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화. 승패는 없었다 (3)
퍼억! 퍼억!
홀로 혈랑대원을 이십여 명 가까이 죽인 패율의 무공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내려오지 않는군.’
평소는 끝까지 초숙을 몰아치고 있었다. 그 사납고 완고한 공격에, 낙하검진과 낙뢰검진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가 자신만의 전장(戰場)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장과 수장 간의 일대일 대결이지만,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역장은 검진을 뒤흔들 정도로 강했다.
물론 네 개 검진 중 하나가 힘을 보탤 수는 있다. 문제는 그러다가 초숙도 죽는다는 것이다.
종남의 전투 검진은 방어에 특출난 기공 검진이지만, 공격 범위는 또 넓다. 그 공격에 휘말리면 초절정고수라도 멀쩡할 수가 없다.
‘기가 막히는군.’
진법의 기운을 읽고 한눈에 그 성질을 꿰뚫어 봤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도 목숨을 걸고 적장에게 붙어 칼부림을 하는 평소의 대담함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문제는.’
쩌어어엉!
혈랑들이 사도암으로 돌진하는 중에도 패율을 공격했다.
작정하고 공격하는 것도 아니요, 지나치는 길에 창검을 휘두른다. 한데 그 기세가 너무 거세서, 초반 성공적인 기습을 감행했던 패율의 공격이 더 이상 제 효율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에 있어 봤자 뭣도 안 되겠군.’
사도암 본진 측으로 날린 단창도 손에 없다. 설령 있더라도 관일공을 쓰기에는 애매했다.
관일공은 내공 소모가 심한 무공,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는 전투에서 남발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절공이었다.
파아아아악!
결단을 내린 패율이 혈랑들의 머리 위로 이동하며 그들보다 더 빠르게 사도암으로 향했다.
쩌저저저정! 쾅! 콰앙!
선두 두 개 진, 낙뢰검진과 낙하검진은 훌륭한 방진이었다.
사나운 혈랑단의 첨병을 철저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굳이 초숙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진을 이끄는 검사가 있어, 적도들의 공격에 순간순간 잘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이런 식이라면.’
파악! 파악!
자신들의 어깨를 밟아 가며 이동하는 패율을, 혈랑들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정면 승부라면 진형을 갖추고 숫자로 밀어붙여 보겠지만, 이런 식의 이동이라면 몇 수 위의 고수를 잡을 방도가 없다. 심지어 패율은 이룬 경지에 비해 신법 경지가 유독 특출났다.
파아아아앙!
사도암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는 패율.
그의 눈에 진법의 축이 되는 종남의 검사들이 보였다.
‘좋아. 저 녀석들의 의도를 읽어 가면서 정면 공격을 막아 내면…….’
그때였다.
찰나의 순간, 패율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놈?!’
평소는 이 부대를 이끄는 자다.
그런 그가 사도암 본진 책임자인 초숙을 상대하러 갔다.
그럼 혈랑단은 어떻게 하는가? 움직임을 보니 굳이 대장이 없어도 될 것 같지만, 이 살벌한 전쟁에서 책임자가 홀로 적장을 죽이겠다고 움직이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설마!!’
화아아아악!
무섭게 증폭되는 기감.
움직임은 느려졌으되 감각은 훨씬 더 예민하게 일어났다.
‘……!!’
패율의 예측은 정확했다.
사도암 본진을 뒤흔드는 혈랑단 선두, 단원들과 똑같은 복색을 한 누군가가 손을 쳐들고 있었다. 그 손에는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비도 다섯 개가 들려 있었다.
패율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안 돼!”
피이이이잉! 퍼버버버벅!
낙하검진의 검사들 세 명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절정고수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 속도와 날카로움, 무형의 진력을 뚫을 정도의 가공할 발경은 분명 초절정고수의 그것이었다.
파아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돌파한 패율이 그 은밀한 고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놀랍게도 그 고수 주변의 혈랑들이 길쭉한 창을 휘둘러 패율의 공격을 무마시켰다.
하나하나가 목숨을 담아 내친 일격이었다. 자신의 안위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 공격, 실제로 패율의 검력을 분산한 대원 하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퍼버벅!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쓰러진 전우를 주저 없이 밟아 가며 돌진한다. 빠르게 움직이는 다리들 사이, 피범벅이 되어 버린 적의 모습이 보였다.
‘미친!’
터어엉!
혈랑들의 독함도 대단했지만, 패율의 움직임 역시 그에 못지않게 대단했다.
마치 허공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는 것 같다. 체공 시간이 굉장했다.
패율의 눈이 다시 한번 그 은밀한 고수를 바라보았다.
‘……?!’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원들과 함께 움직였던 그 고수가 사라졌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해 순간적으로 기감을 줄였더랬다. 그 잠깐 새에 사라진 것이다.
‘어디?!’
순간 패율은 목덜미가 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쩌어어어엉!
허공에서 몸을 회전해 검을 휘두르니, 그 소검에 맞은 비도 두 자루가 튕겨 날아갔다.
‘강하다.’
검을 쥔 손에 진동이 남았다.
가벼운 비도에 이 정도 힘을 실을 수준이라면 정말 제대로 된 고수라 할 수 있었다. 그만한 힘을 이렇게나 은밀하게 감출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아.’
나무 위로 올라선 패율의 눈이 그 고수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어느새 대열 중앙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다. 그 은밀함만큼이나 감탄이 나오는 움직임이었다.
‘별수 없다.’
패율은 또 한 번 결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어. 이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패율이 크게 소리치며 검을 치켜들었다.
“모름지기!”
훅! 콰앙!
천근추의 수법으로 움직이는 대열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패율.
그 호쾌함은 단순하기에 오히려 화려했다. 사도암을 향해 몰아치는 혈랑단의 대열 중간이 뚝 끊어질 정도로 압도적인 진각이었다.
“싸움이란!”
번쩍! 번쩍!
회풍검이 회광검(廻光劍)이 되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빛살처럼 움직이며, 그의 주변에서 달려 나가는 혈랑대원 셋의 몸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그중 하나가 육 척 장창을 들고 있었다. 패율의 검이 재차 허공을 갈랐다.
서걱!
반쪽이 된 장창, 삼 척 단창이 된 병기가 패율의 오른손에 잡혔다.
“목숨을 걸어야 흥이 나는 법!”
화아아악!
혈랑대원들이 좌우로 찢어지며 패율을 피해 돌진했다.
눈앞의 적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명령받은 대로만 움직이겠다는 뜻이었다. 가다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세, 그 맹목적인 움직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섬뜩함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패율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대규모 전투는 그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깨닫는 게 늦었고, 죽지 않아도 되었을 종남 검사 셋의 목숨이 날아갔다.
이제는 안 된다.
우우우우웅!
장기전을 상정하고 내력을 아끼던 패율.
자세를 낮추고 모든 내공을 개방하니, 일순 무시무시한 투기(鬪氣)가 번져 나왔다.
화아아악!
압도적인 기세에 좌우로 찢어진 혈랑들조차 움찔했다.
패율이 버럭 외쳤다.
“다 죽이는 꼴 보기 싫으면 튀어나와!”
쾅!
그가 강인한 진각과 함께 창을 휘둘렀다.
빛살처럼 휘둘러진 창, 쏘아져 나간 발경이 회전하며 공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퍼버버버버벅!
보이지 않는 창격에 맞은 혈랑대원 다섯의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창을 내친 자세 그대로 몸을 회전하여 검을 휘두르는데, 그 검격에 개방한 내공을 그대로 담아냈다.
촤악! 촤악!
순식간에 혈랑대원 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아무리 돌진이 중요하다 한들, 이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후우욱.
패율의 입가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두 눈은 살기로 빛나고,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투기는 만인을 압도한다.
그야말로 귀신, 투귀(鬪鬼)가 따로 없다.
아군의 안전과 전쟁의 흐름도 생각해야 하지만, 동시에 패율은 언제나 이런 싸움을 원했다.
누가 더 인내심이 좋은가, 누가 더 효율적으로 싸우는가.
누가 더 지혜롭게 대처하는가, 누가 더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가.
그리고 누가 더 강한가.
번쩍!
혈랑들을 공격하는 패율, 그의 머리통을 향해 휘어져 내려오는 비도의 움직임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했다.
패율의 몸이 회전했다.
쩌어어엉!
절묘하게 비도를 피한 그가 검신을 휘둘러 비도를 되받아 쳤다.
퍼억!
혈랑단원 하나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미간을 정확하게 뚫은 비도, 즉사였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이미 패율의 창은 또 다른 혈랑대원 하나의 가슴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와라.’
푸화아악!
패율이 적의 피를 뒤집어썼다.
굳이 피하지 않는다. 피가 튀기든 살점이 날아가든, 또 다른 먹잇감을 노리는 그의 눈빛은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어서 와!’
퍼억!
검병 끝으로 혈랑대원의 정수리를 찍었다. 두개골이 뚫린 대원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가 패율을 향해 장도(長刀)를 휘둘렀다.
쩌어어엉!
도검이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충돌음을 일으켰다.
“너로구나!”
소검으로 장도를 쳐 낸 패율이 곧장 단창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적장이 우측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패율의 눈이 빛났다.
쩌어어어어엉!
관일창, 그리고 발검.
방금보다 두 배는 더 강력한 충격파가 터졌다. 패율과 적장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났다.
패율이 적장의 무기를 훑어보았다.
‘도검(刀劍)?!’
신기하다.
쌍검을 쓰는 자도 있고, 쌍도를 쓰는 자도 있다.
하지만 외날의 도와 양날의 검을 동시에 쓰는 자는 전 중원을 뒤져도 찾아보기 힘들다. 패율 역시 하려고 하면 못할 건 없었지만, 굳이 도검을 동시에 다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적장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패율이 창과 검을 동시에 쓰는 것처럼, 적장 역시 도와 검을 동시에 쓰는 것이 더 강력한 듯했다.
도검을 든 적장, 혈랑단의 예비 조장 호패가 살심이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놈을 죽여라.”
좌우로 흩어져 달려가던 혈랑들이 그 순간 멈춰 서서 패율을 노려보았다. 명에 따라 패율부터 죽여 놓고 가겠다는 것이다.
섬뜩한 광경이지만, 패율은 오히려 허연 미소를 띠었다.
단 한 명의 고수가 전투 부대 하나의 움직임을 중간부터 봉쇄한다.
무림인의 싸움에서 고수의 존재란 그런 것이다. 천하 정점이라 하기에는 손색이 있지만, 패율 역시 태산의 정상을 노리는 초절정고수다. 작정하고 힘을 뽑아내는 패율의 존재는 적에게 있어 충분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얼마든지 와라!”
파바바박!
혈랑들이 원형을 그리며 패율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패율의 몸이 벼락처럼 솟구쳤다.
쩌어어어엉!
허공을 날아 은밀하게 앞서가려던 호패를 단창 한 자루로 튕겨 내 버리는 패율이다.
발 디딜 곳이라고는 없는 공간, 그럼에도 패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파아아아악!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죽일 것처럼 달려들던 패율이 한순간 사도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호패의 눈이 붉어졌다.
“사살하라!”
피피피피핑!
혈랑들이 제각기 비수와 암기를 던졌다.
파박!
땅을 박차 몸을 세운 패율의 몸이 절묘하게 회전했다.
순간 호패의 눈이 흔들렸다.
‘노렸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비수와 암기들이 단창과 기검의 움직임을 따라 원을 그렸다. 마치 무당의 태극검을 보는 듯했다.
점창의 회풍검, 거기에 연호정과 함께하며 스스로 깨우친 태극권의 이치를 실었다. 승현진인의 깨달음은 연호정에게 이어졌지만, 연호정과 함께한 고수들 모두가 그 깨달음의 편린 하나씩을 가져갔다.
천재다.
언제나 무공을 궁구하고, 어찌해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뇌한 천재 고수의 실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패율의 창검이 그대로 호패와 혈랑들을 향했다.
창검을 따라 회전하던 비수와 암기들까지도.
호패가 소리쳤다.
“피해라!”
퍼버버버버버벅!
끔찍한 파육음을 뒤로 한 패율이 단숨에 호패를 향해 돌진했다.
피의 전장을 만든 패율, 더 이상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된 호패.
이제야 두 초고수가 정면 승부를 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