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8화. 피는 어디로 흐르는가 (3)
‘저놈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자신을 포착한 순간, 상대가 무서운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놈이 수장이야.’
연호정의 턱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종남 본산에서부터 느꼈던 기이한 불길함.
그 불길함은 흑암제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수없이 많은 전투로 예민함이 극에 이르렀던 당시, 그는 흐르는 공기의 의지마저 읽어 낼 수 있을 만큼 첨예한 감각을 자랑했더랬다.
말하자면, 놈들의 이번 공격이 그만큼이나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흑암제 시절의 깨달음까지 알아서 구현될 만큼.
문제는 당시의 무력까지 뽑아낼 수 있을 만큼의 경지가 아니라는 것이었지만.
문득, 패율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순간의 깨달음이라고 한다면야 저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다만 그 깨달음을 무시하고 무공의 출력만 상승시키느냐, 발전은 느리더라도 깨달음과 함께 모든 것을 손에 넣느냐의 차이입니다.’
‘뭔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군. 결국 같은 거 아니냐? 깨달음을 얻어야 무력이 강해지지.’
깨달음은 곧 무력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무림인에게 그것은 상식이었다. 한 줄기 빛살과 같은 깨달음으로 서너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막강한 고수가 된 사례는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러나 무극(無極), 이 혼돈의 영역에서만큼은 깨달음과 무력 상승을 동일하게 볼 수 없다.
깨달음이 무공 상승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실력 하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전투 능력을 철저히 상승시키다가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전투 능력 상승으로 인해 깨달음을 손실하여 싸울 줄만 아는 전투인형(戰鬪人形)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흑암제 시절 연호정은 철저히 후자였다. 그는 깨달음에 관심이 없었다. ‘나’의 완성보다는 적의 파멸과 아군의 안전만을 목표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무력 상승으로 인한 깨달음의 저하는 겪지 않았으나, 때때로 무언가를 잊은 듯한 기분이 들거나 숨 쉬듯 자연스레 체득했던 이치를 고민할 때는 있었다.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오를 수 있는 지고한 경지에 발을 디딘 자가, 정작 스스로를 잃고 창칼만 휘두를 줄 아는 인형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은교의 말을 듣고 새삼 놀란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궁극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이 버틸 수 없는 궁극의 시련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네. 아까 전, 자네가 살기에 잡아먹혔을 때처럼.’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더랬다.
그는 당가에서 광혈교의 주구와 싸우다가 이 경지에 진입했다.
하지만 이 경지를 진실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이 경지에서 발휘할 수 있는 무공의 최대치가 어느 정도인지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익숙한 것을 얻었다고 자만한 것이다. 과거 이 경지에 오른 적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다고 넘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상대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순간이지만, 연호정은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는 안 됐어. 나는 흑암제가 아니다. 벽산호장으로서의 나는 그와 같지만 전혀 달라. 지금의 경지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
새삼 아쉬웠다.
아쉽지만, 또한 다행이었다. 음제라는 희대의 고수 덕에 망가질 뻔한 정신을 복구시켰으니, 이제부터라도 흑암제가 아닌 벽산호장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한 지금.
연호정은 다시 한발 나아갈 수 있었다.
번쩍!
다소 과했던 긴장이 사라지고, 적의(敵意)와 걱정이 가득했던 두 눈이 호수처럼 고요해졌다.
소소하면서도 절대 지나쳐선 안 될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이 짧은 순간, 연호정은 이곳에 도착하기 전과 또 다른 사람이 되었다.
우우우우웅!
한 줄기 깨달음에 광명신단이 기쁨의 울음을 토해 냈다.
츠츠츠.
이곳까지 오면서 소모했던 진기가 빠르게 채워졌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미세한 내상들도 진기의 회복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놀랍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건 처음이야.’
한 줄기 깨달음이 몸의 회복 속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무력 상승을 불러오진 않았지만, 몹시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물론 연호정은 현실을 잊지 않았다.
‘빠른 회복으로 몸 상태가 시시각각 좋아지고 있어. 그렇다고 해도 상대와의 격차는 분명하다. 단순한 정면 승부라면, 지금의 나는 놈을 이기기 힘들 거야.’
예상임과 동시에 확신이었다.
‘이기려고 온 길이 아니다. 또한, 적은 사음교의 주구이지만 나는 흑암제가 아니야. 굳이 열을 낼 필요가 없어.’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지금껏 상대했던 무수히 많은 적처럼, 지금 보는 적장도 미래의 나에게 의미 있는 강적으로 기억되기를.’
그리고.
훅!
마침내 명극이 봉우리에 올랐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
두 사람이 십여 장 거리를 격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초절정고수만 되어도 십 장 거리를 단숨에 지울 만한 힘이 있다. 무극에 오른 두 사람에게, 이 거리는 멀면서도 지극히 가까운 근접 거리라 할 수 있겠다.
후우우우우우웅.
높은 산봉우리,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거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명극이었다.
“놀라워.”
가득상보다 몇 살 위, 거의 불혹에 가까운 연배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십 대 청년처럼 맑고 생동감이 넘쳤다. 와중에 말투는 묘하게 나른한 것이, 무척이나 독특한 존재감을 자아내는 자였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천십삼좌 중 하나가 찾아온 건 아닌가 싶었더랬지. 존재감을 느낄 새는 없었지만, 왠지 싸우러 온 건 아닌 듯싶어 긴장을 풀고 오긴 했는데…….”
“…….”
“나보다 어린 녀석일 줄은 몰랐다. 정말 대단하구나.”
명극은 어지간해선 남을 칭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일도 없었다. 희대의 천재로 불리며 사십 년을 살 동안, 자신보다 낫다고 인정할 만한 자를 거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아무리 작게 잡아도 자신보다 십 년은 어린 청년의 경지가 이와 같다는 데에서, 명극은 질투와 분노 이전에 놀라움과 감탄을 느꼈다.
“무림에는 기상천외한 기인이사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들었지. 뭐, 아직 바다를 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은거한 기인은 아닌 듯싶고.”
명극의 시선이 연호정의 허리 양쪽으로 삐져나온 손도끼의 손잡이에 닿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거대한 도끼에도.
“설마, 네놈이 연호정이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연호정이다.”
“……허!”
명극이 헛웃음을 흘렸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니 뭐니 말이 많더니만, 이건 단순히 후기지수 수준이 아니잖나?”
“그래 보이나?”
“우리의 일을 많이 망쳐 놓았다고 들었다. 선봉에 서서 어지간히 괴롭혔다길래 어떤 놈인가 싶었거늘…….”
명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남자라면 이해가 가. 그간 우리가 준비했던 많은 것을 망친 적의 진짜 무력이 이와 같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꽤 차분하군.”
“나 말인가?”
“여기 네놈 말고 또 누가 있겠나?”
적이라지만 자신보다 어린 청년에게 대뜸 이런 소리를 들으면 화가 안 날 수가 없다.
그러나 명극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워했다. 이만한 인재를, 앞으로 또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명극이 미소를 지었다.
새외의 삭풍을 맞으며 자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미소는 아이처럼 맑았다.
“처음에는 놀랐지. 이상하기도 했고, 갑자기 내가 미친 건 아닌가 싶었어. 하지만 그게 아님을 지금 알게 되었잖은가.”
“긴장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로군.”
“과하게 긴장할 이유는 없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놈은 좀 다르군.”
“나 말인가? 그간 네 녀석이 만난 본교의 교도들을 떠올린다면…… 당연히 같을 수가 없지. 무공, 실력, 위치 등 모든 것이 다르니까.”
그 말이 아니었다.
연호정은 과거에 사음교가 자랑하는 무수히 많은 고수와 싸웠다.
모두와 싸워 본 것은 아니지만 교내에서 유명한 자들 대부분과 손속을 나눴고, 그중 절반 이상을 죽였다.
한데 이놈은 처음이었다.
호연종처럼 음황무의 힘을 이은 것 같은데, 순수한 음황무는 아닌 듯했다. 호연정처럼 또 다른 무공과 함께 쓰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공부와 섞여 버린 것 같은 기도를 내뿜고 있었다.
‘위험하군.’
통천부를 쥔 손이 차가워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공부임은 확실해. 생각보다 더 위험해졌다.’
적장인 이놈과 맞상대가 가능한 자는 지금 자신밖에 없다. 지금이든 나중이든, 싸움이 시작되면 예상보다 배는 더 위험해질 것 같았다.
“뭐, 그건 그렇고.”
명극이 불쑥 튀어나온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편안하고 여유 있는 자태다. 연호정이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자네가 연호정이라면 종남에서 왔을 테고, 그렇다면 우리가 종남을 치러 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물론이다.”
“그 먼 거리에서 어떻게 우리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훨씬 예민한 녀석임은 분명해. 지닌바 무공이 감각을 따라가진 못하는 것 같지만.”
“…….”
“이렇게까지 직접 찾아온 건, 휘하 병력을 와해시키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명극이 나른하게 물었다.
“나를 만나러 왔는가.”
예리한 놈.
연호정은 상대의 날카로운 눈치에 제법 놀랐다.
“그렇다.”
“굳이 날 찾아올 이유는 없을 텐데. 몇 가지 이유를 제외하면 말이야.”
명극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날 죽이려 들었을 테지만, 보아하니 그건 또 아니고.”
생각 이상이다.
지금껏 상대의 의도를 읽어 선수를 치는 것은 연호정의 몫이었다. 그간 어떤 상대든 연호정의 눈치와 머리를 따라온 자는 없었다.
하지만 명극은 달랐다.
머리는 몰라도, 눈치 하나만큼은 연호정에게 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 짚어 가며 차츰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 연호정의 그것과 지극히 유사했다.
“시간을 벌려고 왔나?”
가만히 명극을 보던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 맞다. 시간 벌려고 온 거다.”
명극의 얼굴에 의외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걸 솔직히 인정해 버린다고?”
“아니라고 한들 믿어 줄 것 같진 않거든.”
“하하하!”
무엇이 그리 기쁜지, 명극은 크게 웃었다.
“그래, 되지도 않는 어설픈 거짓말로 상대를 얕잡아 보는 건 별로 안 좋은 버릇이지. 적이지만, 나는 자네가 참 마음에 드는군.”
“아쉽군. 나는 네놈이 마음에 안 들거든.”
“거기까지는 관심 없다네.”
명극이 바위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싸울 생각 없이 시간을 벌기 위해 왔다면, 나는 그 반대로 움직이면 되겠구만. 종남이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이때 전력을 이동시켜야겠어.”
명극이 씨익 웃었다.
“짧지만 인상 깊은 만남이었다네. 종남에서 보도록 하지.”
물끄러미 명극을 보던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눈치가 빨라서 유감이다. 하지만 착각하는 게 하나 있구먼.”
“음?”
“널 죽일 자신은 없지만, 싸울 생각은 있는데?”
“뭐?”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편하게 혓바닥 좀 놀리면서 바보 만들 생각이었는데,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는 듯하니 도끼로 찍고 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
“……나와 싸우면서 시간을 벌겠다?”
“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정 싫다면 이건 어때.”
통천부를 바닥에 내리찍은 연호정이 양손을 가볍게 털었다.
“이곳에서 종남까지의 거리보다, 네가 끌고 온 병력이 주둔한 곳이 더 가깝잖냐.”
“…….”
“다른 건 몰라도 달리기는 너한테 안 질 것 같다만.”
명극의 눈이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