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3화. 반전(反轉) (5)
쾅!
주루의 벽을 후려치는 여광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 거친 호흡 탓에 욕설도 뱉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충혈된 두 눈에는 분노와 수치심만이 가득했다.
검사들은 침묵한 채 여광을 바라보았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사문의 어른이 모욕 아닌 모욕을 당하고 왔다. 어떠한 위로도 그를 진정시키긴 어려울 것이다.
아니, 그것이 과연 모욕이기나 할까.
종남 검사들의 얼굴 역시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천하제일을 논하는 고수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문이 자랑하는 어른이, 감히 건드려선 안 될 존재에게 질책을 당했다. 이러한 경험을 어디 가서 겪겠는가.
게다가 음제 하은교의 발언은 그냥 흘려듣기에는 지나치게 정론에 가까웠다.
검사들이 흔들리는 이유였다. 그들의 눈에는 고집스러운 어른의 모습보다, 무림이 추앙하는 절대고수의 정론이 더더욱 인상 깊었던 것이다.
그들이 젊어서일까? 그래서 음제의 발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광과 달리, 무엇이 옳은지 고뇌할 수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물론, 연호정 일행도 모르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하은교는 여광은 물론 종남 검사들에게 호통을 칠 때, 목소리에 강력한 의념을 실었다.
고집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은교는 제 목소리에 절대고수의 신념을 담았다.
말하자면 심검(心劍)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베어 자신의 생각과 뜻을 심어 놓는 것, 어떤 고수도 쉽사리 행할 수 없는 지고의 경지였다.
다만 여광의 고집은 지나치게 세서 먹히질 않았고, 검사들은 그처럼 고집이 세지 않아 흔들리고 있었다.
젊어서가 아니라, 그들 역시 자신들의 행동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것이다.”
검사들은 단체로 깜짝 놀라 여광을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고민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예?”
여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감히?!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하겠느냐! 사문의 존장이 앞에 있거늘 어찌 그리 넋을 빼고 있는 것이냐? 너희 사부들이 그리 가르쳤느냐!”
“죄, 죄송합니다.”
검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여광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린 사질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여광이 외쳤다.
“제아무리 강호제일을 논한다 한들, 너희는 종남의 문인이다! 외인의 말에 그리 쉽게 흔들려서야 어찌 지고의 검심(劍心)을 얻겠느냐! 종남의 가르침이, 고작 외인의 한마디에 흔들릴 정도로 얕고 가벼운 것이었더냐!!”
검사들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여기서 더 혼을 내 봤자 무의미하다. 그저 자존심 상한 노인의 발악에 불과할 뿐이다.
여광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종남에 입문한 후, 수년 동안 조롱을 받았다. 그 조롱을 독기와 실력으로 없애 버린 그였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모욕의 세월, 그 뒤로는 영광과 찬양만이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온 그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에게 엄청난 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질들이 보는 앞에서.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며 불같은 울화를 활화산처럼 만들었다.
“어리석은 놈들! 어리고 부족해도 종남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라면 요언(妖言)에 미혹되지 말아야 할 터! 돌아가면 너희 모두 수련동에 갇힐 줄 알거라! 그 썩어 빠진 정신을 다스릴 때까지 절대 검을 쥐어선 안 될 것이다!”
그때, 검사 한 명이 떠듬떠듬 말했다.
“저, 사백님.”
“뭐냐!!”
“저희의 잘못으로 인해 심기가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검사가 한숨 쉬듯 말을 이었다.
“저희끼리라도 화산을 도우러 가는 것이 어떨는지요?”
여광의 눈이 불을 뿜었다.
“뭣이?!”
“화, 화산은 작게는 이웃이요, 크게는 구대문파로 얽힌 우군 아니겠습니까. 정체 모를 적이 화산을 급습한다는데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시끄럽다! 이웃이건 뭐건, 원칙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것이 아니야! 네 말은 설마하니, 장문인의 권위를 무시하고 우리끼리 일을 벌이자는 것이더냐?!”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을 들어 보니 상황이 다급한 것 같은데…… 이대로 있다가 자칫 화산이 큰 피해라도 본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겠지!”
“……예?”
여광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무지한 인간들이 종남보다 화산이 위라며 수군거리고 있다. 종남이야말로 섬서의 패자이자 천하제일검문이거늘, 화산 때문에 저평가를 당하고 있느니라.”
“……?!”
“이 기회에 화산이 적당히 힘을 잃는 것도 나쁘지 않아. 당장은 마음이 쓰리겠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그것이 종남을 위해 나은 일일 것이다.”
검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여광의 말은 도를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것이었다. 종남의 위세 때문에 타 문파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자니? 아무리 경쟁 관계인 화산이라도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다른 검사 한 명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검을 쥐고 휘두르는 이유는 협(俠)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여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들이 이제는 존장의 말에 토를 다는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문파의 이익을 위해 선량한 이들이 화를 입는 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뭐?”
“…….”
“편협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그 검사는 꽤 용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놈 봐라?”
여광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검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화산의 수뇌부들이 썩었다고 생각해 보지요. 그러나 어리고 젊은이들은 어쩝니까? 화산은 크고 넓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동(道童)들도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만큼은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가운 눈으로 검사를 노려보던 여광이 몸을 돌렸다.
“시끄럽다. 너희는 지금 당장 산으로 돌아가거라. 장로들에게는 따로 연락을 취할 것인즉, 곧장 수련동으로 들어가 마음부터 다스리거라.”
“그럴 수 없습니다.”
여광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검사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검사 몇몇이 아닌 그들 전부가 날카로운 눈으로 여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여광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큰 충격을 받은 모습들이다. 동시에, 자신을 보는 사질들의 눈빛에 은근한 혐오의 빛마저 깃들었다.
그 충격적인 상황에, 여광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폭발하는 자격지심, 상할 대로 상한 자존심 때문에 말이 지나치게 심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사상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 말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과격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발언은, 젊은 검사들이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충혈된 눈으로 검사들을 둘러보던 여광이 한숨 쉬듯 말했다.
“너희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너희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
“하나 이것은 어른들의 일이다. 아직은 너희가 받아들이기에 힘들 수밖에 없는 일인즉, 이만 산으로 돌아가거라.”
“싫습니다.”
여광의 눈이 흔들렸다.
‘그럴 수 없습니다.’가 아니다. ‘싫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 미묘한 변화가 검사들의 마음이 크게 바뀌었음을 증명했다.
검사들의 수장, 혁은이 말했다.
“종남의 가르침은 곧 세상의 가르침과 닿아 있습니다. 세상의 가르침은 단순하고도 분명하지요.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도울 힘이 있다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도 움직이는 것입니다.”
“혁은!”
“아무리 대장로님이라도 오늘의 발언은 지나치셨습니다. 저는, 그리고 우리는 종남에서 그리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광은 답답함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너희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 것이라 하지 않았더냐! 세상은 그런 순박하기 그지없는 가르침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럼 그렇게 가르쳐 주셨어야지요.”
“뭐?”
“세상은 거칠고 흉흉하니 명성을 빼앗아 가는 이웃의 아픔을 무시하라고, 어린아이라도 그 집단에 속해 있다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어야지요. 그것이 정도(正道)라고 가르쳐 주셨어야지요!”
“이, 이놈!”
“대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이 과연 정도입니까? 그것이 정녕 올바른 것입니까?”
여광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제는 살아온 세월이 사십 년도 더 차이 나는 어린 사질들에게도 모욕당하고 있다. 애써 다스렸던 감정이 다시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이…… 버릇없는 놈들을 보았나! 너희가 이제는 기사멸조의 대죄를 짓는구나!”
“협을 무시하고 이득만을 생각하는 존장의 명을 따른다면, 기사멸조의 죄는 저지르지 않을지언정 우리가 그리도 혐오하던 흑도 사파의 악도들과 같은 부류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 뭐라고?”
“기사멸조의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협(俠)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혁은의 목소리에는 허망함과 함께 강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사들 모두의 눈빛이 혁은과 다르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여광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두 번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산으로 돌아가거라! 가서 수련동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거라! 돌아가서 너희 하나하나 단죄를 내릴 것이다!”
“저희의 죄는 죽음으로 갚지요.”
“……?!”
“화산을 도우러 갈 것입니다. 화산의 도사들이 당하기 전에, 그 사이한 놈들은 종남 검사들의 검부터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놈들!!”
혁은이 외쳤다.
“모두 소매를 찢어라! 지금 이 시간부로 우리는 화산으로 간다!”
찌이이익! 찌이이이익!
종남의 검사들 모두가 좌측 소매를 뜯어냈다.
왼팔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들. 그 옛날 종남의 검사들이 전장에 나갈 때 서로를 인식하기 위한 행위였다.
혁은이 여광에게 고개를 숙였다.
“살아 돌아온다면, 그때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이…… 이!”
“가자.”
파아아앙!
혁은과 종남 검사들 삼십여 명이 화산을 향해 나아갔다.
여광이 버럭 외쳤다.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 네놈들은 이제부터 종남의 문인이 아니야!!”
* * *
“화검자 노선배님과 같이 보낸 거냐? 철기단주를?”
“그렇습니다.”
패율이 피식 웃었다.
“아주 골고루 써먹는구나. 우리가 네 심부름꾼이라도 된 것 같다.”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됐고, 그래서 너랑 싸운 그놈은 어디로 갔다더냐?”
“모릅니다. 사람을 나눠 보냈다고 들었는데, 그중 어느 쪽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라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상황이라니?”
“대리전을 치를 병력을 불렀답니다.”
“그리 쉽게 술술 불더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허어.”
“도망친 놈들에게는 철장개 장로가 사람을 붙일 겁니다. 우리는 종남으로 가야 해요.
“한데, 꼭 이래야 하냐?”
“뭐가요?”
“우리의 임무는 음제였다. 어떤 형식으로든 그 임무가 끝난 지금, 굳이 이 전투에 끼어들 필요는 없어.”
도와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싸움이라면 패율이 더 원하는 바였다.
다만, 일행은 전투가 아닌 특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마땅한 활용도가 있는 조직인데, 이런 전투에 끼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당연히 싸워야지요.”
“그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눈에 보이는 이들부터 지키는 것이 곧 우리 모두의 고향을 지키는 일입니다. 양 부주가 이 정도 융통성도 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 맞는 말이다.”
“슬슬 출발하시죠.”
“오냐.”
두 사람이 종남산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