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72화 (672/963)

672화. 반전(反轉) (4)

하은교의 거처에서 내려온 연호정.

기다리던 황석태가 물었다.

“먼저 가셨는가?”

“그래.”

“이해할 수 없군. 사음교의 본진을 찾기도 힘들 테고, 찾는다 해도…….”

황석태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방법은 많네. 당장 개방이나 무림맹, 묵룡부의 도움을 받아 이십여 년 전에 버린 자식의 생존 여부를 조사하는 게 더 낫겠지.”

“내 생각도 그와 같네.”

“결과만 놓고 보면 분명 그게 좋겠지.”

“이성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행동이란 말인가?”

“그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선배님은 한 번도 어머니로서 나서 본 적이 없었어. 물론 자식을 보고 싶은 마음에 사음교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휘둘린 것에 불과해. 안타까운 것과는 별개로.”

“…….”

“자식과 다시 만날 수 있든 없든, 어머니로서 목숨을 걸고 행동하려 하고 있네. 바보 같은 길이지만, 동시에 숭고한 길이지.”

“숭고하다…….”

“스스로 하늘이 내린 운명과 숙명을 느낀 사람의 행보라네. 거기에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라는 말 따위 의미가 없지.”

“늑대에게 채식이 좋다고 나물을 권하는 일과 비슷한가?”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답지 않게 황당한 비유를 다 하는군.”

“하지만 내게는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진다네. 뭐가 어찌 되었든, 본인으로 인해 사음교가 무서운 병기를 얻었어. 그것으로 얻을 피해는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서 내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신 것이겠지. 선두에서 삼교의 계책을 봉쇄하고 있으니까.”

연호정은 하은교의 말을 떠올렸다.

‘자네에게 고맙고 또…… 미안하네.’

하은교도 알고 있는 것이다. 본인 때문에 연호정이, 일행이, 나아가 세상이 조금 더 힘들어졌다는 것을.

미망을 깨우쳐 주어서 고맙고, 책임지지 못하고 떠나 버린 일을 떠안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발생하는 파급 효과.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아. 고생하는 사람만 고생하는 거지.”

“…….”

“그걸 알아도 선배를 막을 순 없었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아는 사람을 어찌 막겠나. 더하여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셨으니, 그 정도는 우리가 책임져 보세나.”

황석태가 입맛을 다셨다.

“그 정도 짐을 떠안는 거야 별거 아닐세. 그냥…… 나는 자식을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

앞으로도 자식을 가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그와 같은 상황을 영영 이해하지 못하리라.

연호정이 자신의 뺨을 툭툭 때렸다.

“이제 우리 할 일을 하자고. 아, 그 전에 량이에게 선배님 제자를 맡아 달라고 해야겠군.”

“놔두고 가셨나?”

“데리고 갈 만한 길이 아니지. 당분간 우리와 함께해야 할 수도 있겠네.”

“그렇군.”

“자, 그럼.”

연호정의 눈이 한순간 싸늘해졌다.

“치고 들어가 볼까.”

“음? 치고 들어가다니? 어디로?”

* * *

“빌어먹을.”

나직한 욕지거리와 함께 한숨을 내쉬는 신기자의 얼굴은 전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

파멸적인 살기에서 벗어난 신기자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정상적이었기에, 오히려 근심이 커졌다.

‘이로써 나나 삼호법의 자격은 박탈될 것이다. 아니, 살아서 돌아간다 하더라도 목숨이 위험해.’

신기자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서 자존심을 부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신황조끼리 공명했으니 지금쯤…….’

신황조는 사음교 최고위 간부들이 사용하는 전서응이었다.

말이 전서응이지, 거의 영물에 가깝다. 그 크고 무거운 몸체로 엄청나게 빠르고 복잡한 비행이 가능하며, 부리와 발톱은 바위도 가를 정도로 단단하고 예리했다.

사음교의 비술(祕術)로 만들어진 영물이기에 유사시 전투에도 사용한다.

그리고 그 귀물 중의 귀물인 신황조를 다루는 사음교 최고위 간부가 지금 중원에 있었다.

‘명극(明剋).’

명극은 사음교주가 직접 키운 후계자 중 한 명이었다. 호연종처럼 치열한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사음교주가 그 재능을 인정하여 손수 가르친 제자인 것이다.

경험에 있어선 호연종에게 뒤처질 수밖에 없지만, 사실상 그런 비교는 무의미했다. 사음교주가 인정한 재능이라면, 복잡한 경험 따위가 없어도 어떤 상황에서든 최고의 모습만을 보여 줄 테니까.

당대 사음교의 후계자는 총 다섯이었다.

그중 셋은 교주가 직접 키웠고, 둘은 반신혈족으로서 뜻하지 않게 재능을 보여 후계 싸움에 뛰어들 만한 역량을 과시한 이들이었다.

호연종이 바로 후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직접 이곳까지 왔다. 후계 싸움에서 앞서가기 위해, 구파의 하나를 무너트리는 공(功)을 세우고자 함이었다.

한데 시작하기도 전에 적과 교전 중 전력 손실을 불러왔다.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이 지경이라…… 내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구나.”

신기자가 산음신탄을 만지작거렸다.

세상은 어두웠고, 이곳 주변에는 금요조 오십 명만이 남았다. 남은 그들은 이제야 살기에서 벗어났는지 제각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기자가 한숨을 쉬었다.

‘죽음이 다가왔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는 없어.’

그가 한옆에 둔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쿵!

금요조원들이 신기자를 바라보았다.

신기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정신들 차렸으면 슬슬 금요폭음진(金曜爆音陣)을 준비해라.”

금요폭음진은 금요조가 자랑하는 금요살진에, 음제에게 받은 음공을 합쳐 만든 희대의 절진이었다.

굉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진법이지만, 그 대신 유지 시간이 이각에 불과했다. 공격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다면 그에 반절인 일각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조원들 모두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다.

즉, 금요폭음진을 펼치라는 것은 이들 모두에게 죽음을 명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우리가 신의 품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가는 것뿐이야. 미리 가서, 현세의 존귀한 분들이 오실 때까지 신계(神界)를 더 청결케 만들어 보자.”

목숨에 미련 따위는 없다. 돌아가서 자리를 빼앗기고 목숨의 위협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스르륵.

금요조원들이 제각기 넓게 퍼져 위치를 잡았다.

위치를 잡은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품에서 붉은 단환을 꺼내 먹었다.

우우우우웅!

제대로 된 휴식도 없었고, 섭취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기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다.

신기자가 눈을 감았다.

그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게 아닌데도 금요조원들이 투선단(鬪仙丹)을 먹었다. 투선단은 내력을 배에 가깝도록 증폭시키는 마약이었다.

‘미안들 하다.’

신계로 가서 터를 닦자고?

웃기는 소리다.

신기자는 긴 세월을 살며, 사음교 특유의 말도 안 되는 신앙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다만 그 자리를 충성심과 책임감이 대신했을 뿐이다.

‘뭐가 되었든, 이승에서의 마지막 하늘이로군.’

달빛이 고왔다. 흩어진 구름 때문에 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맑지도 않은 하늘이라? 그거 참 너무하는군.

신기자가 눈을 감았다.

꾸루루룩.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는 그 소리가 참 거슬렸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하니, 거슬렸던 부엉이 울음소리도 어쩐지 듣기 좋았다.

‘잘 빠져나갔을까?’

그건 알 수 없다. 혹시나 해서 나름의 꾀를 부렸지만, 종남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니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죽어도 자네는 죽지 말게. 죽어도 한 방 제대로 갚아 준 연후에 죽게. 그래야 원통하지나 않겠지.’

그때였다.

꾸루루룩! 핑!

부엉이 울음소리와 함께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신기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침입자가 가까이에 들어왔다.

“모두 진을 발동해라!”

우우우우우우웅!

금요폭음진이 삽시간에 발동되며 일대의 풍경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막, 파랑을 일으키는 무형기가 진동을 발산하며 진의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진의 중추에 선 신기자는, 침입자가 어디에서부터 다가오는지를 포착했다.

“동벽(東壁)……!”

그때였다.

쾅!

신기자가 침입자를 포착한 순간, 침입자 역시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신기자가 버럭 외쳤다.

“모든 진력을 쏟아 내라! 동벽에 파산(破山)이다!”

위이이잉!

금요폭음진의 기막이 일렁인다 싶은 순간.

퍼퍼퍼퍼펑!

반경 삼 장이 넘는 무형의 충격파가 공간을 일자로 뚫고 나아갔다. 당연히 침입자가 돌진해 오는 동쪽 방향이었다.

콰콰쾅! 퍼펑! 콰르르릉!

나무와 돌이 부서지며 길쭉한 길이 생겨났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위력이었다. 윙윙 소리를 내는 충격파는 그 자체로 음속 이상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을 듯했다.

쿠르르르릉!

모든 것을 분쇄하는 음파의 공격 속.

누군가의 돌진이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침입자가 충격파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신기자의 눈이 빛났다.

“포착했다! 최고 출력으로 올려라! 일각 동안 최대의 피해를……!”

그때였다.

퍼퍼퍼펑!

주춤했던 침입자가 어느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순간 목표를 잃은 충격파가 그대로 나무와 돌을 깨부쉈다.

신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했어?!’

알아채고 피할 수는 있어도, 충격파에 걸린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니, 있긴 있다. 힘으로 그 충격파를 박살 내고 벗어나는 것이다.

‘설마 힘으로 벗어났다고? 이 많은 고수의 진기가 한데 집중된 그 진력을?!’

파라라라랑! 퍼억! 퍼억!

어디선가 날아온 두 자루 손도끼가 무자비하게 회전하며 금요조원들의 목을 날리기 시작했다.

방향 선회가 자유자재였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흑백의 쌍도끼가 삽시간에 금요조원 삼십여 명의 목을 날려 버렸다.

퍼억! 촤르르르르륵!

땅에서 솟구친 흑회색 철쇄가 신기자의 발목을 휘감고는 그대로 당겨졌다.

우두둑!

신기자의 발목이 부러졌다. 곧바로 철쇄를 내리쳤지만, 도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끊어지질 않았다.

그때였다.

훅!

신기자의 눈이 흔들렸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익숙하고 무시무시한 살기가 등줄기를 훑었다.

퍼어억! 퍼어어억!

사람의 육신이 통째로 분쇄되는 소리는 끔찍하다 못해 기괴하게 들렸다.

손도끼가 아니다. 신기자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조금 전 금요조원들의 목을 날려 버린 두 자루 손도끼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무언가가 조원들의 몸을 박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쾅!

벼락처럼 내리쳐진 거대한 도끼가 마지막 남은 조원의 몸을 쪼개 버렸다.

후두두둑!

하늘 높이 치솟은 핏물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신기자가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거대한 도끼를 견갑에 걸친 사신이 있었다. 왼손으로는 두 자루 손도끼를 겹쳐 들었고, 소매에서 나온 철쇄는 땅속을 지나 신기자의 발목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자구나.’

신기자는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벌써 저만큼이나 회복을?!’

훅!

촤르르르르륵!

신기자의 발목에서 풀려나온 철쇄가 어느새 연호정의 소매 안으로 쑥 들어갔다.

퍼억!

흑백의 손도끼가 각기 신기자의 쇄골과 허벅지에 박혔다. 도주를 막은 것이다.

“처음 보는군. 제정신으로는.”

쿵!

어느새 다가온 연호정이 신기자의 다리 옆에 통천부를 박았다.

신기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살기는 씻어 냈지만, 그때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며 잠잠해졌던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연호정이 담담하게 물었다.

“어디 갔어, 그 머저리 같은 자식은?”

“나, 나는……!”

“벌써 종남으로 갔어?”

순간 신기자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너희는 정말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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