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화. 흐름을 바꾸는 자 (2)
가득상의 눈이 커졌다.
‘이건?’
저 멀리서 달려오는 아이들, 그리고 그 뒤를 굶주린 늑대들이 쫓고 있었다.
그 늑대들을 박살 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중, 일대에 지진을 일으킨 엄청난 공격을 볼 수 있었다.
‘화포?!’
아니다.
저것은 화포가 아니라 화살이다. 그것도 한 발이 아니라 아홉 발, 쏘아진 화살 하나하나에 감당 못할 힘이 담겨 있어 대지를 초토화시켰다.
깜짝 놀란 가득상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번쩍!
마치 속도의 신이 강림한 것 같았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벼락처럼 빠르다.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포착한 순간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파파파팡!!
허공에서 강렬한 파공성이 터지며 보이지 않는 무형의 뭔가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쩌저저정! 쾅!
붉은 광채가 번쩍인다 싶은 순간 무형의 발경이 허공에서 박살 났다.
가득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전보다 더 빨라진 움직임, 더 강한 탄력, 그리고 더 강해진 궁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장선단과 십보단은 속도를 올려라! 적이 아이들을 노린다!”
파아아아앙!
직선으로 쏘아지던 가득상의 몸이 일순 좌우로 비틀거리듯 움직였다.
직선이 아님에도 빠르다. 개방비기, 취팔선보(醉八仙步)가 펼쳐지며 적들의 숫자를 순식간에 읽어 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닿을 놈도.
‘저기!’
터어어엉!
하늘을 나는 가득상의 움직임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순식간에 호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가득상의 손에 어느새 은은한 옥빛 단봉이 들렸다. 속이 꽉 차 보이는 그 단봉은 취옥장(翠玉杖)을 본떠 만든 화진천의 병기, 옥룡곤(玉龍棍)이었다.
가득상이 옥룡곤을 휘둘렀다.
퍼억!
선두에서 달려오던 혈랑 하나의 머리통이 그대로 분쇄되었다.
가득상의 눈이 불타올랐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 한들, 역시나 살인이란 기분 나쁜 행위였다. 단단하고도 탄력 있는 옥룡곤을 통해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감각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 새끼들!”
사뿐한 진각과 함께 가득상이 전면으로 돌진했다.
“어디 감히 아이들을 노려!”
취팔선보로 적들의 품으로 파고든 가득상이 신들린 듯 옥룡곤을 휘둘렀다.
퍼버버버벅!
혈랑단원 여섯이 피를 토하며 좌우로 쓰러졌다.
개방을 대표하는 봉술, 삼십육로타구봉법(三十六路打狗棒法)이다. 엇박자로 적의 빈틈을 노려 전투 능력을 상실케 하는 기가 막힌 무공이었다.
하지만 몰려드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다만 좁은 길을 달려오니, 싸움의 형국으로 봤을 때 가득상에게 아주 유리한 형세였다.
가득상이 힘차게 좌장을 뻗었다.
쾅!
옥룡장(玉龍掌)의 화려한 위력이 혈랑단원 하나의 가슴을 부숴 버렸다.
부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즉사한 단원이 뒤로 날아가니, 바짝 붙어서 달려오던 혈랑들이 당황하여 주춤거렸다.
가득상의 우봉좌권(右棒左拳)이 불을 뿜었다.
퍼버버벅! 빠각!
타구봉법에 당한 혈랑들은 피를 토했고, 백결신권(百缺神拳)과 파옥권(破玉拳)에 당한 혈랑들은 뼈가 부러져 나뒹굴었다.
개방의 절정 무공들이 그 위용을 화려하게 드러낸다. 어느 하나만 익혀도 고수 소리를 듣는다는 개방의 비기들을 숨 쉬듯 자연스레 구현한다.
이것이 지금의 가득상이었다. 흘러가는 난세에 맞춰 그의 무공도 어느새 남들 못지않은 성장세를 보이니, 이제는 개방을 대표하는 무인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의 수는 여전히 많았다. 또한, 그들의 수준 역시 만만치 않았다.
파파파팡!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암기들.
가득상의 눈이 흔들렸다.
‘이것들이.’
자신을 노리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놈들의 암기가 향하는 곳은 자신의 뒤로 달아나고 있는 아이들 쪽이었다.
가득상의 양손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쩌저저정!
그 많은 암기가 가득상이 내뻗은 권풍과 봉영(棒影)에 막혀 모조리 튕겨 나갔다.
공격이 아닌 방어다. 개방의 무공 자체가 공격보다는 회피와 반격에 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그와 유사한 방어세에 있어서도 뛰어난 위력을 보인다.
티리리리리링!
그러나 혈랑들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그 독기만큼은 가득상도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
끝없이 쏘아 내는 비수와 수전(手箭)이 기어이 가득상의 뒤로 넘어갔다. 눈앞에서 밀어붙이는 혈랑을 죽이면서 그 많은 암기를 모두 쳐 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득상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막아라!”
퍼억!
학도사 세 명이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등판에 수전 몇 발이 꽂혀 있었다.
아이들이 당하지 않아 다행이다?
분명 다행이라 할 만했지만, 사람 목숨에 경중은 없는 법이었다. 하물며 저들 모두가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범부였다. 종남파 소속이라곤 하나, 무림인들의 싸움에 휘말린 죄 없는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파아아악!
그제야 가득상의 뒤에 당도한 십보단이 주먹을 휘두르며 암기를 쳐 냈다.
장선단이 아이들과 학도사들을 이끌었고, 그 뒤를 가득상과 십보단이 막았다.
‘제기랄!’
전쟁에 휩쓸린 이상, 한 명의 피도 안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아쉬웠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학도사 셋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화아악!
가득상의 몸에서 비취색 화려한 진기가 불타올랐다. 타오르는 진기는 이내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놈들!”
쾅!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진각과 함께 그의 좌장이 열여덟 개로 나뉘었다.
콰르르릉!
압도적이다.
개방 최강의 비기, 강룡신공(降龍神功)의 힘을 받은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이 펼쳐졌다.
개방 최강의 비기답게 강룡십팔장의 위력은 소림의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보다도 한 수 위라 알려져 있었다.
폭풍이라도 불어닥친 듯 혈랑 십여 명이 피를 뿜으며 날아갔다. 날아가는 그들의 몸뚱이는 곳곳이 움푹움푹 들어가 있었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져 버린 것이다.
“후욱!”
가볍게 숨을 몰아쉬는 가득상.
어느새 몰려드는 혈랑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끊임없이 달려온다. 오히려 실력 있는 자들이 이제야 나선 건지, 좁은 길을 놔두고 좌우 수많은 나무에 올라서 넓게 진을 펼친 채 달려오고 있었다.
가득상이 버럭 외쳤다.
“정면은 나 혼자 막는다! 십보단과 장선단은 임무를 바꿔!”
파아아악!
가득상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도동과 학도사를 이끌던 장선단과 가득상을 돕던 십보단이 순식간에 그 위치를 바꾸었다.
십보단은 육장(肉掌) 권각에 능하고, 장선단은 육 척 길이의 장봉(長棒)으로 펼치는 타구봉과 천화봉(天華棒)에 능한 이들이었다.
적의 공세를 보고 즉각 상대하기 쉬운 병력으로 교체한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득상의 전술안 역시 무척이나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십만 개방의 차기 주인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가득상의 얼굴은 심각했다.
옥룡곤으로 펼치는 봉법, 좌수로 펼치는 권장은 최소의 내력으로 적을 격파하는 무공으로 전환했다. 뭐가 되었든 자신이 힘을 잃으면 적들의 기세를 막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내공 소모가 극심한 강룡장을 내칠 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적의 공세가 줄어드는 만큼 자신의 체력도 분명히 타격을 입었다.
‘빌어먹을! 이런 식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해!’
그때였다.
사라라락!
급박한 전장 속에서, 가득상은 자신의 등 뒤에 내려선 한 명의 존재를 느꼈다.
예리한 살기, 거대한 힘의 흐름이 느껴졌다.
적인가 싶어 놀란 것도 잠시, 이내 가득상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자신과 장선단 사이에 내려선 인물이 적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가득상이 외쳤다.
“한 방 제대로 먹이쇼!”
파악!
외침과 동시에 가득상이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수그렸다.
그리고 그 너머.
붉고 커다란 활의 시위를 당기고 있는 묵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혈랑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묵비가 시위를 놓았다.
부아아아아아앙!
쏘아진 철전 주위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실로 오랜만에 펼쳐지는 구룡파천궁의 절기, 용아포(龍牙砲)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콰르르르릉!!
폭음과 함께 혈랑단원 수십 명이 피를 토하며 좌우로 날아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좌우 나무를 타고 달려오던 혈랑단원 몇몇은 용아포가 휩쓸고 지나간 역장으로 빨려 들어가 온몸이 분쇄되어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워…….’
가득상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과거보다 훨씬 더 막강해진 묵비의 용아포는, 이제 화포 이상의 파괴력과 당가 암기 이상의 관통력을 지닌 무적의 살법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외길이라 용아포 특유의 공격력이 더 큰 위력을 발한다. 전장의 흐름을 단숨에 바꿀 만한 일격, 이곳에 있는 무사들은 물론 저 멀리서 몰려오는 혈랑들과 하복, 용국진인과 매화검수들마저 놀랄 만큼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가득상이 뒤를 돌아보았다.
“묵……!”
묵비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이미 묵비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혀를 내두를 만한 신법이었다. 지금은 대화가 중요한 때가 아니라는 것, 용비순행(龍飛瞬行)의 신법으로 우측 나무를 타고 오는 혈랑들을 후려 찬 묵비가 재차 하복을 향해 달려들었다.
재회의 반가움을 논할 때가 아니다. 묵비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볼을 긁적이던 가득상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좋아! 술이야 이 망할 전쟁이 끝난 다음에 푸자고!”
“이것들이!”
분노한 하복이 매화검수들을 향해 만도를 휘둘렀다.
푸화악!
매화검수 다섯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들 모두 가슴이 깊게 베여 즉사를 면치 못했다.
우우우우웅!
붉은 진기가 광기로 변하여 하복의 살기를 한층 거세게 불살랐다.
“어디서 감히 우릴 방해하느냐!”
괴성을 지르며 휘두르는 만도.
혈랑단이 보유한 최고의 무공, 혈랑사도가 펼쳐지며 매화검수들의 목숨을 노렸다.
쩌저저저정! 퍼억!
검진을 펼쳐 혈랑사도의 위력 팔 할을 분쇄했지만, 해소되지 못한 경력이 검수 둘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매화검수들의 눈이 충혈되었다.
전쟁이라지만, 동료가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다.
이 역시 평범한 전쟁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무림인의 전쟁, 단 한 명의 초고수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이놈!”
혈랑단원 셋을 베어 낸 용국진인이 재차 하복의 등을 노렸다.
휘이이이잉!
그 짧은 순간 생성된 새하얀 검기가 수십 개의 꽃잎이 되어 하복의 사지를 노렸다.
검은 등을 노리고, 검기는 사지를 봉쇄하려 한다. 화산의 자랑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 펼쳐진 것이다.
하복의 몸이 그 자리에서 회전했다.
쩌저저저저정!
휘몰아치는 도격에 그 많은 검기가 스러지고, 용국진인의 검이 튕겨 나갔다.
하복이 재빨리 용국진인을 향해 돌진했다. 중단으로 세운 칼, 단숨에 가슴팍을 찔러 죽일 의도였다.
그때, 한 줄기 무형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퍼어엉!
낭표장의 경력으로 묵비의 무형탄(無形彈)이 폭발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퍼퍼퍼펑! 빠각!
하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각기 예측 못 할 곡선을 그리며 쏘아진 무형의 화살 중 하나가 기어이 그의 허벅지에 적중했다.
뼈가 상하진 않았지만, 근육이 찢어질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무형탄 오연발의 마지막 한 발이 기어이 하복의 몸에 닿은 것이다.
“개 같은 년!”
때를 놓치지 않은 용국진인이 하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체력이 놀라웠다.
쩌저정! 쿵!
중심을 잡지 못한 하복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처음으로 하복을 밀어붙인 용국진인, 그가 묵비를 향해 외쳤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소! 당신은 당신의 전장으로 가시오!”
재차 시위를 당기려던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용국진인이 말을 이었다.
“그 도끼!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전해 줘야 할 사람이 있지 않소?!”
가만히 용국진인을 보던 묵비가 빠르게 시위를 당겼다.
퍼버버버벅!
매화검수 주변을 압박하던 혈랑단원 십여 명을 사살한 묵비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용국진인이 씨익 웃었다.
“이제는 해볼 만하구나!”
하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