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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74화 (674/963)

674화. 반전(反轉) (6)

퍼억!

끔찍한 소리와 함께 덜덜 떨던 여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흐음.”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은 버틸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역시 착각이었나.”

여인의 몰골은 끔찍했다. 가슴 한가운데 심장 부근이 뻥 뚫려서 죽었는데, 마치 몸 안에서부터 뭔가가 뚫고 나온 것 같았다.

사내가 나른한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돌아 버리겠군. 이 많은 놈을 시험했는데도 누구 하나 진기(眞氣)를 버티지 못하다니. 중원이라고 떵떵거리더니만, 그 안에 사는 놈들이 이렇게나 허약할 줄이야.”

그때, 붉은 전포를 입은 초로인이 사내에게 다가왔다.

“소주(小主).”

“음?”

“삼호법 측에서 재차 연락이 왔습니다.”

사내, 명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연락?”

“소수 병력만 남긴 채로 도주 중이라 합니다.”

“……도주?”

명극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비웃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것인지 해석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뭘 얼마나 당했길래 도주까지 해? 자리도 못 지킬 정도였나?”

“첫 연락은 꽤 다급하게 보낸 것 같습니다.”

“이번은 다르다?”

“그렇습니다.”

“줘 봐.”

초로인이 명극에게 서신을 건넸다.

서신을 받아 읽은 명극이 고개를 저었다.

“손해깨나 봤구나 싶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군. 개박살이 났다고?”

“…….”

“말하자면, 저쪽에 삼호법을 패퇴시킬 정도의 고수가 있다는 뜻이로군.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힌 내용을 보니 음제는 아니고…….”

“음제는 절대 아닐 겁니다. 그럴 수가 없지요.”

화르륵!

명극의 손에 들린 서신이 황금빛 불꽃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상황이 꽤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렇게 두 번이나 서신을 보낼 정도면.”

“예. 그럴 겁니다.”

“그럼 이 짓거리는 더 이상 못 하겠군.”

초로인, 혈랑단주(血狼團主) 하복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명극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다. 한 마을이 명극과 혈랑단의 침공에 완전히 초토화된 것이다.

죽은 사람의 수만 오백을 헤아렸다. 개중에는 십 년도 못 산 어린아이도 있었다.

하복이 물었다.

“기(氣)를 버틴 놈이 하나도 없었군요.”

“그래.”

명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 각은커녕 열을 세기도 전에 죽어 나자빠지더군. 하나같이 허약하기 그지없어. 버티기만 하면 사음의 위대한 전사로 받아 줄 생각이었는데.”

“…….”

“됐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 함부로 손을 쓰면 안 될 것 같아. 우리가 대륙을 점령하면 우리에게 공물을 바칠 놈들인데, 수를 너무 줄여 놔선 안 될 일이지.”

하복이 고개를 숙였다.

“소주께서는 능히 사음의 차세대 신이 되실 것입니다.”

“그래야지.”

명극이 몸을 일으켰다.

“단원들은 다 쉬었나?”

“그렇습니다.”

“내일 해가 지기 전에 종남 인근에 도착할 수 있도록 체력 관리들 잘하라고 해. 해가 넘어가면, 그 즉시 공격할 거야.”

“예.”

“이각 후에 움직이자고.”

“한데 소주.”

“왜 그러나?”

“도주하는 삼호법과 금요조는 어떻게……?”

명극이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다 족쳐. 실패한 머저리들을 살려 둘 이유가 있나?”

* * *

“호오.”

패율이 나직이 감탄을 뱉었다.

“절경이라고까지 할 건 없지만, 참 괜찮은 산이로구만?”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종남산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같은 섬서에 있지만 화산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화산이 깎아지른 듯 날카롭고 단호한 느낌이라면, 종남은 안정적이고 평안한 느낌이었다.

사방에 나무가 그득하여 공기도 굉장히 좋았다. 적당히 높으면서도 왠지 부담스럽지 않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광경이었다.

“산이 이렇게나 좋은데, 그 안에 사람은 그렇게나 고집스러울 수 있구먼.”

패율이 말하는 사람은 바로 여광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절간에서도 살인마가 나는 세상입니다. 어디서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배우느냐가 중요한 법입니다.”

“아무리 제대로 배워도 악랄한 놈은 난다…… 허, 그런 걸 보면 장문 사형이 나를 어지간히 별종 취급한 게 이해가 가는군.”

“그렇습니까?”

“창산(蒼山)에 와 본 적 없냐?”

“글쎄요.”

“나중에 한번 와 봐라. 여기보다 훨씬 보기 좋아. 날씨는 좀 꿉꿉하지만.”

그래도 점창의 본산이라고, 목소리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피식 웃은 연호정이 발로 땅을 툭툭 쳤다.

“일단 가시죠. 장문인은 없어도 어른은 있을 겁니다.”

“괜찮을까? 죄다 그 늙은이 같으면 어쩌지?”

“그럼 두들겨 패서라도 전열을 정비하게 해야죠. 지들이라고 그냥 당하고 싶겠습니까?”

“커험! 진짜로 그럴 거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가시죠.”

파아아앙!

산을 타 넘는 두 사람의 신법은 빠르고도 빨랐다.

연호정이 패율을 바라보았다.

“선배.”

“왜?”

“근래 성취가 있었습니까? 예전보다 움직임이 좋은데요.”

패율이 투덜거렸다.

“염병, 그런 말을 한참 후배한테 듣게 되었다니, 내 신세도 기구하다.”

“정말 성취가 있었군요?”

“신법 공부를 따로 한 적은 없어. 그냥 관일공을 연마하다가 얻은 깨달음을 신법에도 녹였을 뿐이야.”

“대단하십니다.”

“이런 걸로 대단하다고 말하면, 지금 네 경지는 뭐라고 표현해야 되는 거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됐다. 나중에 시간 나면 칼부림이나 한판 하자.”

“멀쩡하시다면요.”

“왜? 죽을까 봐?”

“글쎄요…… 위험하긴 위험할 겁니다.”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많이 위험할 것 같으냐?”

“손해 본 병력이 물러나고, 새 병력을 불러왔습니다. 못해도 기존 병력에 준하는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겠지요.”

“음.”

“말하자면, 새로 종남을 치러 온 놈들 중에 저와 비슷하거나 더 강한 놈도 있을 거란 뜻입니다.”

패율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지금의 연호정보다 더 강한 고수라면 역시나 성천급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이라도 음제 선배를 부르는 게 낫지 않겠냐?”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고, 애초에 지금은 찾기도 힘들 겁니다.”

“너보다 강하다면 성천급이잖냐.”

“그건 아니지요.”

“무슨 말이냐?”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몰랐…….”

말을 하던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저도 모르게 흑암제 시절을 얘기할 뻔했던 것이다.

무의식중에 나온 말, 패율을 그만큼 편하게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전에는 삶에 치여서 몰랐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무극에 입문한 자와 성천의 차이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요.”

“언제는 종이 몇 장 차이라며?”

“태산보다 높고 대륙 땅덩어리만큼 넓은 차이입니다.”

“말이 참 왔다 갔다 한다?”

“그냥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다는 겁니다. 당장 음제 선배를 보십시오. 살기에 미쳐 광인이 될 뻔한 저를 피리 소리만으로 구해 주셨습니다.”

“으음…….”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게 아닙니다. 이룬 경지가 다르고, 깨달음의 깊이가 다릅니다.”

“그 정도였나.”

“순간의 깨달음이라고 한다면야 저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다만 그 깨달음을 무시하고 무공의 출력만 상승시키느냐, 발전은 느리더라도 깨달음과 함께 모든 것을 손에 넣느냐의 차이입니다.”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군. 결국 같은 거 아니냐? 깨달음을 얻어야 무력이 강해지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확실한 건, 저와 싸웠던 놈의 무공을 봤을 때, 지금 삼교는 성천급 강자를 중원에 급파하진 않았다는 겁니다. 애초에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왜?”

“중원의 성천이 나설 경우, 그 대항마가 될 고수들을 남겨 둬야 하니까요.”

“……!”

“물론 제 추측일 뿐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죠.”

“뭐든 확실한 게 없다…… 참 힘들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들의 전력이 어쨌든, 저만한 강자가 둘 이상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너 아직 완전히 정상이 아니잖아. 자신할 수 있겠냐?”

“언제는 손해 안 보고 싸운 적이 있었답니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적어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붙들어 두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저리 자신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패율은 문득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연호정. 두 눈빛에 완고함이 가득했다.

패율은 새삼스레 느꼈다.

‘대단한 놈이야.’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느낀다. 아마 앞으로도 더더욱 놀라게 될 것이다.

만약 이놈이 아니었다면, 지금껏 삼교가 벌였던 온갖 귀계가 성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중원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무너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를 거야. 자신들이 이놈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패율이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놈 때문에 나도 많이 바뀌었어.’

본래 그의 성격이라면 이런저런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싸움터가 아니라면 직접 움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연호정의 부탁 아닌 부탁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중원 무림이 입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대비와 협행을 어느새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패율은, 그런 자신이 그리 싫지 않았다.

“고맙다.”

“예?”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됐으니까 달리자. 얼마 안 남았다.”

파아아앙!

패율이 속도를 높였다. 어느새 연호정보다 더 빨리 달려, 저 멀리 앞서가는 그였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기색인데?”

반 시진 후.

두 사람이 종남에 도착했다.

“뭐, 뭐라고?”

홍적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지금 종남이 표적이라고 하셨는가?”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화로운 종남산.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무수히 많은 도관이 보였고, 그 도관들 사이를 잇는 길은 호화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검과 도를 익히는 문파가 아니라 속세의 문파처럼 보인다. 저런 화려한 모습이 오히려 종남산의 공기를 퇴색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연호정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여광 대장로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직 오지 않으셨네. 휘하 검사들도.”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즉 와서 장로들과 논의라도 해야 했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행태다. 오히려 여광의 존재가 이곳에 있어, 제대로 설득이 되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그였다.

뭐가 되었든, 지금은 할 일을 해야 했다.

“화산의 전전대 장로님, 화검자 어르신께서 화산에 병력을 요청하러 떠나셨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근시일 내로 적이 쳐들어올 겁니다.”

“……!!”

“전열을 정비해 주십시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어린 도사들은 모두 하산시키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

말을 하려던 홍적이 순간 이를 악물었다.

“그 전에.”

“……?”

“자네 말, 사실인가?”

“예?”

“사실이냐고 물었네. 자네는 일전에 우리가 앞을 막았을 때, 무슨 임무인지를 말해 주지 않았어. 말하자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뜻일세.”

패율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답답함에 욕이라도 한 바가지 먹여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때, 연호정이 손으로 패율을 막았다.

“이해합니다. 저도 종남을 모르고, 종남도 저희를 모르지요.”

“그렇다네.”

“다만, 저희가 무림맹과 묵룡부의 허가 아래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

“설마하니 우리가 종남에 해를 끼치겠습니까? 설령 그럴 의도가 있다 해도, 적이 쳐들어온다고 전열을 정비하라고 말해 주는 방법 따위를 쓰겠습니까?”

홍적의 얼굴이 붉어졌다. 연호정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종남이 무너지면, 만에 하나 적들이 섬서로 치고 들어왔을 때 화산 홀로 그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중원에겐 두 문파 모두 중요합니다.”

“…….”

“한시가 급합니다. 서둘러 준비해 주십시오. 종남을 돕기 위해 이곳저곳에 연락을 취했습니다만, 얼마나 많은 아군이 때를 맞춰 올지는 모릅니다.”

홍적이 이를 악물었다.

“알겠네. 잠시만 기다리게. 장로 사형들께도 이 사실을 전하겠네.”

“알겠습니다.”

홍적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패율이 분통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지키러 와 줬는데도 저따위야? 차라리 홀로 감당하라고 할 것을!”

“참으십시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소매에 가려진 그의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참아야 합니다. 우리의 적은 종남이 아니에요.”

적어도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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