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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62화 (661/963)

662화. 거짓된 살의 (4)

“……!!”

신기자가 손을 들었다.

동시에 그의 뒤를 따르던 복면인들이 신법을 멈추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우면서도 빠른 신법을 완벽하게 제어한다. 이백이 넘는 복면인, 그들 하나하나가 굉장한 고수들이라는 방증이었다.

주르륵.

신기자의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뭐였지?’

그가 신의 피를 이은 반신혈족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손재주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남들처럼 무재가 뛰어나진 못했다. 그러나 생존력 하나만큼은 발군이었다.

즉, 감각이 뛰어났다. 숱한 전장을 기술자로 참여했음에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감각이 누구보다 날카롭고 예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감각이 비상을 외치고 있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위압감이란 말인가?!’

이곳에서부터 발생하는 충격파가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의 격전에 기인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고수 중 하나가 바로 삼호법 호연종이라는 것도.

그래서 부랴부랴 병력을 끌고 왔지만, 오는 중에 느껴지는 기세로 알았다.

상대도 강하지만, 호연종은 더 강했다. 그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이라 할 만했지만, 고수들 간의 격전에서 그 약간의 차이는 곧 넘어설 수 없는 벽이기도 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 있게 호연종의 승리를 확신했다. 병력을 끌고 온 것은 만에 하나를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한데 지금, 그 확신에 가까운 예측이 바뀌었다.

‘바람이 바뀌었어.’

신기자가 침을 삼켰다.

‘적의 기세가 바뀌었다는 뜻, 그리고 이 기세는…….’

한순간 전신의 신경이 마비될 것 같은 포악한 기파였다.

환상처럼 그려지는 산중대왕의 위엄 가득한 포효. 태산처럼 거대한 호왕이 황금빛 두 눈으로 천하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기주(技主)님?”

바로 뒤에 있던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닐세.”

신기자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전원 산음신탄을 꺼내 들게. 써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어.”

“……!”

“직선으로 가선 안 돼. 우회해서 가세. 만에 하나를 위해 적의 빈틈을 봐야 할 걸세.”

스르륵.

이백의 고수들이 숲을 돌아 이동했다.

* * *

쩌어어어어엉!

터져 나오는 쇳소리는 마치 바위에 발톱 자국을 새기는 범의 앞발질 소리와 같았다.

퍼어어어엉!

신들린 거병의 움직임, 호연종이 미친 듯이 후방으로 물러났다.

번쩍!

물러나는 호연종을 따라잡는 연호정의 혈익휘천은 신기(神技)라는 표현으로도 형용하기 힘들었다.

‘미친!’

음황무로 상대를 격살하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다.

찰나의 시간도 아깝다는 듯 엄청난 속도로 따라붙어 도끼를 휘두르는데, 도무지 흐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야수를 몸에 숨기기라도 한 듯, 인간보다 짐승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압박한다.

‘거리를 벌려야……!’

터어어어엉!

상대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반격의 기회를 빼앗는다면, 그보다 더 빠르고 기묘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벌리면 된다.

퍼퍼퍼퍼퍽!

호연종의 몸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미친 듯이 이동하며 움직였다. 움직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가 발로 박찬 나무들은 펑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번쩍!

그런 호연종을 기어이 따라잡는 연호정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호연종의 눈이 빛났다.

콰앙!

이 순간의 공격만큼은 연호정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재차 거리를 벌릴 것 같았던 호연종이 전신의 힘을 끌어 올려 온몸으로 연호정을 받아 버렸다. 몸통 박치기, 연호정이 호연종에게 썼던 자세와 지극히 유사했다.

퍼퍼퍽!

몇 번이나 땅을 박차 물러나는 연호정.

숨 한 번 들이쉬는 시간보다도 짧았지만, 비로소 호연종은 시간을 벌었다.

쿠구구구궁!

호연종의 전신에서 그림자 진 황야의 진기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버러지 같은 새끼!”

호연종이 으르렁거렸다.

“잘도 나를 몰아붙였겠다!”

콰아앙!

내치는 장력 일격.

마치 화포로 쏘아 낸 화탄과도 같은 속도였다. 샛노란 구체가 어느새 연호정의 가슴 앞 한 자 거리로 파고들었다.

퍼어어어어엉!

구체가 폭발하며 음황사기가 주변으로 확 퍼졌다.

푸스스스스.

그 연기에 닿은 수풀이 조금씩, 조금씩 쭈그러들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야의 광경을 구현하는 끔찍한 무공이었다.

음황무의 진짜 무서움이 바로 이것이었다. 진기 그 자체로도 무섭지만, 구결에 따라 성질을 바꾸는 음황사기는 외물을 박살 낼 수도, 스며들어 폭발시킬 수도, 그리고 쪼그라들게 만들 수도 있다.

침투경(浸透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결과물을 자유자재로 구현할 수 있다. 교내에서도 음황무보다 파괴력 넘치는 무공은 존재하지만, 그보다 자유롭고 독랄한 무공은 없다.

‘흔들린다.’

호연종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누런 연기가 사방으로 퍼진다. 그 속에서 적의 몸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됐어!’

움직임은 물론 기파까지 흔들리고 있다. 음황사기가 침투한 것이다.

호연종의 얼굴에 가학의 쾌감이 올라왔다.

“개새끼! 이제야!”

콰아아앙!

광표무신의 탄력을 고스란히 실은 신법, 호연종이 순식간에 연호정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호연종이 재차 음황신장을 휘둘렀다.

“죽……!”

퍼어어어억!

순간 호연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친 손바닥, 음황신장의 경력이 뿜어져 나오기 직전.

그의 손바닥 한가운데를 넓고 길쭉한 창날이 뚫었다.

“……제법 매콤하긴 했다만.”

스르르륵.

누런 연기가 걷히고.

그 안에 모습을 드러낸 연호정의 눈빛은 범의 그것처럼 샛노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역시, 네 애비의 실력을 따라가려면 멀었다.”

그 순간 호연종은 깨달았다. 자신이 유인당했다는 것을.

한 번 거리를 벌리면 쉽게 따라잡지 못한다는 걸 알고, 음황신장의 황포산(荒砲散)을 그대로 받아 낸 것이다.

하지만 호연종은 믿을 수 없었다.

‘멀쩡하다고?!’

물론 연호정은 멀쩡하지 않았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흐르 있었다. 잘 차려입은 옷 여기저기가 너덜거렸으며 특히 명치 부위는 산산이 찢겨 상복부가 그대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래도.

연호정의 몸에서 뻗어 나가는 기세는 굴강함 그 자체였다. 일말의 흔들림은 있지만, 광포함만큼은 이전보다 더 강렬해진 것 같았다.

“놓치지 않는다.”

연호정이 하얗게 웃었다.

창백한 얼굴로, 피가 잔뜩 묻은 이빨이 드러나도록 환히 웃는 그의 얼굴에 호연종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촤아아악!

재빨리 손을 뺐지만, 통천부의 움직임이 약간 더 빨랐다.

손바닥을 뚫은 창날이 그의 중지와 약지 사이를 베고 지나갔다.

‘큭!’

무극을 개방한 자, 반선의 진기로 신체를 수복하는 힘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이번 싸움에서 오른손으로 음황신장을 쓸 수는 없다. 막심한 손해였다.

파바바박!

재차 물러나려는 호연종을, 연호정은 놓치지 않았다.

퍼퍼퍼펑! 퍼어어억!

“흡!”

호연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통천부로 미친 듯이 공격해 오다가 벼락처럼 각법을 시전하는데, 그 일각에 허벅다리를 맞은 것이다.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진기가 흔들렸다. 후방 이동에 제동이 걸렸다.

‘이……!’

호연종이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그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촤라라라라락!

창날 달린 거대한 도끼가 십여 개로 늘어나며 좌우에서 무자비한 속도로 움직였다.

호왕구벽세, 호조요란(虎爪搖亂)이었다. 범의 앞발로 상대를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난격술(亂擊術)이었다.

퍼버버버벅!

호연종의 양팔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용케 막아 내는 그였다. 당장 오른손은 쓸 수 없지만, 깊고 방대한 음황사기는 멀쩡하다. 큰 손해를 입기는 했으나 심한 내상을 입거나 뼈가 절단되는 등의 중상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았다. 지금이 승부처라는 것을.

연호정이 통천부를 휘둘렀다.

산처럼 거대한 범이 휘두르는 강력한 꼬리, 호미진산(虎尾振山)이었다.

호연종이 저도 모르게 비명 비슷한 기합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부우우우우웅! 콰앙!!

통천부의 창대가 호연종의 몸통을 후려쳤다. 그의 몸이 바위 하나를 깨부수고 땅에 박혔다.

퍼어엉!

음황사기를 폭발시켜 일어난 호연종을 향해 재차 연호정이 공격했다.

화아아아악!

호연종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암흑의 세상 속, 거대한 도끼 네 개가 위아래로 나뉘어 그의 몸을 휩쓸어 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범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호아살의 범위보다 두 배는 넓고, 네 배의 파괴력을 지녔다. 호악흉마(虎顎凶魔)였다.

호연종이 황포산을 터트렸다.

번쩍! 콰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과 함께 연호정이 십여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울컥!

물러나지 않은, 아니 물러나지 못한 호연종은 그 충격파를 고스란히 받았다.

“쿨럭!”

토해 내는 핏물이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진한 내상의 흔적이었다. 게다가 양팔은 물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호미진산, 호악흉마의 연환격을 맞은 것도 모자라 황포산의 충격파도 해소하지 못해 진기가 역류한 것이다.

‘그래도!’

호연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상대를 십 장이나 물러나게 만들었다. 피해가 극심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우두두둑!

온몸에 순간적으로 핏줄이 돋아났다. 거리를 벌리기 위해 재차 광표무신의 힘을 뽑아낸 것이다.

그때였다.

호연종의 눈에 연호정의 모습이 보였다.

‘……?!’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호연종은 의아했다.

‘뭐지, 저 동작은?’

양손으로 든 도끼를 하늘을 향해 번쩍 치켜들었다.

놈과 자신의 거리는 거의 십여 장에 가까웠다. 근접 공격도 아니고, 굳이 이 먼 거리에서 저런 동작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설마 던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실수하는 것이다.

내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은 기회였다. 이미 그의 왼발 뒤꿈치가 땅에서 떨어졌다. 어떤 무공을 써도 자신의 움직임을 쫓아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연호정은 굳이 그에게 접근하려 하지도, 통천부를 던질 생각도 없었다.

콰르르르릉!

마치 한 줄기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새하얀 폭풍을 담은 통천부 위로 빛의 힘이 솟구쳤다. 광명신단의 힘이었다.

연호정이 대지를 향해 그대로 통천부를 내리쳤다.

콰콰콰콰쾅!!

순간 연호정을 중심으로 반경 이십여 장의 땅이 그대로 박살 났다.

콰쾅! 쾅! 퍼퍼펑!

뒤집히는 땅, 부서진 대지 곳곳에서 경력이 돌풍처럼 휘몰아쳤다.

콰르르르르릉! 퍼버버벅!

땅 위에 있는 그 무엇도 무사할 수 없다.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 갈아 버리는 광기의 무공이었다.

호왕구벽세 후삼초, 무극의 힘으로 펼치는 진정한 백왕진(百王震)이었다.

“크아아아악!”

호연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백왕진에 휩쓸린 그의 오른발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허벅지와 정강이 곳곳이 날카롭게 파여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무공이……!’

이를 악문 호연종이 서둘러 일어나려 할 때였다.

퍼어억!

어느새 다가온 연호정이 그의 가슴을 밟곤 목에 도끼날을 가져다 댔다.

“헉헉!”

헐떡이는 숨, 그러나 얼굴은 광기로 가득하다.

호연종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의 표정은 도무지 정상인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마음의 준비는 됐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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