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77화 (677/963)

◈677화. 피는 어디로 흐르는가 (2)

“공기 좋군.”

특유의 나른한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꽤 상쾌함이 느껴지는 표정이 압권이었다.

보란 듯이 기지개까지 켠 명극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복을 위시한 천이백 마리의 붉은 늑대가 제각기 살기 어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대부분 호흡이 흐트러진 상태였지만, 지금까지의 강행군을 생각하면 중간에 쓰러지지 않은 게 놀라웠다. 칭찬받아 마땅할 체력이었다.

명극이 손을 휘저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천천히 진군할 것이다. 완전히 밤이 되는 즉시 맹공이니, 그때까지 체력 관리 제대로 시켜.”

하복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해가 넘어갈 시간이라면 한 시진이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가 훌쩍 넘는 강행군을 했다면, 한 시진이 아니라 하루를 통째로 쉬어도 피로가 남는다. 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도 최소한 반나절은 쉬어야 움직이기 편할 것이다.

그러나 혈랑단은 달랐다.

무공 수위는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체력 하나만큼은 사음교의 전투 부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그들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익힌 무공 자체가 회복에 특화된 무공으로, 팔다리가 날아가도 끝까지 적을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종류의 사공(邪功)이었다.

게다가 후계자 중 하나인 명극이 직접 선정한 만큼 수준급의 전투력도 갖추고 있었다. 말이 부대지, 천이백 병력이라면 어지간한 대문파의 병력을 훌쩍 넘는 숫자였다.

“확실히 대륙 경치가 남다르단 말이지.”

명극이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답지 않게 들뜬 얼굴이었다. 전투가 코앞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종남을 무너트리고 나면, 당분간 거점을 여기로 잡아야겠군. 아주 마음에 들어.”

그때, 하복이 명극에게 다가와 공손히 보따리를 내밀었다.

“소주. 이것을.”

명극이 손을 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밑의 것들에게 나눠 줘.”

“그래도 되겠습니까?”

“대지의 충만한 기운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괜찮으니 조장들에게 배분해. 녀석들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피해가 최소화될 거야.”

“알겠습니다.”

전투에 앞서 영양가가 높고 소화가 빠른 음식들을 준비했다. 물론 대부분이 말린 것들이었다.

명극에게는 그것도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차원이 다른 경지에 노니는 분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나는 과연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는지.’

혈랑단주로서, 사음교에서도 제법 입지가 높은 그였다. 휘하에 천이백 병력을 두고 있는 부대의 수장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러나 하복은 이 경지에 도달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십 년 동안 전투 능력은 꾸준히 성장했지만, 한계를 뚫고 하늘로 오르지는 못했다.

벌써 오십이 넘은 나이이니만큼, 이 경지를 깨부수고 비상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유용한 충신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호칭은 소주(小主)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주군으로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훗날 명극이 후계자들을 제치고 교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신은 일등 공신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 전투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다행이라면, 적들이 혈랑단의 움직임을 눈치채지는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차근차근 준비해 온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단주인 그가 직접 사음교의 높으신 분께 건의하여 준비한 사항이었다.

본래라면 크게 의미가 없는 전술이었지만, 사천의 낙원소가 무너진 순간부터 혈랑단이 준비한 전술의 중요도는 엄청나게 올라갔다.

‘섬서를 뚫으면, 그때부터 파죽지세의 공세가 이뤄질 터.’

하복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최선두에서 후계자와 함께 숱한 공로를 이룬다면, 설령 소주께서 교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나의 입지는 확고해질 것이다.’

그렇게 하복이 미래를 상상하며 단원들을 다독이고 있을 때였다.

“……흐음.”

대자연의 기운을 한껏 끌어모아 진기를 회복시키던 명극은, 문득 묘한 기분을 느꼈다.

‘뭐지?’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

정확하게 자신만을 보고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자신을 비롯한 혈랑단 전체를 주시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

명극의 눈이 진지해졌다.

적어도 그의 기감에 걸리는 고수는 없었다. 즉, 근방에는 이 시선의 주인이 없다는 뜻이었다.

‘착각인가?’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알기로, 섬서에는 음제를 제외하고 이 경지에 오른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스스로를 숨긴 채 독야청청하는 재야의 고수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애초에 거기까지 염두에 두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니면 술법의 일종……?’

명극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기분 탓이겠지.’

흥분한 만큼 예민해지기도 했다.

자신의 기감이 더듬지 못할 만큼 먼 곳에서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명극은,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 뒤를 돌아보았다.

‘혈랑단.’

천이백 혈랑단의 전력은 무림의 대문파를 압도할 정도다.

그만큼 전투적이며, 기세도 살벌하다. 살기를 드러내지 않을 때도 어지간한 고수들은 위압감 때문에 다가오지 못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그 거친 삶의 분위기, 습관처럼 몸에 밴 살의(殺意)가 혈랑단원들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겠지.’

명극의 눈이 깊어졌다.

‘섬서 땅에 나보다 강한 고수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하필 이 시점에 내 감각도 무시하고 이곳을 주시할 만한 놈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게 무공이든 술법이든.’

명극은 비슷한 수준의 다른 고수들보다 상단전 활성도가 유독 뛰어난 이였다.

그래서 직감이 뛰어났고, 기감도 동급의 고수보다 훨씬 더 예민했다. 어떨 때는 느끼는 감정이 예지에 가까운 공능을 발휘할 때도 있었다.

사음교주가 직접 그를 가르치려 한 것도 그러한 재능 덕분이었다. 무재(武才)도 무재지만, 선천적으로 발달한 상단전 덕분에 닥쳐오는 위협을 빠르게 읽어 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찝찝하군.’

들떴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차오르던 흥분은 냉정함으로 바뀌었고, 회복된 진기는 순식간에 전신을 휘돌며 감각에 날을 세웠다.

우우우웅.

단전이 진동하며 진기의 회복 속도를 최고조로 올렸다.

“혈랑단주.”

“예, 소주.”

“천천히 주변 좀 둘러보면서 가겠다.”

“예?”

“신호하면 출발토록 해. 만일을 위해 내가 첨병 역할을 해 주지.”

하복은 당황했다.

“소, 소주. 그러실 필요는…….”

명극이 하복을 돌아보았다.

순간 하복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주의 명을 받듭니다!”

다시 고개를 돌린 명극이 천천히 걸었다.

그에게는 천천히 걷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범부가 전력 질주를 하는 것보다도 빨랐다.

훅!

순식간에 혈랑단과 수백 장 거리가 벌어졌다.

전설상의 축지성촌(縮地成寸)이 이와 비슷할까. 너무나도 높은 보법의 경지가, 평범한 보행에 놀라운 속도를 부여했다.

스르륵! 스르르륵!

나아가 보법에 의지를 두니, 걷는 행위는 그대로였지만 속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

파라라라락!

굉장한 속도에 옷자락이 펄럭였다. 어지간한 절정고수가 신법을 펼치는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놀라운 무공, 대단한 깨달음이었다. 성천의 고수라도 쉽게 구현하기 힘든 무공이었다.

그것은 명극이 성천의 고수보다 강해서는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크게 개방된 그는 애초에 이룩한 무공 자체가 남들과는 달랐다. 더 신비롭고, 더 신통(神通)했다.

무공보다는 오히려 술법(術法)에 어울리는 재능을 타고난 이. 실제로 그는 사음교주의 허락하에, 배운 무공을 술법과 결합하여 새로운 무학을 창조해 내기에 이르렀다.

지금 그가 보여 주는 보법이 바로 스스로 창조해 낸 여러 무공 중 하나인 착공비보(捉空秘步)였다.

스르르륵.

얼마나 전진했을까.

막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던 명극이 걸음을 멈추었다.

훅!

등 쪽에서부터 강한 바람이 불었다. 보행을 멈추자, 공기의 압력이 사라지고 등허리가 시원해졌다.

명극이 뒤를 돌아보았다.

높은 곳에 올라서자, 저 멀리 떨어진 혈랑단이 보였다. 너무나도 멀어서 극도로 안력을 집중해야 보일 정도였다.

‘삼십 리라.’

땅을 밟으면서 대지에서 올라오는 음기를 빨아들여 단전을 자극했다. 오히려 걸어가면서 진기 회복이 더 빨라진 것이다.

반면 번뜩이는 기감은 다소 줄어들었다. 착공비보와 함께 진기 회복을 극대화하면서, 감각의 예민함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묘한 시선은 떨어지질 않는군.’

상단전에 힘을 극도로 실었다 해도 지금과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맞나?’

정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고수가 있어 이곳을 주시하는 중이라면, 자신 때문이 아니라 혈랑단의 존재가 정보를 알려 주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공기 중에 묻어 나오는 살의. 표적이 된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압박감 등으로.

무한의 경지를 열고 대자연의 의지와 접촉한 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영역에서조차 극한의 감각을 단련한 이가 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닐 테니까.

‘정말 그렇다 해도, 계속 들여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무한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의 상단전에도 한계는 있다. 그런 능력을 시도 때도 없이 개방한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 신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혼란스럽군.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그때였다.

‘……?!’

명극의 눈이 번쩍였다.

‘사라졌다.’

불쾌함을 유발하던 묘한 시선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꿈결과도 같았다. 막상 이렇게 되니, 정말 자신이 예민해서 괜스레 방정을 떤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상하군.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나를 포착했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집중하게 되는…….’

순간, 명극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성천급 고수가 존재한단 말인가?’

설마 음제가?

‘천하의 음제라 하더라도, 아니 권신(拳神)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나를 찝찝하게 만들진 못할 것이다. 차라리 검선(劍仙)이라면 모를까.’

불가의 무공과 도가의 무공은 비슷하면서도 매우 달랐다.

도가 무공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검선 탁무자가 이쪽의 공격을 예측하였다면, 수백 리 밖에서도 신통한 능력을 발휘, 위기의 순간을 포착하여 주시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불안하다.’

우우우우웅!

명극의 동공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점점 불안해져.’

그때였다.

쿵!

저 멀리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리, 종남산 방향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한 줄기 메아리가 있었다.

스르르륵.

푸른 종남산의 나무들은 이 날씨에도 나뭇잎들이 제법 풍성했다. 그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기묘한 합주를 만들었다.

쿵! 우지끈!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야 저 소리의 정체를 알겠다. 산 너머, 거대한 나무들이 무너지며 내는 굉음이었던 것이다.

“……!”

명극이 발산하는 기도가 점점 날카롭게 조여졌다.

쿵! 쿠궁! 쾅!

거대한 공성추가 질풍처럼 대지를 휩쓸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소리도, 거친 기세도, 막강한 전의(戰意)도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는, 그러나 명극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흐른 뒤.

퍼어엉!

맞은편 봉우리 꼭대기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명극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직선으로는 십 리가 넘는 거리, 걸어서 도달하려면 이십 리가 조금 넘는 거리의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붉은 날개를 펄럭이는 뿔 달린 백호가, 뱀처럼 사나운 두 개의 꼬리를 들어 올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콰아앙!

명극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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