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거짓된 살의 (6)
백왕파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백색 파도가 십여 그루의 나무를 통째로 분쇄해 버리는데, 도무지 인간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커헉!”
연호정이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제아무리 대단한 정신력, 대단한 내공이라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순간순간 내상을 복구하며 싸워 왔다면 모를까, 음황사기에 침투를 허용한 그의 내부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의 살기는 죽지 않았다.
더더욱 불타오르는 살기, 그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숲 일대를 장악했다.
“……!!”
모습을 드러낸 신기자와 복면인들이 그대로 굳었다.
신기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복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땀으로 젖은 그들의 복면이 축축해져 피부에 달라붙었다.
“허억! 허억!”
무리한 공격으로 호흡이 엄청나게 거칠어졌다.
호흡이 거칠어지니 내공을 제어하기가 힘들다. 극한의 분노 속에서도 광명신단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지만, 지금은 자꾸만 빛이 명멸을 반복했다.
‘뭐지?’
츠츠츠츠츠.
검붉은 살기는 점점 그 색이 짙어져, 이제는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기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 정도 살기는 과거 흑암제 시절에도 뿜은 적이 없다. 심신이 파탄 나고 있는 와중, 연호정은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울컥! 울컥!
상단전을 검게 물들인 살기가 점차 안개처럼 낮게 깔려 중단전을 향했다.
순간 연호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단전이 온통 살기로 범벅이 되었음에도 일말의 정신을 깨우친다는 것이 대단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대단함도 의미가 없었다. 번지는 살기를 막을 수가 없는 탓이었다.
정신과 육신의 균형이 비로소 깨지기 시작한다.
그간 파멸적인 살기를 발산하면서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호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했다.
‘막아야 해!’
뭐가 되었든 살기가 중단전까지 완전하게 장악하면 끝이다.
중단전은 마음의 밭이다. 상단전과 하단전의 작용을 받는다지만, 결국 마음의 중심이 틈 하나 없는 살기로 물든다면 그때부터는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화르르르륵!
연호정의 몸에서 살벌한 화기(火氣)가 피어올랐다.
심장을 근원으로 하는 남천의 기운, 주작화기였다. 중단전을 침범하는 살기를 주작기로 이끌어 체외로 방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치이이이이익!
연호정이 선 주변 땅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퍼어엉!
그때, 한 줄기 폭음과 함께 호연종이 후방으로 날아갔다.
누가 그를 후려친 게 아니었다. 호연종 스스로 바닥에 경력을 폭발시켜 육신을 날려 버린 것이다.
“크으윽!”
수십 번의 도끼질을 받아 내고도 살아난 육신은 그야말로 강철의 강도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런 몸이라도 연호정이 뿌리는 주작화기를 감당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화상!’
왼 다리의 옷이 피부에 늘어 붙었다. 피부는 붉게 달아올라 쭈글쭈글해졌다.
제때 몸을 이동시켰는데, 잠깐 화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왼 다리가 통째로 화상을 입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다리 하나를 영영 못 쓸 뻔했다.
호연종이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치이이이익!
연호정의 몸은 허연 연기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체를 웅크린 채 몸을 떠는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살기를 화기로 바꾸어 방출한다. 그 화기의 농도는 형언이 불가능한 출력을 내고 있었다. 그의 주변 땅이 진흙이 되어 끓고, 나무들은 재가 되어 사라진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호연종의 얼굴에 비로소 공포의 기색이 어렸다.
‘완전히 마인(魔人)이구나!’
젊었을 적, 광혈교의 고수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진정한 마인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지닌바 무력도 엄청나서,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었더랬다.
한데 연호정은 더했다.
죽음을 예감했을 때도 연호정에게 두려움을 느끼진 못했다. 산 채로 토막이 날 위기에 처했을 때도 분했을 뿐, 상대가 무섭지는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허연 연기에 휩싸인 연호정의 그림자는 커지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신의 춤사위처럼 보였다.
‘달아나야 한다.’
호연종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온몸에 음황사기를 퍼트렸다. 생명의 원천, 선천지기에 손상을 입을 정도로 끌어 올렸다. 서둘러 떨어져야 한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저놈에게서 멀어져야 해!’
공포에 질린 호연종은 몸을 돌리려다가 문득 이십여 장 바깥에서 주저앉은 신기자와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호연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기자와 복면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한 초월적인 존재의 기세가 자아내는 압도적인 공포감에 반쯤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호연종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정신들 차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신기자와 복면인들의 정신을 깨웠다.
와중에 복면인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 백오십여 명 정도 될까? 연호정의 백왕파에 무려 오십이 넘는 고수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린 것이다.
“피해라! 어서 거점으로 가! 저……!”
순간 말이 툭 끊겼다.
저놈도 아니라 저 사람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명백한 적인데도 불구하고 저놈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만큼 두려움이 컸다.
호연종이 재차 외쳤다.
“저자를 건드리지 마라! 어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
“사, 삼호법?”
“빨리 벗어나라고! 더 있다가는 너희도 죽어!”
화기 때문이 아니라 살기 때문에 죽는다.
절정고수, 심지어 몇몇은 초절정고수인데도 살기 때문에 죽을 수 있다.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기자와 복면인들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살고 싶다는 본능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기어서 오 장 거리를 물러나자, 그제야 그들의 눈에 조금씩 이성이 찾아왔다.
신기자가 외쳤다.
“퇴, 퇴각해라!”
파바바박!
일제히 거점으로 이동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무섭도록 빨랐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공포가 그들의 육신을 조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연종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나를 부축해라!”
정신이 번쩍 든 복면인 몇몇이 되돌아와 호연종을 부축했다.
한참을 멀어지고 나서야 호연종은 정신을 잃었다. 그도 한계를 넘어선 탓이었다.
그리고.
화르르르르륵!
사방을 불바다로 만든 연호정의 몸은 이 순간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주작화기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화력이 더 오르진 않았지만,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이제야 중단전으로 파고든 살기를 제대로 뽑아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농도가 더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더는 살기가 그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였다.
‘너무 많아.’
연호정은 탄식했다.
‘이걸 전부 뽑아내려면…….’
중단전은 물론 상단전까지 물든 살기를 완전히 뽑아내려면 일대 숲은 물론 협곡까지 열기가 전달될 것이다.
여기서 협곡까지의 거리는 까마득하다. 어지간한 고수도 이곳에서 터진 충격파를 느끼지도 못할 거리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대기하고 있으라던 패율과 강량이 있었다.
‘제기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이 살기를……!’
그때였다.
[받아들이게.]
연호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목소리는?’
의문을 품는 순간, 청아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를 파고들었다.
[뽑아내려 하지 말게. 그저 지금부터 들리는 소리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게.]
삐이이.
어디선가, 언제부터인가.
연호정은 건조하고도 서늘한, 그러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률을 들었다.
피리 소리였다. 한 점 끊김이 없는 부드러운 피리 소리가 단숨에 그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이건?’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선배님.’
음제 하은교가 부는 피리 소리였다.
이 심각한 상황에 갑자기 왜 피리를 불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곧 하은교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츠츠츠츠츠.
주작화기로 뽑아내던 살기가 주춤거렸다.
부드러운 선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곱고 따스한 음색이 살기의 농도를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살기가?’
흑암제의 깨달음으로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살기가 피리 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제야 연호정은 하은교의 말뜻을 이해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라.
지금 상황을 분석하려 들지 말고, 번지는 살기를 걱정하지 말고.
그저 지금 이 순간 들리는 피리 소리에 의식을 맡겨라.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삐이이이.
피리 소리는 음색 고운 새소리와 같았다.
그 새의 지저귐에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 구름 한 점 없는 대낮으로 바뀌었고, 불타오르는 숲은 어느새 선경(仙境)으로 변했다.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세상에 온전히 들어간 연호정은 지옥의 겁화처럼 불타오르는 분노와 한이 점차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스스스스스.
살기가 사라지는 속도는 놀라웠다.
시커멓게 넘실거리던 살기가 어느새 검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검붉은색으로 넘실거리던 살기가 어느새 빨갛게 바뀌었다.
그리고 피리 연주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
화염처럼 넘실거리던 붉은 살기가 투명해지며 흩어졌다.
콰드드드득!
연호정의 몸 곳곳에 살얼음이 끼었다. 엄청난 열기를 뿜던 기운이 한순간 사라지니, 밀려 나갔던 공기가 제자리를 찾으며 온도를 급강하시켰다.
“후욱!”
연호정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털썩!
다리에 힘이 빠졌다. 절로 무릎이 땅에 닿았다.
“쿨럭!”
울컥 올라오는 핏덩이를 뱉어 내니, 시커멓게 죽은 피가 땅을 적셨다.
치이익!
땅을 적신 핏물이 허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이럴 수가.’
독공을 배운 적이 없는데도 그의 피가 독이 되어 땅을 녹이고 있었다.
‘설마 이 피에 깃든 것이……?’
그때, 하은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기(魔氣)로군.”
연호정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하은교가 있었다. 한 손에 피리를 든 그녀의 얼굴도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자네 피에 마기가 깃들었어.”
“하지만 저는…….”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마기를 연성하지 못하는 게 아니야.”
“예?”
“과다한 살기가 자네의 진기를 마기로 바꿔 버린 것일세.”
“……?!”
“마기는 역천(逆天). 역천이란 순리를 거스르는 것. 세상을 파멸시킬 정도의 살기는 곧 역천이라, 자네의 피와 살까지 마기로 물들게 한 것일세.”
하은교가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토혈에 실린 마기가 전부로군. 마기는 고이는 성질이 강하지. 조금만 늦었어도 중원 천하에 희대의 마인이 출현할 뻔했어.”
무형의 살기가 유형화되고, 유형화된 살기가 마기(魔氣)로 변모했다는 것.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일 것이다. 하은교는 곱게 두 손을 모은 채 연호정을 내려다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죄송합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셨습니다.”
“아닐세, 아니야.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예?”
“그건 나중에 얘기하세. 그건 그렇고 몸은 괜찮은가?”
“괜찮…….”
순간 연호정이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하은교가 그의 몸을 부축하며 웃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후배로구먼.”
“…….”
“일단 거처로 가세. 저들도 겁에 질려 내 거처로는 오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