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9화. 반전(反轉) (1)
“쿨럭!”
내상약을 닥치는 대로 먹고 통제 불가의 진기를 어떻게든 수습하여 내부의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신체는 쉽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방금처럼 울혈에 가까운 피를 토해 내는 게 전부였다.
‘빌어먹을!’
우우웅! 우우웅!
음황사기가 자꾸만 근육과 피부로 스며들려 한다.
내상도 심각했지만, 외상도 보통 심한 게 아니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육신이라도, 비슷한 수준의 고수가 휘두르는 중병에 수없이 찍혔다. 죽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문제는 그가 이런 상황에 처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숱한 전투로 사경을 헤맨 적은 많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적은 없었다. 진기가 갈피를 못 잡는 이유다. 어디에서부터 복구해야 할지 호연종 스스로도 확신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이이이익!
화상을 입은 왼쪽 다리로 음황사기가 스며들며 허연 연기를 뿜어냈다.
“크윽!”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극심한 고통도 이 악물고 참아낼 수 있었던 정신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헐떡이던 호연종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친……!’
함께 도주한 신기자와 금요조(金曜組) 조원들이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었다.
누구도 호연종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리를 끌어모은 채 덜덜 떠는 놈이 있는가 하면 기절한 놈, 거품을 무는 놈도 있었다.
누구 하나 정상이 아니었다. 생존 욕구로 어떻게든 빠져나오긴 했지만, 파멸적인 살기에 노출된 그들의 정신은 거의 파탄 직전이었다.
하물며 신기자 또한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무공에 재능이 뛰어나지 않을 뿐, 재주만큼이나 정신력도 강했던 그조차 넋을 놔 버린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이들 모두가 사음교의 심공(心功)을 연마한 이들이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하루 이틀 안에 본래의 정신을 회복할 것이다.
문제는 예상 전력에 공백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놈 도끼에 휩쓸려 죽은 아군만 오십이었다. 그나마 자신이 멀쩡했다면 몰라도, 이 정도 병력으로는 구파의 하나를 치기 어렵다.
그렇다. 이대로는 안 된다.
죽어도 임무는 성공하고 죽어야 한다. 그럼 최소한 영혼이라도 구제받을 수 있다.
나아가, 임무도 성공시키고 당장 죽지 않을 방법도 있긴 했다.
‘해야 하나?’
호연종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깃들었다.
‘빌어먹을, 정말 그놈을 불러야 한다고?’
그놈을 짓누르기 위해서 귀찮음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왔다. 구파 중 하나를 무너트린 공(功)이라면, 자신은 후계 구도의 새로운 파도가 되어 신세계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대로 퇴각하거나 작전이 실패하면, 그대로 재기 불능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사감을 접고 호적수를 불러야 하느냐, 목숨을 걸고 일전을 치러야 하느냐.
한 번 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치욕을 감수하느냐, 실낱같은 가능성에 목숨을 거느냐.
“……제길!”
호연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 왔다. 눈앞에 별이 번쩍거렸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신기자를 향해 걸었다. 절뚝거리며 걷는 신세가 정말이지 비참했다.
“늙은이.”
헐떡거리며 신기자를 부르는 호연종.
신기자는 호연종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호연종이 버럭 소리쳤다.
“늙은이! 정신 차려!”
쩌엉!
일갈에 얼마 안 남은 내공까지 실었다.
신기자가 퍼뜩 놀라 호연종을 바라보았다. 자세를 보니 당장이라도 도망칠 기세였다.
호연종은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신기자를 저렇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살기라니?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자신은 물론 병력 전체가 휩쓸렸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호연종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신황조(神皇鳥)를 부르시오.”
“……신황조?”
“빌어먹을! 그렇소! 신황조 말이오! 이 개 같은 섬서 땅 북부에 있을 거 아니오!”
순간 신기자의 눈이 커졌다.
“그, 그를 부를 생각인가?”
“그럼? 병신이 다 된 이 병력만으로 임무를 수행하겠소? 상대는 구파 중 하나요! 내가 멀쩡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어림도 없소!”
말을 하면서도 머리가 띵했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기자가 떠듬떠듬 말했다.
“그랬다가는…… 자네는 물론 우리도 무사치 못할 거야. 돌아가서 문책을 받게 될 거라고.”
“언제부터 문책 따위를……!”
호연종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의 신기자는 정상이 아니다. 본래의 그는 죽음이 두려워서 일에 지장을 줄 만큼 어설픈 자가 아니었다.
그 도끼 든 놈의 무지막지한 살기가 신기자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이틀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오겠지만,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호연종은 음황사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커다란 단전에서는 끊임없이 진기가 생성되고 있었지만, 진기는 생성되자마자 몸 곳곳으로 스며들어 치료에 박차를 가했다.
‘흐읍!’
잠시지간 시야가 컴컴해졌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한순간 내공을 손에 집약시킨 것만으로도 의식이 끊어질 것 같다. 호연종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후우우웅!
손에 모인 음황사기가 무서운 속도로 정제되었다.
거칠고 독하며 파괴적인 진기. 그 진기에서 어느새 음황의 특성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순수하고도 농밀하기 그지없는 무극의 힘이었다.
호연종은 그 손으로 신기자의 정수리를 눌렀다.
우우우우우우웅!!
순간 신기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치이이익!
그의 칠공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화재 장소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유사한 그것은 신기자의 상단전에 남아 있던 연호정의 살기였다. 극소량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신기자는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자의 상단전에 채워진 무극의 진기가 살기를 뽑아냈다.
‘독하다!’
호연종은 이를 악물었다.
잔존하는 살기의 양은 그의 손에 담긴 진기의 십분의 일도 안 되었다. 그런데도 바로바로 청소가 안 된다. 양은 적지만 밀도가 엄청나서, 사람의 정신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훅!
호연종의 손이 떨어지자 신기자가 각혈을 했다.
“우웨엑!”
토해 내는 핏물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번쩍!
신기자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자네!”
호연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신기자가 서둘러 그의 상체를 받쳤다.
“자네, 괜찮은가?”
호연종이 숨을 헐떡였다.
신기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이제는 의지로 의식이 끊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호연종의 입술이 달싹였다.
“신황조에게 연락…… 그놈을 불러야…….”
그 말을 끝으로 호연종은 기절해 버렸다.
* * *
동틀 무렵.
“후우.”
가부좌를 틀고 운공 중이던 강량이 눈을 떴다.
우우웅.
귀왕진기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다친 혈맥이 따끔거렸다. 검력에 휩쓸린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징조였다. 뻐근하기만 했던 상처가 이제는 따끔거린다. 내상과 근육은 거의 다 아물었고, 이제 피부와 혈맥만 정상으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굉장한데?’
강량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빨리 나을 상처가 아닌데.’
무종지벽을 돌파해서 그런가? 아니면 귀왕진기에 자신이 모르는 특성이 있는 걸까?
뭐가 되었든, 하루아침에 엄청난 속도의 회복을 이루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당장 검을 휘두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강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났나.”
한옆에 앉아 창을 닦는 황석태의 얼굴은 어제와 변함이 없었다.
“안 주무셨수?”
“조금 잤네.”
“체력이 좋소이다.”
황석태가 창날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공기일세.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게 오히려 정신에 무리가 가.”
그렇게 말하니 자신은 너무 태평했던 것 아닌가 싶었다.
강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패율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평상 위에서는 연호정이 아직도 운공 중이었다.
놀랍게도 연호정의 안색은 그 새에 훨씬 좋아져 있었다. 안색만 보면 그냥 정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량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극은 다 저런가? 하룻밤 새에 벌써 저만큼이나 회복해 놓다니.”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음제 선배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나.”
“누가 도와도 내 몸을 치료하는 건 나일 수밖에 없잖소.”
“그건 그렇지.”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말은 안 했지만, 그 멀리서까지 느껴질 만큼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연호정을 걱정했더랬다.
한데 지금 모습을 보니, 그때의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강량은 마음 깊이 안도했다.
그때였다.
“일어났나.”
“아, 선배님.”
강량과 황석태가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모옥에서 하은교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은교가 손을 저었다.
“인사는 되었네. 새삼스럽게 무슨.”
“아, 예.”
“그나저나 괜찮나, 자네?”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
“예. 아주 괜찮습니다만.”
“다행이구먼.”
강량이 어리둥절해할 때, 황석태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자네가 무아지경에 빠져 있을 때, 선배님께서 자네를 치료해 주셨어.”
“헉!”
강량은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성천의 강자가 자신의 몸을 직접 치료해 줬을 줄은 몰랐다.
하은교가 멋쩍게 웃었다.
“치료는 무슨. 그저 힘을 좀 실어 줬을 뿐이지. 다행히 자네는 연 대수보다 가벼운 상세더군. 반 시진도 안 되어 끝났어.”
“가, 감사합니다.”
“굳이 감사해할 필요 없네.”
하룻밤 신세를 진 것도 모자라 이런 큰 선물까지 주실 줄이야.
“그나저나 자네, 귀선검(鬼仙劍)의 후예인가?”
“예?”
귀선검이라니?
내심 당황스러워하던 강량이 일순간 눈을 부릅떴다.
“설마 저희 조부님을……?”
“맞군. 그 내공,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지. 누굴까 고민했는데 귀선검의 내공과 똑 닮았더군.”
귀선검 강평은 귀철검문의 전대 문주로서, 당시 흑도 제일의 검사로 불리던 불세출의 검사였다.
강량의 조부가 되는 사람으로, 유독 낭만적인 인생을 살다 죽은 걸로 유명했다.
“서, 선배님께서 저희 조부님과 뵌 적이 있으십니까?”
“봤다뿐인가? 손속을 나눠 보기도 했지.”
“예?”
“오해에서 비롯된 일전이었네. 누구 하나 크게 다치지 않고 끝난 싸움이었어. 물론 내가 졌다고 생각하지만.”
“헉?!”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패배를 안겨 준 사람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더군.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네. 그때의 난 어리고 미숙했으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조부님께서 천하의 음제와 싸워 승리를 거머쥐었을 줄이야.
얼떨떨해진 강량을 보며 하은교가 말을 이었다.
“귀선검과는 그 뒤로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네. 흑도의 사내답지 않게 호탕하고 낭만을 즐기는 사람이었지. 못 말릴 정도로 장난스러웠지만, 그의 검만큼은 진짜 중의 진짜였어.”
“……!”
“자네는 그보다 재능이 더 뛰어나 보이는군. 앞으로 꾸준히 정진한다면, 연 대수 못지않은 고수가 될 수 있을 게야.”
천하제일을 논하는 고수의 칭찬이었다. 강량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 강량을 향해 한 번 웃어 준 하은교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이제 슬슬 일어나지? 심부름꾼이 오고 있다네.”
훅!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연호정의 기운이 일순 내부로 수렴되었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그렇군요.”
“몸은 어떤가.”
“선배님 덕분에 아주 좋습니다.”
“아직 멀었잖은가?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시게.”
연호정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하은교의 표정이 멍해졌다.
잠시 후.
“더럽게 힘들구먼, 시벌. 앞으로 이런 건 저놈에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나타난 패율이 강량을 가리키다가 하은교를 발견하곤 헛기침을 했다.
연호정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패율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확실히 네 추측이 맞는 것 같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역시.”
“철장개 장로와 만나 봐야 하지 않겠냐?”
“그래야겠습니다.”
강량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뭔가 이상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