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80화 (680/963)

◈680화. 피는 어디로 흐르는가 (5)

명극이 사라지자, 연호정은 곧장 종남으로 향했다.

그의 신법 속도는 그 자신이 말했던 것과 같이, 명극의 착공비보보다도 더 빨랐다. 그만큼 내공 소모도 조금 더 컸지만, 분명한 것은 더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맞불 작전을 벌여야 하는 순간이 왔다면, 연호정은 명극이 잡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였을 것이다.

‘모험이 통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반만.’

파라라라라락!

수십 리 거리를 엄청난 속도로 좁힌 연호정이 종남 산문에 도착했다.

“후우.”

제아무리 무극의 고수라도 수십 리 길을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왔으니, 자연스레 호흡을 고르게 된다.

“왔냐!”

패율과 종남의 장로들이 연호정에게 다가왔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아.’

다소 늦은 감은 있었지만, 종남산 일대로 무수히 많은 고수 무리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제각기 병력을 분산하여 효율적인 전투가 가능하도록 인선을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구윤이 이 상황을 이해해 준 모양이었다.

패율이 서둘러 물었다.

“어떻게 됐냐?”

“시간은 벌었습니다만, 애매모호합니다.”

“그게 뭔 소리야?”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는 진격하지 말라 못을 박았습니다만…….”

어떻게 그리 설득했는지 패율은 묻지 않았다. 그가 아는 연호정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애매모호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일단은 수긍하고 돌아갔지만, 정말 그 말을 지킬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

“그쪽 수장과 일대일로 싸워 죽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당장 도끼를 들었을 테지만, 어떻게든 무력 외의 수단으로 압박을 가할 수밖에 없었지요.”

“한데?”

“문제는 놈의 머리가 아주 비상하다는 점입니다. 당장 쳐들어오지는 않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지금부터 동이 트기 전까지, 언제 치고 들어올지 알 수 없다는 뜻도 됩니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물론 치고 들어오는 거야 우리가 이미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하나, 어떤 전술을 펼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전술?”

“사도암과 청목애,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병력을 집중시켜야 할 곳은 이 두 곳입니다. 만약 상대와 만나지 않았다면, 예상대로 그곳들을 공략했겠지요.”

“지금은 다르다는 뜻이로군.”

“정확히는,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어지간한 놈이라면 희희낙락하겠는데, 직접 만나 보니 수장 놈이 확실히 비범해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전술로 난장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홍적이 버럭 외쳤다.

“그렇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만남이 아니었나!”

패율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홍적을 노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그렇지 않네, 사제.”

패율의 말을 끊은 것은 구윤이었다.

구윤이 점잖으면서도 엄한 눈으로 홍적을 바라보았다.

“현재 종남을 위해 많은 무림 동도들이 와 주고 있네. 연호정 대수는 바로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무리해서 적의 수장과 만난 것이야.”

“……!”

“적의 전술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든든한 아군이 도착할 시간을 얻게 되었네. 자네라면 어떤 길을 선택하겠는가?”

“그것은…….”

“나아가 상황이 어지러워 나 역시 빠른 판단을 내리진 못했네만, 연호정 대수는 종남을 위해서 애써 주고 있는 사람이야. 그 목적이 어떻든,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어 준 사람에게 그 어인 실언이란 말인가?”

홍적의 얼굴이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자네 마음을 모르지 않네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하네. 무서운 전운(戰雲)이 종남산으로 몰려드는 이때, 우리끼리 싸우고 헐뜯는 것보다는 서로를 돕기 위해 애써야 함이 마땅한 것이야.”

구윤이 장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들도 내 말 명심하고, 아까 정해 두었던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검사들을 독려하게나. 절대 긴장을 풀지 않도록 해.”

장로들이 고개를 숙인 후 제각기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홍적은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병력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진 않은 모양이었다.

구윤이 연호정에게 말했다.

“고생했네. 몸도 정상이 아니라고 들었거늘.”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요.”

말을 하던 연호정은 문득 기감에 걸리는 하나의 인기척을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인기척이었다. 빠른 속도로 산문에 가까워지는데, 그 무력이 일파의 장문인급이라 할 만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여광?’

그렇다.

저 멀리서부터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 바로 종남파의 대장로인 여광이었다.

구윤과 홍적의 눈이 커졌다.

“대장로님?!”

“자네들……?”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던 여광의 눈빛이 일순 싸늘해졌다. 연호정과 패율을 발견한 것이다.

“자네들이 여기에는 왜 왔는가?”

고압적인 말투였다.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기분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적이 종남을 노리고 있습니다.”

여광은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

“화산이 아니라 종남이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이니 노선배께서도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건 그렇고.”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함께 있던 종남 검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따로 임무를 맡긴 게 아니라면 그들 모두를 데리고 와야 할 텐데.”

씩씩대던 여광이 차갑게 말했다.

“타 문파의 일을 알려고 들다니, 참으로 예의가 없구먼.”

“그렇습니까.”

연호정은 여광을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았다. 상대해 봤자 자신만 피곤해질 뿐인 인간이었다.

패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못마땅한 눈으로 여광을 보고 있지만, 괜스레 나서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그 말이 사실인가? 종남이 위험하다고?”

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해서, 현재 휘하 검사들을 산 전체에 배치했습니다. 장로들은 방위별로 장을 맡아 문도들을 독려 중입니다.”

“사실인 것 같다고? 제대로 확인이 안 된 사항이란 말인가?”

“예?”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사항이냐 물었네.”

“그것은…….”

구윤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 대수가 방금 적장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본래라면 오늘 날이 저무는 대로 쳐들어올 것 같았으나, 어떻게든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 시간을 벌고 왔습니다.”

여광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여광을 보지도 않았다.

“어찌 되었든, 저 무도한 놈들이 동이 트기 전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부분은 검사들에게 계속 주지시켜 둬야 할 겁니다.”

“물론 그러겠네.”

“혹 전대의 어른들은…….”

그때였다.

“확실한가?”

여광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확실하냐고 물었네. 적이 쳐들어오는 것 말이야.”

“그럼 적이 오지도 않는데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병력을 모아야 한다고 난리를 치겠습니까?”

담담한 얼굴로 말했지만, 연호정의 말투도 썩 곱지는 않았다.

고울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여광은 아집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다.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 아닌, 최소한의 존중도 하기 싫은 인물일 따름이었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게.”

“……?”

“자네가 적장과 만났다는 것도 자네만 알지, 다른 사람은 본 적이 없잖은가?”

구윤은 물론 홍적의 얼굴에도 충격이 어렸다.

지금 여광의 말은 도를 지나친 것이었다.

연호정은 무림맹 최강의 유군 부대인 의정군의 대수로, 맹의 봉공과 장로들이 직접 그 실력을 인정한 맹회의 장수였다. 공식적인 위치만 생각하면, 사실상 문파의 장로들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한데 그런 이에게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라니?!

“대장로님. 그 말씀은 너무…….”

여광이 버럭 소리쳤다.

“자네들은 지금껏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게야! 제대로 확인조차 되지 않은 사실에 허둥지둥해서 휘하 검사들을 움직이다니!”

“대장로님?!”

“남들이 이 사실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게! 새파랗게 어린 무림 후배의 말에 화들짝 놀라 종남 전체가 수선을 떤 꼴이 되는 게야! 이것이 외부로 알려지면 종남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는가!”

구윤의 눈이 깊어졌다.

“연배 이전에, 연호정 대수는 지금껏 숱한 전공을 세운 무림맹 최고 장수입니다. 그런 이의 말에 움직이는 것은 결코 위신 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무림맹의 장수이기 전에 무림의 후배야! 그것도 어리디어린!”

홍적의 얼굴에 불안함이 어렸다.

구윤의 얼굴에도 은근한 노기가 어렸다.

“어린 후배의 말이라면 무조건 불신해야 한다는 말씁이십니까?”

“내 말은 그것이 아니잖은가! 아까부터 몇 번을 말해! 제대로 확인부터 한 뒤에……!”

“무림의 후배가 아니라!”

순간 터져 나오는 구윤의 목소리에 여광이 깜짝 놀랐다.

“어린 후배가 아니라 무림맹 최고 수뇌부들이 인정한 장수이며, 우리 장로보다도 영향력이 큰 맹의 조직원입니다!”

“일장로?!”

“사형답지 않게 어찌 그리 심한 폭언을 하십니까? 하물며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상대를 모욕하시다니요!”

“이보게!”

“대장로님의 그 발언으로 종남의 문인은 백도 정파의 연합체인 무림맹을 인정치 아니하는 문파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여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구윤, 네놈이 감히 사형에게 그따위 망발을 하느냐?”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고 정신을……!”

“이제 네놈도 사문의 존장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더냐?!”

존장.

존장이라 함은 존대해야 마땅한 어른을 뜻함이다. 물론 여광의 나이가 구윤보다 훨씬 많긴 하지만, 배분을 생각하면 존장이라는 말을 쓰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구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존장이라 하셨습니까?”

순간 여광은 아차 했다.

울화가 치민 탓에, 사질들을 대할 때처럼 저도 모르게 말실수가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자꾸만 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그였다. 한번 상한 자존심이 내재된 분노를 시도 때도 없이 자극하여 실수를 유발하고 있었다.

물론 말이 실수지, 평소에도 스스로를 존경받아 마땅할 어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발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광이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흥분해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군. 이해하게.”

역시나 미안하다 따위의 말은 없었다.

헛기침을 한 여광이 재차 말을 이었다.

“뭐가 되었건, 확인되지 않은 사항에 문파 전체가 이리 나서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 지금 당장 검사들을 불러들여…….”

“연 대수.”

여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구윤이 연호정에게 말했다.

“우리는 무림맹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외다.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오.”

편하게 대했던 이전과는 달리 깍듯하게 반존대를 하는 그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이상한 사람 하나 때문에 그 집단 전체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큼 멍청하지 않습니다.”

구윤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상 연호정이 지금껏 참고 들어 준 것만으로도 종남 입장에선 천만다행이었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여광을 체포한다고 나서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그것이야말로 종남의 위신을 깎아 먹는 일이 될 것이다.

“전투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오.”

“그러셔야지요.”

그때였다.

무시당한다고 여겼을까? 아니면 정말 미쳐 버린 것일까.

후우욱!

여광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홍적이 깜짝 놀라 외쳤다.

“대장로님!”

구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광 사형!!”

파아악!

여광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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