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98화 (698/963)

◈698화. 승패는 없었다 (4)

“으아아악!”

“막아라! 막아!”

“폭약을 조심…… 컥!”

청목애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사도암은 청목애에 비하면 평탄한 전장이었다. 애초에 지형 자체가 그리 험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최우선으로 막아야 하는 방어선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황석태는 청목애에 병력을 더 집중시켰다. 만일 적군의 수가 예상 이하라면 사도암 측으로 병력을 떼어 보낼 생각이었지만, 그가 예측한 대로 사도암보다 청목애를 공략하는 병력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일까.

종남 본산에서의 전투 중 이곳 청목애의 전투가 가장 사납고 치열했다.

황석태의 적룡창이 불을 뿜었다.

쩌저저저정!

섬광과도 같은 창격에, 전면의 혈랑단 전원이 뒤로 튕겨 나갔다.

흑도제일창, 거룡창술(巨龍槍術)의 용미칠섬(龍尾七閃).

거룡창술은 본디 묵직하고 파괴적인 무공이다. 후퇴가 없으니 오직 전진이며, 적이 죽지 않으면 시전자의 활로도 줄어드니 일격에 상대를 죽이거나 물러나게 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격필살(一擊必殺)을 꾀하는 전장의 무공이다. 여타 다른 무공처럼 변화가 많지 않고 올곧으며, 일타, 일타에 전력을 다하니 단연 무지막지한 살기가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석태가 보여 주는 창술은 단순히 파괴적이기만 하지 않았다.

쩌저저저정! 쾅!

넓다.

붉은색 창영(槍影)이 전방위를 아우른다. 몰아치는 혈랑들을 선두에 서서 막아 내는 황석태의 일인 방진은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양옆에서 동권과 용호진인 역시 그들 나름의 활약을 하고 있었지만, 황석태는 그들과도 궤를 달리하는 무용을 뽐냈다.

하지만.

쩌저저정! 퍼어어엉!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일 조장 화한의 분투, 절묘한 순간에 날아오는 이 조장의 화살, 그리고 순간순간 빈틈을 만드는 사 조장의 박투술은 청목애의 방진을 뚫고 지나갔다.

‘안 좋아.’

퍼억!

창대로 혈랑대원 하나의 머리통을 박살 낸 황석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아예 접근 자체를 불허하는 것.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적의 공세가 너무 파격적이었다.

널따란 평야는 아니지만, 차라리 용아철기단을 끌고 왔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것이다. 우선 손발이 잘 맞고, 활용할 수 있는 전술도 많았으며, 결정적으로 익숙하니까.

그러나 지금 그가 지휘하는 이들은 손발을 맞춰 보기는커녕 아예 사상조차 다른 백도 정파의 무림인들이었다.

‘어쩔 수 없다.’

최선의 상황을 잃었다. 그렇다면 이 와중의 최선을 다시 찾아야 한다.

황석태가 버럭 외쳤다.

“검진 전원 이십 장 뒤로 물러나라! 칠, 팔진은 예비 진법과 교체해!”

파아아악!

그나마 다행이라면, 종남 검사들의 움직임이 황석태의 예상보다 빠르고 절도 있다는 것이었다.

경험이 많지 않다지만, 그들은 구파의 일익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흑도 고수의 명을 받고 있지만, 한번 하기로 한 것은 철저하게 따른다.

부드럽게 뒤바뀌는 검진. 최전선에서 극심한 심력 소모를 했던 검사들이 숨을 돌리고, 들끓는 전의와 긴장을 안고 있던 예비 검진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용호진인이 외쳤다.

“뒤로 빠지라니! 앞에서 더 버텨야 하지 않겠는가!”

“의미 없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살 한 대가 날아왔다.

쩌어어어어어엉!

엄청난 공명음이 절벽 전체를 뒤흔들었다.

‘역시.’

화살을 막아 낸 적룡창의 창대에서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저놈이 문제군.’

일 조장 화한은 한발 물러서서 병력을 이끌었고, 사 조장은 올라오는 병력과 발을 맞춰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들의 움직임도 능숙했지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한참 뒤에 서서 화살을 날려 대는 이 조장이었다.

‘무슨 화살이……!’

일반 화살도 아니고, 깃대까지 철로 만든 철전도 아니다.

거기에 눈에 띄게 거대한 활, 시위에 걸린 화살 역시 활만큼이나 크다. 얼핏 보면 거의 단창이라고 오해할 정도의 크기인데, 그 힘과 관통력이 실제 초고수가 휘두르는 창격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종남파 장로의 검력으로도 투로가 바뀌지 않을 만큼의 공격력이다. 정면에서 막아 튕겨 내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화한이 외쳤다.

“공간이 생겼다! 모두 전열을 정비해라!”

파바바바박!

이십여 장이나 물러난 지금, 청목애 절벽 끝에는 혈랑단원들이 올라올 만한 공간이 생겨나 있었다.

순식간에 절벽 위로 검붉은 전포를 입은 마귀들이 들어찼다. 그 속도가 실로 빨랐다. 그 귀신 같은 움직임을 보고 있자면, 그간 저들을 막아 낸 종남의 검진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동권이 외쳤다.

“어쩌자고 저들을……!”

그때였다.

후우욱!

고요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천하 신병인 적룡신창의 아가리로 무시무시한 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화한의 눈이 흔들렸다. 멀리서 화살을 겨누던 이 조장도,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이쪽을 노리던 사 조장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아아아악!

화한과 사 조장이 중앙으로 움직였다.

순간 용호진인의 광풍쾌검과 동권의 성라검법이 둔중하게 두 사람을 밀어 냈다.

쩌저저정! 쾅!

절묘한 시기였다.

두 사람의 초고수가 열어 준 기회, 황석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쾅!

강인한 진각.

화한이 외쳤다.

“이 조장! 막아라!”

부아아아아앙!!

소용돌이치며 쏘아지는 적룡신창은 이제껏 보여 주지 않은 막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전사력이 돋보인다. 혼신의 힘을 다한 발경으로 적을 분쇄하는 거룡창술, 거룡대포(巨龍大砲)의 일격이었다.

황석태의 거룡대포가 전면을 휩쓰는 동시에 이 조장이 시위를 놓았다.

콰르르르릉! 퍼억!

압도적인 파괴력이 혈랑대원 십여 명을 육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서 있던 혈랑대원들 역시 그 힘의 역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심을 잃고 휘말렸다가,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날아간다. 날아간 그들의 육신은 수십 장 길이의 절벽 밑 아가리로 빨려 들어갔다.

“후우욱!”

가벼운 호흡과 함께 황석태가 창을 비껴들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일순간 파괴적인 공력을 쏟아붓느라 상당한 무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역시.’

슬쩍 옆구리를 만지니, 살 한 뭉텅이가 뜯겨 날아가 있었다.

이 조장의 화살이 관통한 흔적이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역시나 완전히 피해 내진 못한 것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내장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상처였다. 초절정고수가 아니라면 그 즉시 무릎을 꿇어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황석태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뿜어져 나오는 투기가 훨씬 더 거세졌다.

“다시 몰아붙여라!”

파아아악!

황석태를 지나친 종남 검사들이, 전열이 흐트러진 혈랑대원들을 향해 사나운 공격을 감행했다.

쩌저저정! 퍼억! 퍼억!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개인의 전력 저하를 감수하고 전세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취했다. 개인이 아닌 집단 전체의 승리를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언제나 선두에 서서 적을 격파하던 흑도의 명장(名將)다운 책임감이었다.

그때였다.

푸화아아악!

거대한 검날이 반월을 그리자, 종남 검사 다섯의 몸뚱이가 사선으로 찢겨 날아갔다.

검진의 힘을 이끌어 한층 공격적인 무공을 구사하는데도 일격을 막지 못한다. 일 조장 화한, 그 무서운 고수가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놈!”

동권 이전에 용호진인이 화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한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쩌정!

두 합이었다.

단 두 합 만에 용호진인의 몸이 튕기듯 뒤로 날아갔다.

두 사람의 무공 격차가 이 정도로 극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호진인은 화산의 무공을 충분히 풀어 낼 만한 공간을 얻지 못했다.

그것을 간파한 화한이 짧고 묵직한 검격을 내쳐 용호진인을 쳐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순히 경지만으로 생사가 갈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런 대규모 전투에선 특히 더하다.

피피피핑!

분노한 이 조장이 네 발의 화살을 쏘아 내고, 그를 등에 업은 일 조장과 사 조장이 무척이나 사납게 돌진해 왔다.

퍼어억! 푸화아아악!

끔찍한 무공이었다.

황석태가 일격으로 혈랑대원들을 박살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용호진인이 한순간의 기습으로 화한을 튕겨 냈던 것처럼.

일 조장 화한과 이 조장 소월, 사 조장 극패의 무공 역시 종남 검사들이 일합도 받아 내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다. 지키는 자로서 철저한 방진과 위치 선정으로 우위를 점했지만, 이 정도 고수들이 작정하고 몰아치니 그들로서도 손쉽게 막아 낼 수가 없다.

황석태가 외쳤다.

“두 장로들은 앞으로 나서시오!”

파아아악!

말하지 않아도 둘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화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폭진(爆進).”

거칠고도 거친 목소리.

절벽 위로 올라온 혈랑대원들의 두 눈이 살기로 물들었다.

동시에 황석태의 얼굴이 굳어졌다.

순간적으로 적들의 기세가 바뀌었다. 사나운 살기는 똑같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 같았다.

“막으시오!”

쩌저저저저정!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동권과 용호진인 역시 혈랑대원들을 막으려 했지만, 그런 둘을 조장들이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 틈을 타서 돌진하는 혈랑대원들.

퍼버버버버벅!

황석태의 창격이 불을 뿜었고, 종남 검사들의 검기가 혈랑대원들의 몸통을 뚫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팔이 날아가도, 복부에 구멍이 뚫려도 돌진한다.

황석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돼!’

혈랑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거룡창을 내치려던 황석태.

쩌어어어엉!

이 조장 소월의 화살은 정확하게 황석태의 심리를 겨냥했다.

무의식적으로 화살을 튕겨 내니, 순간 그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그 틈을 타 혈랑대원들이 좌측 진법을 향해 뛰어들었다.

황석태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위험해!!”

콰아아아아아앙!!

순간 엄청난 폭발과 함께 종남 검진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폭약이다. 혈랑단원 모두가 언제라도 터트릴 수 있는 폭약 하나씩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지독한 놈들이라도 이런 식으로 육탄 돌격을 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도 뚫리지 않는 검진을 목숨을 불태워 박살 내는 과격함, 도무지 같은 세상을 사는 놈들 같지가 않았다.

“크윽!”

그 폭발의 범위에 휩쓸린 황석태의 몸은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누구?’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황석태는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옆으로 튕겨 냈다는 걸.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부드럽게 밀어 내 준 것이다.

‘용호진인? 아니면 동권 장로?’

아니다.

폭발이 일어난 청목애 위, 난장판이 된 전장 속.

검게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다섯 줄기 섬광이 불을 뿜었다.

퍼버버버벅!

또다시 육탄 돌격을 감행하던 혈랑대원 다섯의 머리통이 동시에 날아가 버렸다.

풀썩!

제아무리 자폭할 생각이라지만, 머리통이 사라졌는데도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달려들던 혈랑대원들이 화한과 극패, 용호진인과 동권 사이에서 쓰러져 버렸다.

황석태가 외쳤다.

“피하시오!”

파바바바박!

놀라서 피하는 고수들.

콰아앙! 콰앙!

폭음과 함께 또 한 차례 불길이 쏟아졌다.

이번 폭발은 오히려 혈랑단 측에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바람이 절벽 쪽으로 불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피피피핑!

섬뜩한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날아갔다.

퍼버버버벅!

절벽 위로 올라오던 혈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머리통이 날아가서 쓰러졌다.

소월이 외쳤다.

“조심해라! 모두 뒤……!”

부아아아앙! 콰앙!

짧게 소용돌이치는 철전 하나가 소월이 선 곳을 완전히 분쇄해 버렸다.

본능적으로 신법을 펼쳐 청목애로 올라온 소월.

그의 눈에, 걷힌 연기 속에서 붉은 활을 들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싸늘하게 빛나는 눈동자, 시위를 당기는 자세가 완벽 그 자체였다.

“궁사?!”

묵비의 손가락이 재차 시위를 튕겼다.

타다다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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