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3화. 흐름을 바꾸는 자 (4)
“휘유, 벌써 난리가 났구만.”
“그러게요.”
“저기가 종남 본산이지?”
“맞아요.”
“불꽃놀이라도 하나? 폭죽 터지는 소리 요란한데.”
“폭죽이 아니라 화약인데요.”
“알아, 새꺄.”
“근데 이렇게 여유 부려도 돼요? 개방 늙은이가 알면 꽤 머리 아플 텐데요.”
“웃기고 있네. 언제는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더니만.”
“별거라는 걸 문주님이 알려 주셨잖습니까.”
“급하게 움직였다가 싸우기도 전에 지쳐 버리면 어쩌겠냐? 우리 아니어도 싸울 놈들 많다더만. 우리는 체력 보존하면서 가는 거야.”
“높으신 뜻을 몰라뵈었네요.”
“비꼬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부터는 속도를 내야 하지 않나 싶은데요. 상황이 꽤 어지러운 것 같아요.”
“말 돌리긴.”
“진지합니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종남산이 초토화될 것 같아요.”
“어떻게 알아, 그걸. 이 멀리서.”
“군기(軍氣)의 색이 다르잖아요.”
“잉?”
“종남 말코들의 군기가 밀리고 있어요. 사납고 무도하고 잔혹한 붉은색 군기가 점점 밀어붙이고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냐? 난 모르겠는데.”
“관심이 없으니까 모르는 거겠죠.”
“내가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넌 진짜 신기하네. 무공도 변변찮은 놈이 그런 게 다 읽혀?”
“평생 싸움터를 전전하다 보면 알아서 생기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누가 변변찮대요? 문주님한테나 못 당하는 거지, 저도 칼질 좀 해요.”
“잘나셨네.”
“군신(君臣)의 대화가 즐겁습니다만,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았어, 인마! 가자, 가!”
“예엡!”
“이 새끼, 혼자만 신났네. 싸움이 그렇게 좋냐?”
“그냥 돌아갈까요?”
“알았다고! 간다고! 빌어먹을, 아주 지가 문주…… 응?”
“돌아가죠.”
“그게 아냐.”
“그럼요?”
“본산의 군기 어쩌고 하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는 것 같다.”
“어디요?”
“너는 애들 데리고 먼저 본산으로 가라. 쓸데없이 개죽음당하지 않게 지휘 잘해.”
“문주님은요?”
“꼬맹이들 구하러 간다.”
“꼬맹이들이라뇨? 어? 무, 문주님? 문주님!!”
* * *
쩌저저저정!
가득상의 옥룡곤이 혈랑들의 사지를 부러트렸다.
“카아악!”
쓰러진 혈랑 중 일부가 무언가를 뱉어 냈다.
피이이이잉! 팍!
옥룡곤을 휘둘러 날아온 무언가를 박살 낸 가득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가지가지들 한다!”
혈랑들이 입에서 쏘아 낸 것, 바로 암기였다.
언제부터 주둥이에 물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간 진절머리 나는 놈들이었다. 사지가 부러지는 충격은 고수라도 참기 힘든데, 끝까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공격을 감행한다.
‘안 되겠군.’
내력 소모가 적다는 장점 때문에 옥룡곤을 휘둘렀지만, 이제는 슬슬 승부를 내야 할 순간이라는 걸 깨닫는다.
허리춤에 옥룡곤을 찔러 넣은 가득상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퍼억! 퍼억!
개방을 대표하는 강권(强拳), 파옥권의 경력이 혈랑 둘의 머리통을 그대로 부숴 버렸다.
살계를 연 가득상, 개방 비기를 아낌없이 꺼내 드는 그의 무공은 전투를 치를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뛰어난 두뇌와 드높은 협심에 가려진 무(武)의 재능이다. 땅을 울리는 진각은 갈수록 깊은 울림을 자아내고, 내치는 권격과 장법은 최대치의 위력을 시시각각 갱신하고 있었다.
퍼억! 퍼억!
가득상뿐만이 아니었다.
후개의 강력한 무공에 자극받은 장선단의 봉술 역시 들개의 이빨처럼 사나웠다.
영역을 넘어서려는 혈랑들을 모조리 쳐 낸다. 혈랑들의 창검 아래 사상자도 나왔지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혈랑들을 막았다.
덕분일까?
도동과 학도사들을 호위하는 십보단은 어느새 수십 장 거리를 벌렸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라 다소 더뎠지만, 산길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혈랑들은 지독했다. 수십 장이 아니라 수십 리가 떨어져 있어도 기어이 찾아가 창칼을 휘두를 놈들이었다.
게다가.
‘아직 많아.’
저 멀리 매화검수들을 에워싼 혈랑들의 숫자는 아직도 이백이 넘었다.
반면 매화검수의 숫자는 백 이하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거기에 대장으로 보이는 적장은 용국진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정도 피해를 봤으면 퇴각해야 정상 아니냐고!’
상황을 보면 전력을 수습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뒤, 재차 싸움을 벌이는 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데,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지독한 놈들은 처음이었다.
‘버티자.’
호흡이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끝까지 버티면 돼! 저놈들은 이성을 잃었어!’
그때였다.
퍼억!
“장로님!!”
매화검수들의 외침에 강렬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가득상의 눈이 흔들렸다.
어둠을 뚫고 전장을 바라보는 가득상의 눈.
매화검수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과격해졌다. 반면 혈랑들의 도검은 냉철해졌다.
‘당했구나!’
적장의 기세는 그대로인데, 그에 맞선 용국진인의 기파는 확 줄어들며 불안정해졌다.
당한 것이다. 적장에게.
가득상이 이를 악물었다.
‘미안하오!’
대 화산파의 장로.
그 이름값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도우러 가야 마땅했다.
하지만 가득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장선단 일부를 떼어 보낼 수도 없었다. 전력의 공백이 생기면 적이 이쪽 병력을 뚫고 아이들에게 마수를 뻗칠 테니까.
‘아니, 지금 저길 걱정할 때가 아니야.’
줄어든 매화검수의 숫자. 그리고 남은 적의 숫자.
나아가 용국진인의 패배.
‘설마 이곳으로……!’
가득상의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퍼어어어엉!
폭음과 함께 매화검수 대여섯 명이 허공을 날았다.
파아악!
땅을 박차는 소리가 묘하게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빨랐다. 허공을 날아 단숨에 길목으로 내려선 하복의 눈은 달아오른 살기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
가득상의 자세가 낮아졌다.
‘강하다!’
멀리서 기세를 느꼈을 때도 놀라웠지만, 이렇게 마주하니 상대의 대단함이 뼛속까지 전해져 왔다.
“개방의 거지새끼들!”
하복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살벌했다.
“대륙 천지 어디에나 기웃거린다더니, 정말 귀찮은 놈들이로구나!”
파아아아악!
혈랑들을 제치고 돌진하는 하복.
가득상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쩌어어어엉!
하복의 칼날을 쳐 낸 가득상의 주먹이 피로 물들었다.
‘이런!’
엄청나게 강한 놈이었다.
칼날을 쳐 냄과 동시에 충격파를 이기지 못해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다리 하나를 제대로 못 쓰는 것 같은데도 이 정도 폭발력이 나온다.
그야말로 수준이 다른 고수였다. 같은 초절정이라지만, 그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복이 버럭 외쳤다.
“이놈들은 내가 다 죽이겠다! 너희는 애들을 죽여라!”
파아아악!
혈랑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가득상이 외쳤다.
“막아라!”
“어딜!”
번쩍!
두 줄기 시뻘건 도광이 번뜩인다 싶더니, 좌우로 펼쳐졌던 장선단의 무인들 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가득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도기. 그 속도와 예리함이 무시무시했다.
‘빌어먹을!’
취팔선보로 접근한 가득상이 강룡신공의 힘을 끌어 올렸다.
내공 소모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쌍장 위로 환상과 같은 용문(龍紋)이 일었다.
하복의 표정이 돌변했다.
콰르릉!
폭음과 함께 하복의 몸이 주춤거렸다.
“우웨엑!”
가득상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강룡십팔장을 터트렸지만, 늑대의 이빨과 같은 도격은 엄청난 반탄력을 갖고 있었다. 하복의 돌진은 막았지만, 가득상 역시 내상을 입어 버린 것이다.
‘엄청나구나! 엄청나게 강해!’
장법으로는 천하제일을 논하는 강룡십팔장으로도 상대를 날려 버리지 못했다.
그 충격이 상당했다. 아직 극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무적의 명성을 자랑하는 강룡장이다. 내상도 내상이지만, 심리적인 충격도 컸다.
“제법이군.”
하복이 만도를 치켜들었다.
“거지에게는 아까운 무공이다. 훗날 본교가 대륙을 정벌하고 나면, 그 무공도 강탈해 주마.”
“시끄러워, 이 개새끼야!”
타아앙!
가득상이 옥룡곤을 뽑아 들었다.
강룡십팔장이 통하지 않는 이상 맨손으로 싸우는 건 자살 행위다. 하복의 칼날은 강철의 강도를 자랑하는 강룡진기를 뚫을 정도로 매서웠다.
“타구봉법을 보여 주마. 개 잡을 때 쓰는 무공이지. 너희에게 쓰기 딱이다!”
쩌어어엉!
가득상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하복이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쫓아라!”
파아아악!
가득상을 지나친 혈랑들이 장선단과 부딪쳤다.
콰앙! 퍼버벅!
살벌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사상자가 났다.
‘안 돼.’
가득상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절대로 보낼 수 없다!’
파악!
그의 의지와는 달리, 기어이 붉은 늑대 몇 마리가 장선단의 방어를 뚫고 달려 나갔다.
가득상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안 돼!!”
그때였다.
“웬 놈이냐!”
하복의 외침에는 극도의 분노와 짜증이 한가득 서려 있었다.
“또 어떤 놈이 우리를 방해하느냔 말이야!!”
이게 무슨 소리지?
가득상이 의아한 눈으로 하복을 볼 때였다.
퍼어어억!
살벌한 파육음과 함께 장선단의 방어를 뚫은 혈랑들 전원의 목이 날아갔다.
가득상의 눈이 흔들렸다.
‘뭐지?’
화아아아악!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거대한 기세.
그 기세를 발하는 자의 무력은 굉장했다. 자신과 비슷, 아니 자신보다도 한 수 위인 것 같다. 뿜어져 나오는 화염 같은 기세가 일품이었다.
“이놈!”
누군가를 노려보던 하복은 곧장 가득상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가득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만도가 어느새 정수리까지 다가왔다.
‘사부님!’
쩌어어어어엉! 사악!
투로가 흐트러진 만도가 가득상의 어깨를 베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와서 하복의 칼질을 방해한 것이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하복의 상체가 다 흔들릴 정도였다.
베인 어깨를 손으로 감싸 쥔 가득상이 재빨리 일어났다.
“거지!”
낯선 목소리에 압도적인 생명력이 가득했다.
불꽃이 담긴 듯한 목소리, 듣기만 해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듯하다.
“뒤로 빠져서 호흡을 골라! 나 혼자서는 안 돼!”
쉬이이잉! 툭!
하복의 칼을 튕겨 냈던 무언가가 가득상 옆에 꽂혔다.
가득상의 눈이 커졌다.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그때, 한 줄기 불길이 언월도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언월도가 사라졌다.
쩌어어어엉!
압도적인 힘이었다.
내공이고 경지고를 떠나, 완력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청룡도를 쥐고 휘두르는 사내의 몸뚱이는 실로 거대했다. 거의 칠 척에 달하는 키, 널찍한 들판은 대륙의 땅덩어리를 보는 듯하다.
“으압!”
쩌어엉!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복이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사내의 도력(刀力)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가득상이 놀라서 물었다.
“누, 누구요?!”
“지금 그런 걸 물을 때냐! 일어서, 새꺄! 혼자선 저 개새끼 못 담근다니까!”
입이 꽤 거친데?
가득상은 홀린 듯 일어나 사내의 옆에 섰다.
놀랍게도 아직 청년의 모습을 간직한 얼굴이었다. 많이 잡아도 서른 언저리쯤 되어 보인다. 가득상보다도 어린데, 그 무력은 개방 후개 이상인 것이다.
가득상이 외쳤다.
“댁은 누구냐고!”
“통성명은 저 새끼 족치고 난 다음에 해!”
“당장 말해! 적인지 아군인지 알아야 할 거 아냐!”
“이 병신 같은 새꺄! 같이 싸우는 거 보면 몰라? 당연히 아군이겠지!”
“마지막으로 묻는다! 누구냐!!”
“하여튼 거지새끼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쉬이이익!
청룡도를 비껴든 사내가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화웅문(火熊門)의 문주 진양(秦揚) 어르신이다! 얼른 움직…… 옴메 시벌! 야! 집중 안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