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화. 거짓된 살의 (5)
“……?!”
젖은 눈으로 허망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하은교가 놀라서 고개를 내렸다.
“끝났다?”
부딪치던 기파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두 사람 모두 고유의 기세는 그대로였다. 서로 손해를 본 듯 기운은 불안정했지만, 아직 둘 다 살아는 있었다.
하지만 존재감의 우위에서 차이가 났다.
사이하기 그지없는 기운을 발산하던 호연종의 기운은 점점 억눌리고, 불처럼 타오르는 살기로 무장한 연호정의 기운은 더더욱 강해졌다.
그 살기가 정말이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바로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듯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연호정, 그 청년이 이겼구나!’
기뻐해야 마땅함에도 하은교는 왠지 모를 착잡함과 걱정을 느꼈다.
이겨서 다행이지만 그 싸움에 참전하지 않은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착잡했다.
살기는 곧 힘이라, 상처를 입었음에도 아직 기운찬 것은 다행이지만 살기가 자꾸만 증폭되어 걱정이었다.
‘저대로 놔둬도 되려는가.’
살기라는 것은 곧 정신력에 기반한다. 살기가 농밀할수록 분노와 살의가 크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그처럼 독한 감정을 버틸 만한 정신력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무극을 연 반선의 강자라도 진짜 신선이 아닌 바에야 살기에 사로잡힐 위험이 존재한다.
“…….”
하은교의 눈이 깊어졌다.
누가 이기고 지든, 그녀는 연호정의 행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연호정의 말을 떠올렸다.
‘중원의 무림인으로서가 아닌, 드높은 경지를 이룬 위대한 무인으로서 함께 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도, 무림맹도, 묵룡부도요.’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하지만…… 이미 선배님께서는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
너무 멀리 왔다.
서글프지만 맞는 말이다.
그녀는 어쩌면 지금 이승에 없을지도 모르는 자식을 위해 끌려다니고 있었다. 음(音)의 기예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만든 무공을 사람 죽이는 기술로 쓰는 기묘한 자들에게 그 위험한 기술을 전수했다.
힘을 가진 자, 그만한 책임이 있는 법이다. 그 힘이 이토록 위험한 자들에게 넘어가는 순간, 좋든 싫든 세상은 크나큰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는 그 위험천만한 일에 한 손 거든 것이다. 거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이대로 참는 것이 맞는가.’
하은교는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내 자식을 위한 길이 아니다. 그저 내가, 낳은 자식을 버린 못난 어미가 자식 한번 보고 싶어서 저지르는 일일 뿐이야.’
뭐가 되었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녀는 잘못을 인정했다. 단 한 번도 그것을 외면한 적이 없었다.
문제는 인정한 것으로 끝내선 안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보고 싶어 할까?’
하은교가 눈을 감았다.
‘낳자마자 버린 어미를, 지금에서야 보고 싶어 할까?’
모른다. 확신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이 철저히 자신의 욕심에 따른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자식이 어떤 마음일지는 알 수가 없다.
“…….”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런 생각은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애써 무시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음교는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도 위협했다. 자식을 인질 삼아 그녀를 뜻대로 부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달랐다.
연호정 역시 그녀를 필요로 했지만,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올바른 길을 위해 함께해 주십사 간청하러 온 것이었다.
그 차이는 컸다.
사음교에게 받은 인상과 연호정에게 받은 인상의 차이가, 그간 애써 무시했던 생각을 더는 외면치 못하게 만든 것이다.
“…….”
하은교가 눈을 떴다.
생각은 많았지만, 정리가 되는 건 빨랐다.
“……이미 자식을 버린 순간부터 하늘을 보고 살 수 없는 죄인이 되었거늘, 내 욕심에 천하인을 힘들게 했으니 살아서 이 죄를 어찌 갚겠는가.”
그녀는 나직이 탄식했다.
“나는 확인해야 할 것을 잊었으니, 지금이라도 어미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그때였다.
쩌어어어어엉!
저 멀리 숲에서부터 강렬한 음파가 울려 퍼졌다.
하은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봐주는 것은 한 번뿐이다.”
훅!
절벽 위.
고민하던 한 떨기 서글픈 꽃이 많은 잎새를 떨어트리고 사라졌다.
* * *
지이잉! 지이이이잉!
거대한 도끼날이 무서운 진동을 발했다.
사아아아아악!
도끼날은 물론, 그 위에 붙어 있는 굵직한 창날에서부터 흘러나온 살기가 안개처럼 호연종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
호연종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한의 경지를 열어젖힌 강자의 정신력은 강철과도 같다. 제아무리 독한 살기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없다.
지금, 그 상식이 부서지고 있었다.
목을 겨누는 연호정에게서 흘러나온 살기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다. 인외(人外)의 존재, 인간의 상상력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악신(惡神)의 살기다.
부르르르.
호연종의 주먹이 희미한 떨림을 발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경지임에도 몸이 알아서 떨리고 있다. 연호정의 살기는 그렇게나 엄청났다.
스르륵.
그 와중에도 그의 갈라진 오른손은 봉합되어 있었다. 아직 제대로 쓸 순 없지만, 무극에 진입한 내공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호연종이 입을 열었다.
“정체가 뭐냐?”
그리 깊은 내외상을 입고도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살기에 잠식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음황무에 대해 잘 알지 않고서는 그런 회피와 반격이……!”
퍽!
“크윽!”
호연종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통천부가 그의 빗장뼈를 부순 것이다.
가볍게 휘둘렀지만, 무게만 팔십 근인 중병 중의 중병이다. 하물며 백호기가 깃들었으니, 가볍게 휘둘렀다 해도 작은 바위를 능히 쪼갤 위력이었다.
그러고도 빗장뼈만 부러지고 끝났다. 신체를 끊임없이 보호하는 음황사기, 역시나 대단한 무공이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연호정이 재차 통천부를 들어 올렸다.
호연종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미친놈!’
달빛을 등지고 거대한 도끼를 든 연호정.
몸은 어둠과 한 몸이 되었는데 두 눈만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귀신이 놀라 자빠질 외양이었다.
“팔다리를 잘라도 입을 놀릴 수 있을 거라 했던가?”
“……!!”
“흥미롭군. 우리 같이 확인해 보자고.”
호연종이 벼락처럼 왼손을 휘둘렀다.
퍼어어엉!
음황신장의 경력이 통천부를 맞아 쪼개졌다.
우두둑!
호연종의 입에서 피가 울컥 터졌다.
폭발이 아닌 붕괴의 경력을 썼다. 그러나 그걸 분쇄한 도끼질이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호연종이 받아야 했다.
‘빌어먹을!’
연호정이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여전히 발로 그의 가슴을 밟은 채였다. 발을 통해 끊임없이 주작기를 쑤셔 넣는 중,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무극의 고수에게는 점혈이 거의 통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 않으면 진기의 힘으로 마혈과 아혈을 순식간에 풀 수 있다.
연호정이 그의 단전과 신체를 봉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이유였다.
“이쪽 손이었나?”
통천부가 휘둘러졌다.
쉬이이이익! 퍼어억!
“크아아악!”
이번만큼은 음황사기의 힘으로도 막지 못했다.
호연종의 왼팔 팔꿈치가 그대로 절단되었다. 제아무리 창대를 짧게 쥐었다곤 해도 거리가 이리 짧건만, 너무나도 깔끔한 일격이었다.
주르르륵.
잘린 팔에서 대량의 선혈이 빠져나가다 멈추었다. 음황사기가 출혈을 막는 것이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과연.”
“크으윽!”
“네 말대로 주둥이는 놀릴 수 있을 것 같아. 기가 알아서 보호하는군. 그래도…….”
다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거대한 도끼.
호연종의 심장이 이전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제대로 확인은 해 봐야지.”
퍼어어억!
호연종의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왼팔 상완이었다. 순간적으로 집약된 음황사기가 왼팔을 보호함에도 통천부의 도끼날은 근육을 찢고 뼈에 닿았다.
완전한 절단이 아니다. 연호정의 진기 역시 불안정한 것이다. 황포산에 치명적인 내상은 피했지만, 그의 몸에도 음황사기가 남아 진기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았다.
“내 몸에 남은 네 진기가 얼마나 날 방해할 수 있을지 천천히 확인해 보자고. 어차피 밤은 길어.”
쾅! 쾅! 쾅!
연호정의 도끼질이 일정한 박자로 휘둘러졌다.
놀랍게도 호연종의 몸은 박살 나지 않았다. 일격, 일격마다 피가 터지고 근육이 손상되며 한 번씩 뼈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호연종이 품은 음황사기의 보호막이 연호정의 공격을 미세하게 앞서 있는 것이다. 음황무를 구사하기 전 전신 세맥까지 강철처럼 만드는 진기인지라, 주인에게 끈질긴 생명력을 선사해 준다.
“좋아.”
연호정의 턱은 피범벅이 되었다.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핏물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웃었다. 고통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격, 일격을 가할 때마다 그의 내상이 깊어지고 있다. 당장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쓰러지지 않았다. 압도적인 광기였다.
“좋아, 정말 좋아.”
쾅! 쾅!
“되도록 오래 버텼으면 좋겠구나.”
퍽! 퍽! 퍽!
도끼가 사람 몸통을 찍어 내는 소리는 갈수록 끔찍해졌다.
뼈를 부러트렸던 도끼날은 더 이상 뼈에 닿지 않았다. 갈수록 도끼질의 위력이 낮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충격만큼은 내장에 그대로 전달된다. 뼈와 신경, 근육은 보호하고 있지만 오장육부가 받는 충격은 보호하지 못했다.
호연종의 눈이 서서히 풀렸다.
막강한 정신력으로도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정신 이전에 육체가 먼저 죽어 버릴 것 같다.
‘개 같군.’
이제는 고통도 못 느끼겠다. 도끼가 몸을 찍을 때마다 시야가 흔들리는 것만 느껴졌다.
‘내 목숨이 이런 미친놈에게 유린당하고 있다니.’
퍽! 퍽!
‘아득바득 살아남았는데…… 정말 이렇게 끝장나는 거냐?’
그때였다.
[귀를 보호하게!]
순간 호연종의 눈이 본래의 색을 찾았다.
우우우우웅!
전신에 뿌리를 내렸던 음황사기가 찰나지간 그의 두뇌 전체를 보호했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붉게 물든 두 눈, 파멸의 살기로 가득한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든 감각이 호연종에게 집약된 탓에 바람의 흐름조차도 읽지 못했다.
“포기냐? 그것도 좋지.”
다시 올라가는 통천부.
“잘 다져 주…….”
그때, 그의 후각이 알 수 없는 냄새를 맡았다.
살기로 범벅이 된 연호정의 두 눈이 일순 차가운 빛을 찾았다.
연호정이 힘차게 호연종을 밟았다.
쾅!
호연종이 피를 토했다.
동시에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본능에 각인된 몸놀림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날아드는 다섯 개의 검은 물체가 보였다.
통천부가 허공을 갈랐다.
쩌어어어어어어어엉!!
무지막지한 진동과 함께 주변 나무들이 퍽퍽!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어떤 놈이냐.”
연호정의 눈이 다시금 충혈되었다.
두 눈에서 주르륵 흐르는 액체는 그의 눈 색깔과 같은 선혈이었다.
“어떤 놈이 날 방해하느냐!!”
꾹!
양손으로 통천부를 쥔 연호정이 무시무시한 힘을 끌어 올렸다.
호왕구벽세 후삼초 중 이초, 백왕파(百王波)의 힘이 파도처럼 숲을 휩쓸었다.
콰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