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화. 거짓된 살의 (9)
맑고 고요한 달빛이 내리쬐는 절벽 위 공간은 몹시 운치 있었다.
하지만 하은교의 말은 그 운치 좋은 장소를 한순간 북해의 빙굴처럼 만들어 버렸다.
여광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평소보다 심장이 두 배는 더 빠르게 뛰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오랜 세월 세상을 겪은지라 애써 평정을 유지했지만, 그 평정심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음제시여.”
여광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이 일은 저희 종남의 일입니다.”
절벽 위의 분위기가 더더욱 싸늘해졌다.
“음제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본도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 본문에도 내부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화산에 관한 문제는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다만 당장에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인지라, 부득불 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음제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괜스레 소란을 피운 것 같아 참으로 민망할 따름입니다.”
굉장한 저자세였다.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무림인이라지만, 그런 무림인에게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성천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워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닌 말로, 성천의 고수 하나가 구파일방급 문파를 이유 없이 몰살시켰다 한들, 같은 수준의 고수가 나서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를 잡을 수 없다.
개인의 생존은 물론 문파의 생존이 걸린 일이다. 나이나 배분에 상관없이, 성천십삼좌 앞에서는 무조건 공손해야 했다.
하은교가 고개를 저었다.
“화산에 관한 문제는 의아해서 물었을 뿐, 그에 개입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저는 종남의 사람이 아닙니다. 종남 내부의 사정이 있다면, 저로서도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요.”
“깊은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은교가 황석태를 보며 말했다.
“이들 일행 하나와 끝장을 보겠다는 것은 저로서도 용납할 수 없군요.”
여광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것은……!”
“화산과의 일은 종남의 사정이지만, 이들과의 일에는 제가 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보시는 대로입니다.”
보는 대로라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은교를 보던 여광이 이내 깜짝 놀랐다.
‘……!!’
하은교의 분위기가 워낙 압도적이라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눈이 가지 않았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데 의식을 하고 보니, 하은교의 옆에 연호정이 앉아 있었다.
그렇다. 두 사람은 평상에 나란히 앉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가까워 보일 수 없었다. 마치 자식을 옆에 앉혀 둔 어미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 살벌했던 연호정의 표정이 어색하기에 더더욱 챙겨 주는 느낌이 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꽤 오만한 성정으로 보였던 패율도 공손하게 서 있었고, 강량과 황석태 역시 그들 주변에 서서 이곳을 보고 있었다.
가족까지는 아니지만, 연이 깊은 하나의 집단이라 봐도 무방한 모습이었다.
여광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음제께서 어찌 흑도의 무리와……?!”
순간 하은교의 눈이 번뜩였다.
“무림맹과 묵룡부가 일시적 동맹을 맺었다는 얘기는 강호에 관심이 없는 이 사람도 알고 있거늘, 설마 종남의 높으신 분이 그것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예?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평생 백도의 명문으로 살아오셨으니 흑도를 나쁘게 보시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언제부터 흑백이 선과 악으로만 나뉘었답니까?”
“음제시여. 제 말은…….”
“무엇입니까? 들어 보지요. 외세의 침입을 눈앞에 둔 중원 무림이 힘을 하나로 합친 이때, 종남의 높으신 분께서 어찌 맹부 연합에 해가 될 만한 일을 강행하시려는지 궁금합니다.”
여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은교는 생각보다 중원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연호정 일행은 무림맹과 묵룡부, 양측의 인정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들과 친분이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상황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연호정 일행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저들이 음제와 이런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걸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종남의 자존심이요, 섬서의 평화였기 때문이었다.
황석태를 쫓아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펼쳐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물러나야 한다.’
뭐가 되었든 지금 이곳에서 음제를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강호 활동이 많진 않지만, 음제 하은교의 이름은 흑백 어디에서나 통할 만큼 대단했다.
하물며 하은교는 백도 정파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실제로 많은 명숙들이 그녀를 존경했다. 뿐인가? 그녀는 천하 예인들의 보호자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의 대가이기도 했다.
‘물러나야 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판이다.’
여광은 상한 자존심을 애써 다독였다. 자존심 상한다고 공격적으로 나가다가는, 자신 때문에 종남이 음제와 싸워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굳이 손을 섞지 않더라도, 이러한 분란이 중원에 퍼지면 종남에게 굉장한 손해가 될 것이다. 그리되면 화산 역시 은근슬쩍 섬서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할 것이다.
‘물러나자.’
여광은 치욕 아닌 치욕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
순간 그의 눈에 종남의 검사들이 보였다.
위대한 종남의 무학을 전수한 이들. 다음 세대 종남을 이끌어 갈 후학들은 종남의 자부심 하나로 여기까지 성장했다.
여광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종남은 저잣거리의 왈패 집단이 아닙니다.”
억누르고 또 억누른 음성이었다.
하은교의 눈이 번뜩였다.
“모르지 않습니다.”
“아니, 음제께서는 저희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훅!
여광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전투적인 기세라고 보긴 어렵지만, 호의적인 기운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상할 대로 상한 자존심, 거기에 뜻 모를 분노가 함께하는 기도는 그 자체로 상당한 위압이 느껴졌다.
“종남은 수백 년간 섬서의 평화를 위해 이바지하였습니다. 무림맹 소속으로서 맹과 뜻을 함께해야 함은 알지만, 적어도 우리 땅에서 분란을 일으킨 종자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습니까?”
“하물며 저들은 흑도입니다! 흑도의 무뢰배 출신이 종남을 욕보였거늘, 음제께서는 어찌 맹부 연합 운운하시며 저희를 압박하시는 겁니까?”
하은교의 얼굴이 굳어졌다.
“압박?”
“그렇습니다!”
기세를 탄 것일까.
여광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커졌다.
“제아무리 연합을 맺었다 한들 저들은 흑도입니다! 지금껏 흑도의 사악한 것들이 천하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불이라도 뿜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아니면 상한 자존심에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누구도 여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양민들의 삶을 피폐케 한 흑도의 무리가 위대한 종남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우리 땅에서! 한데 음제께서는 어찌 저들을 두둔하시는 겁니까? 단순히 맹부가 연합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여광의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설마하니, 음제께서는 본래부터 흑도와 한패셨던 겁니까?!”
순간 종남 검사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대, 대장로님!”
그들이 보기에도 여광의 언사는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힘의 우위를 떠나, 지나치게 감정적인 어조였다. 하물며 상대가 음제였다.
여광이 버럭 소리쳤다.
“내 땅에서 내 가족에게 위해를 가한 놈들입니다! 패악스러운 강도 놈을 두둔하시다니, 이 사람은 음제께서 어찌 이리 답답하게 구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은교가 차갑게 말했다.
“위대한 종남의 대장로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어찌 이리 치졸하고 무도하게 나오시는지 이 사람은 도통 알 길이 없군요.”
“무도하다니요! 아무리 음제시라도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언제부터 섬서가 종남의 것이었습니까?”
“……?!”
“한 지역의 패주 소리를 들으니, 이 넓은 섬서 땅이 그대들의 소유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수백 년간 섬서의 평화를 위해 불사른 종남의 선조들께서는, 섬서가 종남 소유라서 그리 애를 쓰신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내 가만히 사정을 듣자 하니, 먼저 시비를 건 것은 그쪽이더군요. 저 창술가는 여기 연 대수의 말을 전하러 갔을 뿐이거늘, 그 바쁜 사람을 막고 모욕을 가하지 않았습니까?”
여광의 눈에 핏발이 섰다.
“모욕이라니요?! 저런 흑도 놈의 사정 따위 봐줄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정하시는군요.”
“……?!”
“정말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었거늘, 말씀을 들어 보니 진짜였어요.”
“흑도 놈에 불과합니다!”
“저 사람이 죄짓는 걸 보기라도 하셨습니까?”
“……!”
“설령 그렇다 한들, 종남의 대장로란 분께서 사자(使者)에게 먼저 시비를 걸다니요? 그런 일은 그 먼 옛날 적국의 사자에게도 하지 않았던 짓거리가 아닙니까?”
“어찌 그리 답답하게 나오십니까! 어찌 저런 놈들을 두둔하시는 겁니까!”
“무림맹에 알려 볼까요?”
“……!!”
“이번 일을 있는 그대로 무림맹에 알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여광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은교가 한숨을 쉬었다.
“대장로 스스로가 이번 일이 떳떳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상대가 흑도니 뭐니 하며 본질에 어긋나는 얘기로 상한 자존심을 채우려 하십니다.”
“…….”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백도 정파는 그대가 보여 주는 모습과 거리가 있어요. 제아무리 흑도가 증오스럽다 한들, 자신의 잘못도 돌아보지 않고 상대를 질책하는 언행 어디에 올바름이 있습니까?”
여광의 얼굴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의 화산과 같았다. 치솟는 울화와 부끄러움에 눈앞이 다 아찔할 것이다.
하은교가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십시오.”
“…….”
“종남으로 돌아가 마음을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이 사람이 보기에, 대장로께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입니다. 일문의 어른으로서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광의 눈에서 재차 불똥이 튀었다.
일문의 어른으로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배분 낮은 제자들 앞에서 들을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다스리고 있던 감정에 불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이제부터…….”
여광의 눈에 광기가 번득였다.
“이제부터! 종남에게 있어 음제는 더 이상 존경받는 선배가 아니오!”
“타인의 존경을 받을 생각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 벌레만도 못한 흑도를 두둔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천하 만민이 그대의 민낯을 본다면 참으로 좋아하겠소이다! 이제 보니 완전히 흑도와 한통속이 아니던가!”
순간 하은교의 눈이 깊어졌다.
“흑도와 한통속이라……?”
“그게 아니면 어찌 저 무도한……!”
“하면 우리는 적이구나.”
“……?!”
“흑도를 박멸해야 한다고 하였고, 나를 흑도로 보았으니 마땅히 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은교가 왼손을 들어 보였다.
훅!
절벽 위의 공기가 한순간 쫙 하고 압축되는 듯했다.
“이제는 적이 되었으니, 정신이 온전치 못한 네놈을 이 자리에서 박멸하면 되는 것이냐?”
“……?!”
“얌전히 물러날 기회를 주었음에도 제 손으로 거절한 적을, 살려 둘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여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