을 두지 않았다.
그런 것이다.
검법은 본디 베기보다는 찌르기에 특화된 병기다. 마찬가지로 창 역시 베기보다는 찌르기가 우선이다.
무게와 길이, 손잡이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지고(至高)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맨손으로도 바위를 베고 풀잎을 던져 적을 살상할 수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깊게 고뇌하지 않았던 깨달음.
그 깨달음이,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 중에 패율의 육신으로 빨려 들어왔다.
파바바바박!
한순간 평소의 공격이 엄청나게 사나워졌다.
이제는 내상이든 뭐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도암 측의 공략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인지한 그가 적장 중 하나인 패율이라도 죽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피슉! 피슉!
패율의 육신에 하나둘 창상이 늘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고요했다. 반격도 없이 낭두쌍창을 피해 내는데, 그 움직임이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이놈!”
파아아아아앙!
벼락과도 같은 속도.
평소의 좌창이 패율의 복부를 스치고 지나가고, 우창이 그의 목에 작은 생채기를 냈다. 치명적인 공격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것이다.
하지만 패율의 얼굴에 다급함은 없었다. 응당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두 눈이 고요했다.
평소의 흉안(凶眼)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패율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창들, 신병이기로군.”
쾅!
평소가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훅!
곧장 반격 태세를 갖추던 평소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패율의 손이 꼿꼿하게 펴진 채 그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콰아앙!
손끝에서 폭발한 경력이 평소의 어깨를 부수고 지나갔다.
손으로 펼친 관일창, 아니 관일수(貫日手)다.
맨손으로는 구사할 수 없는 구결이었다. 깨달음 이전에 무공 자체가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패율은 맨손으로 관일공을 구사했다.
‘다르지 않다.’
비틀거리는 평소에게 다가가니, 어느새 낭두쌍창이 그의 요혈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다르지 않아.’
쩌어엉!
패율의 양손이 창을 튕겨 냈다.
단창도 부러트리는 위력인데, 그의 양팔은 생채기가 조금 났을 뿐 아무 이상도 없었다.
‘내 손이, 팔이 곧 창검이다.’
퍼버버벅!
평소의 상체에서 대량의 피가 뿜어졌다.
양팔로 구사하는 점창의 검, 백족검법(白足劍法)이다. 근접전에 있어서 탁월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전투검이었다.
이를 악문 평소가 재차 쌍창을 휘두르려 할 때.
투투퉁!
기이한 호선을 그린 패율의 양손이 평소의 손목을 후려쳤다. 평소는 저도 모르게 창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패율의 양손이 낭두쌍창을 휘어잡았다.
퍼어어어억!
양쪽 옆구리에서부터 위로 찔러 올리는 쌍창.
“우웨엑!”
두 자루 창에 꽂힌 평소의 발이 허공에 들렸다. 토해 내는 붉은 피가 패율의 팔을 물들였다.
패율이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창, 잘 받아 쓰겠다.”
“쿨럭! 너, 너 따위가 감히 내……!”
“전리품이다. 패자는 유구무언인 법. 닥치고 저승으로 가라.”
패율이 낭두쌍창을 뽑았다.
푸화아악!
대량의 선혈을 쏟아 낸 평소가 그대로 쓰러졌다.
“후우우.”
깊게 한숨을 내쉰 패율이 저 멀리 선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패율이 피식 웃으며 종남 검사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괜찮냐?”
초고수들의 격전을 직접 본 그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괜찮으면 움직여라. 여기, 이곳 전장은 마무리되었다.”
검사 하나가 말했다.
“시신을…….”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검사들의 얼굴에 진한 슬픔이 어렸다.
패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신은 이 전투가 마무리된 연후에 수습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의 사형제들이 싸우고 있어. 당장 움직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청목애가 난리일 것이다. 뒤따라갈 테니, 먼저들 가라!”
파아악!
검사들이 청목애를 향해 신법을 펼쳤다.
그들의 등을 보는 패율의 얼굴에 은은한 안타까움이 어렸다.
‘똑같다.’
적이 종남이 아닌 점창을 노렸다면, 자신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남 일 같지 않았다. 애써 힘차게 달리는 검사들 모두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그것이 전쟁인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내 사람이 죽기 전에 죽일 수밖에.
파아악!
연호정에게로 다가간 패율이 화웅문과 혈랑대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대단한데.”
화웅문은 생각보다 더 강했다.
연호정의 일차 공격과 위압감에 적들의 기세가 위축된 상황이라지만, 그걸 감안해도 화웅문의 전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나 선두에서 청룡도를 휘두르는 젊은 고수가 눈에 띄었다.
후퇴 시기를 재는 호패를 정신없이 몰아치는데, 일격, 일격이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한다.
저 정도 공격력이라면 호패의 능력도 무용지물이다. 은밀한 움직임과 날카로운 공격이 특기인데, 그 모든 걸 허물어 버릴 만큼의 압력으로 짓누르니 제 실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아가, 병력을 지휘하며 절묘하게 몰아치고 있는 방천극을 든 청년의 판단력도 상당했다.
“이쪽은 거의 끝났군.”
“예.”
패율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너는 괜찮냐?”
“글쎄요.”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이는 진기가 불안정했다.
수습은 했다지만, 여기까지 달려오며 수많은 적을 격파했다. 회복 속도는 그대로였으나, 무공을 구현할수록 낫고 있던 내상이 다시 심화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무극의 고수가 아니었다면 죽거나 정신을 잃을 상황이었다.
“후우.”
몇 번 숨을 몰아쉰 연호정이 말했다.
“먼저 청목애로 가십시오. 종남 전쟁의 마지막은 거기입니다.”
“알겠다. 한데…….”
패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적장은 잘 다졌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죽을 뻔했습니다.”
“잔인한 새끼.”
패율이 몸을 돌렸다.
“천천히 따라와. 괜히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전후 처리가 힘들어진다.”
파아악!
패율이 한순간 사라졌다.
공력을 그렇게나 소비했는데도, 어쩐지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깨달음이 있었군.’
목숨을 건 승부를 통해 손에 넣은 생사의 깨달음.
패율은 더 강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강해질 것이다.
‘다행이야.’
광룡부를 땅에 박아 넣은 연호정이 진양과 소정광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이제 시작일 것이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앙!
더는 버티지 못했음인가.
혈랑들이 육탄 공격을 감행하고, 호패가 진양이 발하는 도압(刀壓)에서 벗어나 저 멀리 협곡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적장의 도주였다.
진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이 새끼! 이리 안 와? 어디 대장이 쪽팔리게 도망을……!”
그 순간, 연호정의 손이 호패를 향했다.
쾅!
호패가 그대로 엎어졌다. 허공섭물로 그의 다리를 강제로 멈추게 한 것이다.
호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뒤에서, 어느새 달려든 진양이 청룡도를 휘둘렀다.
퍼어억!
깔끔하게 잘린 목.
동시에 혈랑대 마지막 한 명의 목이 소정광의 방천극에 잘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렇게 사도암에서의 전투가 끝이 났다.
“뭐야?”
턱 하니 어깨에 청룡도를 걸친 진양이 연호정에게 다가왔다.
“괜찮수? 낯빛이 시퍼런데?”
“안 괜찮다.”
“그래 뵈네.”
쩍!
연호정이 땅에 박힌 광룡부를 뽑아냈다.
진양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어렸다. 자신도 중병을 다루는 사람이지만, 이 인간의 도끼는 정말 차원이 달랐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열을 정비해라. 마지막 전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