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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96화 (696/963)

◈696화. 승패는 없었다 (2)

진양이 힐끔 뒤를 바라보았다.

하복과 싸우는 사이, 혈랑단원 셋이 아이들에게 따라붙었다.

마음이 급했지만, 일단은 믿고 내버려 두었다. 아이들과 학도사를 호위하는 개방 거지들이 많았다. 하물며 장봉을 든 거지 몇 명이 그 뒤를 쫓기까지 했다.

수십이라면 모를까, 셋 정도면 충분히 제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눈앞의 괴물인데.

‘안 좋아.’

이전에도 본격적이었지만, 지금은 또 달랐다.

못해도 십 합 내에 결단을 볼 요량인 것 같았다. 극단적인 내공 소모를 감수하더라도 자신과 후개를 쳐 죽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진양의 이마에 식은땀이 어렸다.

‘피하기도 어렵겠어.’

도우러 오긴 했지만, 괜한 일에 목숨을 거는 건 사양이었다. 차라리 뒤로 빠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의 생각을 읽었을까?

가득상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될 거다.”

“……?”

“빠지는 순간 놈의 검기공(劍氣功)이 너부터 노릴 거야. 도주의 순간이 곧 죽음의 순간이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진양이 투덜거렸다.

“협의의 화신이라는 개방의 작은 주인께서 미천한 무림인의 생각을 잘도 읽으셨네.”

“눈 돌리지 마. 까딱하면 죽는다. 너 죽으면 나도 위험해. 목숨 걸고 대항할 생각만 해.”

“죽고 사는 거 이전에, 부딪치면 애들이 위험해.”

가득상의 눈에 이채가 번득였다.

투덜거리듯 말하고 있지만, 아이들을 걱정하는 그 마음은 진심인 것 같았다.

‘묘한 놈이네.’

개방 후계자보다도 강한 무공, 저잣거리 파락호 같은 말투,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을 우선시하는 기질.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을 걱정한다. 그 마음에 진심이 느껴지기에 오히려 당황스럽다.

뭐 하나 일관적인 게 없는 녀석이 아닌가. 숱한 사람을 봐 온 가득상으로서도 보기 드문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가 되었든.’

가득상의 목덜미에도 땀이 가득했다.

‘이놈 말이 틀리진 않아.’

하복이 작정하고 자신들을 몰아붙이면, 틈을 노린 혈랑들이 즉시 통과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자신이나 이놈은 저 늑대들의 이동을 제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하복이 그것을 내버려 둘 리 없다.

‘어쩌지.’

그때, 하복이 말했다.

“그거 괜찮군.”

가득상과 진양이 움찔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시시각각 진해지는 붉은 혈도(血刀)를 들어 올리며, 하복이 말했다.

“혈랑들은 준비해라. 저놈들에게 일격을 먹이는 순간, 곧바로 통과토록 해.”

가득상이 비난 어린 눈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진양이 투덜거렸다.

“뭐, 인마.”

“너 때문에 저것들이 좋은 방법을 찾은 것 같은데.”

“쟤들이 멍청한 걸 왜 나한테 지랄이야.”

한숨이 절로 나온다.

“너 앞으로…….”

그때, 진양이 움직였다.

“조심!”

파아앙!

하복의 칼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휘둘러진 순간,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도광이 두 사람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였다. 기겁한 가득상이 천화봉과 백결신권을 펼쳤고, 진양의 청룡도에는 불꽃이 치솟았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가득상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일격이었다. 제대로 막은 건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의 충격파였다.

‘이!’

파바바박!

바닥을 뒹구는 사이, 머리 위로 붉은 늑대들이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가득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장선단!!”

쩌어어어어엉!

화염을 담은 청룡도가 하복의 만도와 부딪쳤다.

진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복이 귀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칼질깨나 하는구나!”

거대한 청룡도의 칼날과 부딪친 만도가 일순 부드럽게 움직였다.

촤아아악!

칼날을 타고 넘어간 만도가 진양의 가슴팍에 깊은 도상을 만들었다.

진양이 이를 악물었다.

끔찍한 통증이 올라왔다. 깔끔하게 자르는 게 아니라 살점을 찢어 내며 베는 종류의 칼이다. 회복 이전에, 고통 때문에 눈앞이 다 아찔해질 정도였다.

쿵!

진각과 함께 청룡도의 창대에 힘을 실었다.

투웅!

가볍게 밀려난 하복이 일순 엄청난 탄력으로 거리를 좁혔다.

쩌저저정! 퍼억! 퍼억!

잔인한 공격이었다.

수십 줄기의 도광을 막았지만, 차마 막지 못한 참격이 진양의 복부를 세 번이나 베고 지나갔다.

가득상의 눈이 커졌다.

“야!!”

그때였다.

빠각!

하복의 눈이 흔들렸다. 어느새 진양의 정강이가 그의 좌측 대퇴부를 갈겨 버린 것이다.

애써 내공으로 봉해 두었던 파열된 근육이 다시 찢어지며 무지막지한 통증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하복을 향해 진양이 청룡도를 내리쳤다.

쩌어어엉!

특유의 천생신력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단순한 태산압정의 초식이었지만, 그 완력이 너무 강해서 정말 태산의 일격을 가한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물러나는 하복, 좌측 다리가 제 역할을 못 해서 중심을 잡을 수가 없다.

파아아앙!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가득상이 내친 격공장이 하복을 향해 날아갔다.

당황했지만, 역시 고수는 고수였다. 비틀린 자세로 기어이 낭표장을 구사해 가득상의 격공장을 쳐 내려 한다.

그때였다.

하복의 가슴팍을 노리던 격공장이 기이하게 휘어지더니, 그의 우측 무릎으로 스며들었다.

방향 전환이 자유자재인 취선장(醉仙掌)이었다. 위력은 낮지만, 개방 특유의 자유분방한 투로가 돋보이는 절정의 기공술이었다.

쾅!

“크윽!”

바닥을 나뒹군 하복이 재빨리 몸을 세웠다.

하지만 자세가 불안정했다. 안 그래도 상처 입은 좌측 대퇴부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 취선장의 경력에 당한 우측 다리도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아아아악!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끝장을 볼 생각으로 접근한 진양이 하복의 가슴팍을 향해 청룡도를 밀어 넣었다.

쩌어어엉!

하단의 힘이 받쳐 주지 못해도 휘두르는 만도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튕겨 나가는 청룡도. 하복의 자세가 더 불안정해졌다.

부우우우웅!!

하복의 얼굴에 급박한 기색이 어렸다.

흐트러진 자세, 그 박자를 노린 거대한 장력이 무서운 속도로 쏘아지고 있었다.

개방 비기 강룡십팔장이었다.

“이……!”

콰아앙!

폭음과 함께 하복이 훨훨 날아갔다.

“우웨엑!”

가득상이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취선장부터 강룡십팔장까지, 내상 입은 몸으로 무리한 공력 운용을 한 탓에 속이 뒤집힌 것이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진양이 걱정이었다.

“너……!”

쩌저저저정!

튕겨 나간 하복 앞으로 돌진하는 혈랑들.

그 늑대들을 막는 진양의 무공은 든든함 그 자체였다. 중병 중의 중병인 청룡언월도를 신들린 듯 휘두르며 적들을 격파해 내는데,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는 적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전설의 관제(關帝)가 강림한 것 같았다.

가득상의 눈이 흔들렸다.

‘저 자식 괜찮나?!’

적장의 칼날에 복부를 베였다. 그것도 세 번이나!

치명상에 준하는 상처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저런 움직임을 보이다니?

그때, 가득상의 눈이 찢어진 진양의 의복 속을 훑었다.

피가 철철 나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어야 할 의복 속에 은빛 비늘이 번뜩이고 있었다.

가득상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갑옷?!’

얇지만 분명 갑옷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복부에 초고수의 칼도 막아 낼 신비로운 복대를 두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런 음흉한……!’

소림 방장급 고수가 휘두르는 칼날을 막을 정도면 천하에 다시 없을 기물이 분명하다.

그런 복대를 두르고도 도망칠 궁리를 했다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으아압!”

번쩍!

사선으로 기운 십자(十字) 참격을 발한 청룡도에, 혈랑 여섯 명의 몸이 갈가리 찢겨 날아갔다.

“훅! 훅!”

진양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주르륵.

코와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꽤 심각한 내상의 징후였다. 가슴팍의 상처도 그렇고, 막았다지만 만도의 충격이 내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멀쩡할 리가 없었다.

진양이 소리쳤다.

“쉬었으면 교대 좀 하자! 죽겄다!”

가득상이 투덜거렸다.

“쉬기는 개뿔! 뒤지기 직전이다!”

“목소리 쌩쌩하구만! 얼른 앞으로……!”

화르르륵!

“……아, X 됐네.”

주춤거리는 혈랑들 뒤.

강룡장에 직격당해 날아간 하복이 다시금 불같은 기세를 일으키며 일어나고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한 기도였다.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파의 사나움은 더 강해졌다.

“진짜 징글징글하다. 뭐 저렇게 지독해?”

진양이 질린 듯 중얼거렸다.

가득상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애초에 우리 둘로 막아 낼 만한 강자가 아니야. 묵 부장이 다리 하나 작살내 놓지 않았으면 진즉 당했을 거다.”

“묵 부장은 또 누구야?”

“알 거 없어.”

“아오! 그러니까 시발, 제대로 작살을 내 놨어야지! 기세는 그럴듯하더니만 순 맹탕 무공 아녀?!”

가득상은 울컥했다.

“강룡십팔장은 무적이야, 개새꺄! 내가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

“지랄하네. 그래서 어쩔 거야! 저 귀신 같은 놈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서로에게 화가 나서 악을 질러 대고 있지만, 제삼자가 보면 묘하게 합이 맞는 조합이랄까.

둘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독한 혈랑들조차 순간 얼이 빠져 지켜볼 정도니 확실히 기괴한 관계였다.

그때였다.

퍼어어억!

혈랑 하나의 목이 날아갔다.

놀란 두 사람이 하복을 바라보았다.

혈랑들이 서둘러 좌우로 물러났다. 길이 그렇게나 좁은데도 어떻게든 길을 만들었다.

화아아아아악!

휘몰아치는 붉은 광기가 두 사람의 육신을 압박했다.

거슬린다고 부하의 목까지 날려 버리며 천천히 걸어온다. 비틀거리고 있지만, 그 위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진양이 침을 삼켰다.

가득상이 이를 갈았다.

“진짜 죽겠군.”

하복이 버럭 외쳤다.

“죽인다!”

살벌한 외침이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칼에 맞은 것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한 기세에 두 사람의 몸이 휘청거렸다.

“너희 둘만큼은 반드시 내가 죽인다!!”

진양과 가득상의 얼굴에 극도의 긴장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이곳, 이 전장에서 죽을 목숨들은 아니라는 듯 하늘은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적을 내려 주었다.

콰릉!

피와 살점이 날아갔다.

당황하여 흩어지는 매화검수 사이, 새하얀 바람과 시뻘건 화염을 휘두르고 나타난 누군가가 보기에도 끔찍한 거대한 무언가를 휘두르며 돌진했다.

하복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했다.

“또 어떤 새끼가……!”

퍼어엉!!

무시무시한 충격파와 함께 하복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진동의 폭발이다. 비틀거리던 하복이 몸을 돌려 만도를 세웠다.

그 순간, 하복은 볼 수 있었다.

그림자처럼 시커먼 몸뚱이, 불타오르는 두 눈으로 자신을 굽어보는 괴수를.

발산하는 기도는 자신보다 불안정했지만, 사방을 뒤덮는 존재감은 일찍이 본 적 없는 위엄으로 가득했다. 단 한 명의 등장일 뿐인데도 십만 대군이 돌진하는 것 같은 압박감을 자아낸다.

하복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칼을 휘둘러야 하는데도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몸이 굳어 버렸다.

거대한 도끼가 달빛을 갈랐다.

쾅!

하복의 몸이 좌우로 갈라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다가오면서도 시커먼 거병을 화려하게 휘두르는 괴수의 양옆으로, 수많은 혈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산화했다.

쾅! 콰르릉! 콰쾅!

순식간에 파괴의 현장이 되어 버린 전선이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가고, 좁게 뻗은 길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린 무신(武神)이 두 사람 앞에 내려섰다.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무신.

자신보다 키가 작은데도 한참을 올려다보는 듯하다.

말 그대로 태산이었다. 태산처럼 크고 무거운 기세가 진양의 육신을 무자비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당신은……?”

무신의 위엄 속, 인간의 감정이 비쳐 든다.

놀라움으로 가득한 표정, 피범벅이 된 연호정은 지금 이 순간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의 실이 존재함을 느꼈다.

“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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