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피는 어디로 흐르는가 (7)
“검진을 개방할 준비를 하라!”
“좌측! 그쪽 절벽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조심해!”
“투척 병기가 사용될지도 모른다! 적들은 화탄을 사용했던 전과가 있다! 폭약에 주의해라!”
“불을 밝혀라!”
종남산 일대에서 소란스러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소란은 얼마 가지 않았다. 검진 개방의 준비를 마치고, 나아가 외부 공격에 대한 완벽한 대비가 끝나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사방을 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하군.”
종남 본산의 중앙.
연호정은 한껏 깊어진 눈으로 북방을 주시했다.
‘분명 오고는 있는데.’
살기 충만한 기세가 군기로 바뀌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거리가 너무 떨어져서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전에 느꼈던 적의 위압감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한데 뭐가 이렇게 걸리는 거지?’
가만히 북방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멀리 떨어진 화검자에게 전음을 날렸다.
[노 선배가 보기에는 어떻소?]
화검자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와 다르네. 자네와 동등한 힘을 지닌 자가 움직이고 있음은 알 수 있지만, 적의 군세까지 파악할 눈은 없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도 얘기를 나눈 바 있었다.
무공으로 선도의 가르침을 깨우친 자. 분명 대단한 공부였지만, 끝내 이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기에 한계가 있다.
그저 적이 오고 있다는, 정확히는 적의 수장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을 첨예해진 감각으로 겨우 알아챌 뿐이었다.
“…….”
연호정은 생각에 잠겼다.
‘빠르게 접근 중이다. 굳이 소리를 없앨 생각도 없어. 어차피 이쪽에서 침공 사실을 알고 있으니, 말 그대로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겠지만.’
그때, 후방에서 건너온 황석태가 말했다.
“적이 오고 있다고?”
“그렇다네.”
“……아무리 기감을 열어도 모르겠는데. 무극이라는 건 정말 대단한 거군.”
연호정이 의아한 눈으로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왜 여기로 왔나? 자신의 자리를 지킬 것이지.”
이런 대규모 전투에 있어서, 황석태는 누구보다 뛰어난 역량을 과시하는 이였다. 아닌 말로, 연호정 역시 흑암제 시절의 경험이 없었다면 황석태에게 이번 일의 지휘를 맡겼을 것이다.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서.”
“어떤?”
“자네가 보기에, 적은 종남파의 지형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겠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만, 특히나 그가 확신하는 것은 과거 흑암제 시절의 전투 경험 때문이었다.
당시의 사음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치밀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당시에는 지금의 연호정처럼 삼교의 귀계를 알아차리고 차례차례 격파해 낸 역사가 하나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당시 그놈들이 보여 주었던 완벽성이었다.
개개인의 특수 임무는 몰라도, 대규모 전투에 있어서 놈들은 적진의 지형과 강약점을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승전도 많고 패전도 많았지만, 사음교가 일으킨 전투 중에는 이쪽 지역에 빠삭하지 않고서는 감히 시도하지 못할 종류의 것들이 태반이었다.
그 경험과 지금의 상식이 연호정에게 확신을 내려 준 것이다.
“흠, 자네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거겠지. 설령 사실과 다르더라도, 일단은 놈들이 이곳을 잘 알 거라 상정하고 대비하는 게 옳아.”
“그래, 맞네. 한데 그게 왜?”
“그렇게 생각한다면 약점이 될 만한 곳이 몇 군데 있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약점?”
“그래, 약점.”
“어디지?”
“그곳은…….”
그때였다.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종남 본산 맞은편의 봉우리가 시뻘건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깜짝 놀라서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르르르르륵!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봉우리 끝에서부터 피어오른 불꽃이 전후좌우로 퍼져 나가는 속도가 굉장했다.
이쪽에서 보고 있는데도 꽤 빠른 속도다. 저 안에 있었다면 번져 나가는 불길 속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화계(火計)?!”
“단순한 화계는 아니야.”
당연하다.
진짜 화계를 펼칠 생각이었다면 굳이 맞은편 봉우리를 불태울 이유가 전혀 없다. 죽은 듯 접근했다가 공격 순간부터 이쪽으로 화공을 집중했을 것이다.
저런 모습을 보여 봐야 도리어 놈들에게 손해다. 화공(火攻)이라는 까다로운 수단을 갖고 있음을 이쪽에 확인시켜 준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있다.’
통천부를 쥔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분명 이유가 있는 거야. 반나절 전에 봤던 그 녀석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쿠르르릉.
그때, 저 멀리 봉우리에서부터 은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일정한 박자가 있는 진동이 아니었다. 작지만 수많은 뭔가가 미쳐 날뛰며 일으키는 혼란 가득한 진동이었다.
‘동물?!’
그렇다.
벌써 봉우리의 삼분지 일이 넘는 범위가 불탔다. 그 불을 피하고자 헤아릴 수 없는 산짐승들이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우우웅!
연호정의 동공이 빨갛게 물들었다.
힘의 원천, 광명신단이 자아내는 힘을 받아 불타오르는 주작화기(朱雀火氣)다. 순식간에 심박수가 올라가고, 온몸에 짜릿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전진 중 화계. 산짐승들을 이리로 보내고 있지만, 그 정도로는 혼란 가중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하물며 그 혼란조차도 이 정도 병력 앞에서는 대수로울 것이 못 돼.’
우우우우웅.
심박수가 올라가며 머리가 뜨거워졌다.
화기를 받아 상단전으로 몰린 대량의 피가 뇌를 미친 듯이 자극했다.
사고의 속도가 빨라지고, 순식간에 수많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위협적인 작전은 분명 존재하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들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훅!
붉게 타오르던 그의 동공이 이내 순수한 빛을 내뿜었다.
“황 단주.”
“말하게.”
“구윤 장로님께 미리 말씀드렸네. 내가 전장에서 이탈하면, 그때부터 자네를 군사로 삼아 달라고. 구윤 장로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로님은 물론, 화검자 노선배까지도 수용했어.”
황석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런 얘기가 오고 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투에 능한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자네뿐이야. 자네가 맡아 주게.”
“하면 자네는?”
연호정이 어깨를 살짝 돌렸다.
“가 봐야 할 것 같아.”
“적진에?!”
“그래.”
“그건 안 돼! 저쪽에 어떤 함정이 있을 줄 알고? 자네는 유사시에 적의 공세를 막아 줄 가장 큰 방패라는 걸 잊었는가!”
“동시에 가장 강력한 창이기도 하지.”
“……!”
“뭔가 이상해. 분명 적이 다가오고 있어. 그건 확실해. 한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황석태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확인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홀로 온 자네를 적장이 가만히 두겠나?”
“당연히 가만두지 않겠지.”
“그럼……!”
“나도 죽일 기세로 싸워야겠지.”
연호정이 황석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간 황석태가 움찔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좀 떨떠름하긴 했네. 진심으로.”
“무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이번 무림행에 자네가 같이 와 준 것을 말이야.”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짐을 떠넘겨서 미안하네. 그래도 자네가 있어서 더 많은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었어.”
“…….”
“비싼 술, 꼭 대접하지. 이번에도 잘 부탁하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라니? 다음에 또 써먹을 생각인가 본데?”
“꼭 이럴 때만 날카롭군.”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그 약점이라는 거, 내게 말해 주지 말게. 이제부터 자네가 이 전장의 지휘자야. 자네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은 전부 실행하게.”
그가 멀리 떨어진 화검자에게 외쳤다.
“노선배! 난 적장에게 가겠소! 이제부터 황 단주의 명에 따르시오!”
파아아앙!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불붙은 봉우리를 향해 내달렸다.
황석태가 몸을 돌렸다.
“제길, 바쁘게 됐군. 개방 그 망할 거지 놈들이 빨리 와야 할 텐데.”
* * *
꾸웨에에엑!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연호정의 눈에 꽤 많은 멧돼지들이 보였다.
섬서 일대에 사는 멧돼지는 크기도 보통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평균 크기보다 반절은 더 큰 것 같았다.
멧돼지만이 아니었다. 뿔 달린 사슴부터 토끼, 저 멀리서는 늑대 떼마저 미친 듯이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훅!
혈익휘천으로 짐승들 사이를 돌파한 연호정이 단숨에 봉우리 아래에 도착했다.
‘어디 무슨 꿍꿍이인지 보자.’
그때였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연호정은 막연히 안고 있던 불안감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기분을 느꼈다.
퍼어어어엉!
봉우리 정상에서 또 한 번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산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거센 폭음이었다. 공기가 우웅! 하고 울리는 걸 보면, 처음 터트렸던 폭약보다 훨씬 더 막강한 충격파를 만들어 낸 듯했다.
‘화탄이 아니다.’
심지어 화기(火氣)가 증폭되지도 않았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신호?!’
콰드득!
전진하던 신법을 멈추고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화아아아아악!
어느새 한참 멀어진 종남 본산.
그 본산의 정면이 아닌 뒤쪽, 후방에서부터 매서운 군기가 파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놈들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황석태가 맡고 있던 본산 후방 멀리서부터 적들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군기의 흐름으로 읽힌다. 말하자면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분명 적장과 그 휘하의 군기가 봉우리 너머에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병력을 둘로 나눴다고?!’
파아아아아악!
그 순간, 봉우리 정상에서 한 명의 절대자가 돌풍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실로 빨랐다. 연호정이 상황을 판단하는 그 잠깐 새에 이미 달려오고 있었으며, 상황을 읽고 움직이려는 순간에는 이미 연호정의 시야에 잡힐 정도로 접근해 있었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박자의 문제였다. 여기서 물러나면 초전부터 기세에서 밀릴 것이다.
“으아아압!”
연호정이 매서운 기합성과 함께 통천부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지진이라도 난 듯한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연호정과 명극이 제각기 뒤로 밀려 나갔다.
확!
충격이 어찌나 강했는지, 밀고 내려오던 불꽃이 다시 산봉우리 위쪽으로 훅! 밀려 올라갔다.
“대단하구나!”
파바박!
허공을 밟으며 연호정의 후방으로 내려선 명극이 감탄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잘 왔다. 역시 감각 하나는 끝내주는군.”
“……내가 오길 기다렸군.”
“정확하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네놈과 함께하는 병력의 군기를 읽었는데?”
“그거 말인가?”
명극이 히죽 웃으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르르르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그런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봉우리 뒤쪽, 명극과 함께 달려온다고 생각했던 적들의 기척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영기진(靈氣震)이라는 술법이다. 허상의 진기를 실체화하여 그 수를 말도 안 되게 불리는 본교 최고위 술법 중 하나지. 광혈에도 비슷한 게 있지, 아마?”
“……!”
“사실 이걸로도 모자랄 것 같았다. 해서 화공까지 펼친 것이야. 영기진의 인위적인 기척 증대를 자네가 꿰뚫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화기로 혼란을 가중시켰지.”
거대한 산불을 일으켜 어지러운 화기로 연호정이 가질 일말의 의심마저 감춰 버렸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저도 모르게 쌍소리를 내뱉었다.
“시발놈들, 이런 건 진짜 반칙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자네 때문이야.”
명극이 자세를 낮추었다.
“본교 최고위 술법에 화공까지, 오직 자네 하나 때문에 반나절이 넘도록 이 귀찮은 짓을 준비했다.”
“그 열정으로 새외에서 열심히 일하고 살 것이지 뭐 하러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어, 이 개 같은 놈들아.”
“자, 대장은 대장끼리 붙고, 병졸들은 병졸들끼리 붙게 하자고!”
“아오!”
파아아앙!
두 초고수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