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화. 거짓된 살의 (8)
“일이 그렇게…….”
황석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량이 모옥을 힐끔거렸다.
“하면 형님은……?”
패율이 대신 대답했다.
“운공 중이다. 내상이 상당해.”
실제로 그런 것 같았다.
모옥은 제법 커서 방이 네 개나 되었다. 그중 하나의 방에서 불안정한 기파가 새어 나오고 있는데, 그 밀도가 무시무시했다.
익숙한 연호정의 기파였다. 다만 저렇게까지 불안정했던 걸 본 적이 없기에 걱정이 되었다.
하은교가 고개를 저었다.
“무극을 연 고수는 죽지만 않는다면, 제아무리 심각한 내외상도 빠르게 수복할 수 있네. 완벽하게 낫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느 정도까지의 상태를 만드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지.”
당장 호연종만 해도 통천부의 창날에 손이 뚫렸지만, 전투 중에 피부와 근육을 붙일 정도로 불가해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고위의 마공을 익힌 고수만큼은 아니지만, 괴물 같은 회복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데…….”
하은교가 절벽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힐끔거렸다.
“불청객을 끌고 왔나?”
황석태가 공손한 어조로 이전의 일을 설명했다.
하은교가 혀를 찼다.
“체면 때문에 별짓을 다 벌이는군. 그게 다 뭐라고.”
이렇게 말하니, 괜히 일러바친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황석태가 헛기침을 했다. 괜스레 민망했던 것이다.
“뭐가 어찌 되었건 연 대수가 데리고 오라 시켰단 말이지.”
잠시 턱을 쓰다듬던 하은교가 이내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당히 했으면 이만 나오게.”
훅!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흘러나오는 기파가 쑥 사라졌다.
잠시 후.
끼이익!
문이 열리고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연 부관.”
강량과 황석태가 연호정에게 성큼 다가갔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괜히 걱정을 끼쳤구먼. 면목이 없어.”
“그런 건 됐고, 몸은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덕에 살았다.”
음제 하은교 덕에 살았다.
내심 연호정과 싸운 게 아닌가 걱정했던 황석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론 싸운 적을 데리고 와서 치료까지 해 주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 아닌가.
패율이 툭 던지듯 물었다.
“누구였냐?”
“사음교 측 고수였습니다.”
“역시 그랬군.”
패율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초절정고수가 떼거리로 덤벼도 널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
“저쪽에도 너와 붙을 만한 고수가 있었던 거냐?”
무극을 개방한 고수가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외상을 상당 부분 잡았지만, 아직은 기력이 달리는 모양이었다.
“한 끗 차이였습니다. 박빙이었지요.”
“시체가 없던데.”
“아군과 함께 사라졌을 겁니다. 그때는 저도 정신이 없었어요.”
많은 것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하나 캐묻고 싶었지만, 패율은 말을 아꼈다. 필요하다면 아무리 힘이 없어도 다 말해 줬을 것이다.
패율이 하은교에게 물었다.
“이놈, 정말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지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하은교가 연호정을 평상에 앉혔다. 그러곤 그 옆에 앉아 그의 명문혈에 손을 대었다.
연호정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선배님.”
하은교가 고개를 저었다.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인데 몸을 빨리 정상으로 만들어야지. 이들이 오기 전에는 몰랐지만, 슬쩍 들어 보니 한시라도 빨리 추슬러야 할 것 같네.”
“그래도…….”
“같은 무극이라도 자네는 내 한참 밑이야. 생색낼 생각 없으니 걱정 말게.”
“아, 예.”
우우우웅.
하은교의 손에서 은은한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연호정의 명문혈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진기가 직접적으로 연호정의 내외상을 낫게 하지는 못한다. 애초에 성질이 다른 내공을 이리 수월하게 침투시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녀의 진기는 연호정의 광명신단과 사신기에 힘을 실어, 자가 치유력을 극대화해 주는 데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어떤가?”
“시원합니다.”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잘도 하는구먼.”
패율과 황석태, 강량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연호정의 등에 손을 댄 하은교의 얼굴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신기하네.’
이십 대 중반의 청년과 삼십 대 초반의 미부가 앉았는데도, 남녀가 아닌 모자지간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하은교의 나이를 생각하면 모자지간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반면 그녀의 외양만 생각하면 누이와 동생, 혹은 연인 사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친근한 모자지간이라는 생각만 들지, 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참으로 기이한 분위기였다.
연호정이 물었다.
“그래서 종남과 시비가 붙었다고?”
황석태가 혀를 내둘렀다.
“운공 중에도 다 들었나?”
심각한 내외상을 치유하는 중에도 이쪽의 대화를 전부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멈췄군.”
하은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의 힘을 읽은 것이지.”
“선배님께서 힘 좀 쓰신 모양이지요?”
“여긴 자네들만 있는 게 아니야. 내 제자도 치료 중일세. 괜한 분란을 만들어서 좋을 일 없어.”
아무도 모르게 압도적인 기운을 쏘아 낸 모양이었다.
지금쯤 저들도 알 것이다. 이곳에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괴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괴수가, 음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강량의 얼굴에 통쾌함이 어렸다.
“올라오라고 하시죠? 칼질은커녕 큰 소리도 못 낼 텐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들과의 일은 우리 몫이야. 선배님을 휩쓸리게 할 필요는 없다.”
“……쩝.”
“그나저나 의외로군.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화산은 이웃인데, 즉시 도우러 갈 생각은 안 하고 기다리겠다고? 선조치 후보고를 해도 무방할 일일 텐데.”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상했지.”
“이상했고, 실망도 했겠지?”
“……그렇다네. 솔직히 백도 정파를 표방하는 이들이 저토록 속이 좁고 자존심만 강한 이들인 줄 몰랐네.”
패율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음제가 앞에 있어서 차마 거친 말은 못 하고, 그렇게나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것이리라.
하은교가 말했다. 그 와중에도 나란히 앉아 연호정의 등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을 보면, 천외천의 절대자라는 인상을 도통 받기 어려웠다.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사람이 있네. 흑도라고 사악한 이들만 있을 것이요, 백도라고 정명한 협객만 있을 것인가. 세상을 진영 논리로 보고 헐뜯는 이들 중 정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늙으면 지혜로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집만 강해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 하물며 한 지역의 왕이나 다를 바 없는 위세를 떨친 문파인데,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고집불통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하은교의 음성에는 알 수 없는 아련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연호정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소리 없는 탄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식의 얼굴 한 번만 보겠다는 의지로 사음교에게 끌려다녔다.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면 절대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혈육이 얽힌 일이니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다만 큰 틀에서 보면, 하은교도 지혜롭다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운 집념으로 천하에 위해를 가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나는 이유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 임무를 받았을 때, 최악의 경우 하은교와 생사결을 나눠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걸 생각하면 이런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좋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선배님.”
“음?”
“혹, 위험한 생각을 하신다면…… 한 번만 재고해 주십시오.”
하은교가 흠칫했다.
“위험한 생각이라니?”
“……아닙니다.”
연호정이 애써 고개를 저었다.
“몸이 이 지경이 되니 이 일, 저 일 불안한 게 많습니다.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하은교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 부모는 뿌듯할 것 같네.”
“예?”
“세상 걸출한 자식을 두었으니, 어찌 뿌듯하지 않겠는가. 사방팔방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기도 힘들 걸세.”
연호정은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은교가 패율에게 말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저들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
패율의 눈이 빛났다.
“불러와도 되겠습니까?”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예 오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는 것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로군.”
“하지만 선배님의 제자분이…….”
“저들이 감히 이곳에서 난장이나 부릴 수 있겠는가. 여긴 성천 한 명과 차기 성천의 자리를 예약한 고수가 함께 있다네.”
성천십삼좌의 무력은 필설로 형용이 불가능하다.
다만 단순 수치만 생각하면, 그들 한 명으로 대문파급 전력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구파일방급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천외천의 강자 앞에서, 제아무리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고수라도 감히 소란을 피울 순 없을 것이다.
“그럼, 불러오겠습니다.”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모옥 옆 샛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여광이 공손하게 포권을 취했다.
“죽을 때까지 위대한 고수들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종남의 여광이 강호제일의 음공 대가를 뵙습니다.”
대단히 깍듯한 인사였다.
연배만 따지자면 여광의 나이는 하은교보다 몇 살 많았다.
하지만 강함이 곧 배분인 세상에서 여광은 하은교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장 그런 걸 떠나서라도, 하은교 정도의 고수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 있는 종남의 전력을 몇 합 내로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은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에서 오셨군요. 하은교라 합니다.”
하은교 역시 상대를 존중하는 어조로 말했다. 무력으로는 까마득한 하수지만, 그래도 비슷한 연배인데 성천이라고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는 것이다.
여광이 헛기침을 했다.
“음제께서 이곳에 계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본문과 마찰을 빚은 이가 있어 쫓아왔는데, 음제께서 계신 줄 알았다면 미리 허가라도 받았을…….”
“화산의 위험을 들으셨는데도 바로 도우러 가지 않으셨다고요?”
그야말로 기습과도 같은 말이었다.
여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뒤에 도열한 종남 검사들의 얼굴은 창백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종남은 화산과 오랜 벗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잘못 알고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화산은 종남의 벗이 맞습니다.”
“종남의 벗임과 동시에 구파의 벗이고, 백도의 벗이지요. 그러한 문파를 사특한 무리가 공격하겠다는 말을 들었으면, 응당 발 벗고 나서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여광이 침을 삼켰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다만 저는 본문의…….”
“문파에는 규율이 있고 절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종남은 우정과 협(俠) 앞에서도 그러한 절차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
“그것이 종남이로군요.”
여광의 눈이 흔들렸다.
“음제께서 뭔가 오해를…….”
“하면, 지금 당장 화산을 도우러 가실 겝니까?”
하은교가 미소를 지었다.
보는 이의 눈에는 눈보라처럼 보이는,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인 냉소가 거기에 있었다.
“아니면 이 사람의 거처에서, 종남과 마찰을 빚은 사람을 잡아가는 게 우선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