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화. 거짓된 살의 (3)
퍼어어어엉!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무공이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다. 외양만 같을 뿐, 그 안에 정체 모를 귀신이 들어앉아 무자비한 칼춤을 추는 듯했다.
퍼펑! 퍼퍼퍼펑!
손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온갖 곳에서 폭음이 터졌다.
어딜 노리는지, 어떻게 노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비슷한 경지의 고수라도 경력 폭발의 순간을 읽지 않는다면 그대로 당할 만큼 음습하고 날카로운 무공이었다.
번쩍!
무형의 경력을 벼락처럼 빠른 속도로 휘두르지만, 그 발경술보다도 대단한 건 그의 움직임이었다.
호연종의 움직임은 마치 한 마리의 표범과 같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는 움직임이 지극히 날래고도 자연스러웠다. 두 다리는 물론 양손까지 써 가며 움직이는데, 인간의 골격과 근육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움직임을 구현하고 있었다.
호연종의 손이 허공을 할퀴었다.
콰드드드득!
삼 장 밖에 있는 아름드리나무에 거대한 발톱 자국이 생겼다.
쿠구궁!
어찌나 깊게 파였는지, 그 큰 나무가 기우뚱 넘어가다 결국 쓰러졌다.
힘을 담아 코앞에서 후려친 것도 아니요, 무려 삼 장 밖에서 휘두른 조공(爪功)에 거목이 박살 나 쓰러진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 단련된 무인의 감각으로도 발출의 순간을 읽을 수 없는 음험하고 강력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뭐야?’
이전보다 더 빠르고, 더 강하고, 더 은밀한 공격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호연종은 상대의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 조금 전보다 움직임에 여유가 있다.’
파파파팡!
두 손으로 땅을 짚은 그가 하단과 상단을 가리지 않는 폭풍의 각법을 휘둘렀다.
막을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는 공격이다. 적어도 호연종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생각과 달랐다. 돌풍처럼 휘몰아치는 각법은 상대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설마…….’
파아아악!
호연종이 직선으로 치고 들어가 주먹을 휘둘렀다.
단순하지만 빠르고 위력적이었다. 단숨에 심장을 노리는 포탄 같은 권법, 음황신권(陰荒神拳)의 첫 초식인 풍신일격(風信一擊)이었다.
콰르릉!
일자로 치고 나가는 권풍에 나무 네 그루가 박살 나 버렸다.
권풍의 위력 자체보다도 그 발경술이 지나간 주변을 모조리 파괴하는 압력이 더 무서웠다. 극한에 이른 권압(拳壓), 간단한 동작 속에 깃든 복잡한 발경 구결이 이처럼 살벌한 기공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치이이이익!
뜨겁게 압축된 공기가 풀려나오며 주변 땅을 응결시켰다.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
호연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시야에, 저 멀리 나무의 가지 위에 걸터앉아 이곳을 바라보는 연호정이 보였다.
‘읽혔다고?’
믿을 수 없었다.
‘풍신일격이 휩쓸고 지나간 권압의 거리를, 그 찰나에 재고 움직였다?!’
발경이 지나간 자리에 작용하는 인력은 통나무를 깨부술 만큼 엄청나다.
그 정도 압력이면 누구라도 살아남기 어렵다. 초절정고수의 내공 양이라면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찰나에 이러한 압력을 읽고 대응할 만한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연호정의 회피는 그보다도 훨씬 더 기민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순간의 압력을 읽고 피해 낸 게 아니라, 애초에 압력 발출의 거리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딱 권풍이 끊어지는 거리까지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스르륵.
호연종이 자세를 풀었다.
자세는 풀었지만, 몸 전체를 휘감은 음황사기의 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고 있었다.
“너, 정체가 뭐야?”
처음에는 실력을 감춘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 싸움은 생사결이었다. 굳이 실력을 감추고 상대의 힘에 맞춰 적당히 싸워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 무공을 알고 있는 거냐?”
쿵!
땅으로 내려선 연호정의 두 발 위로 허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연호정은 말없이 자세를 잡았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왼손으로는 호연종을 가리켰고, 통천부를 든 오른손은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기가 질리는 모습이라고 호연종은 생각했다.
저만한 거병을 한 손으로 들고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다. 물론 그 정도야 호연종 역시 손쉽게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압박감이었다.
중병(重兵)이자 장병(長兵)이며, 동시에 거병(巨兵)이다.
그 무시무시한 병기를 한 손으로 높이 쳐든 채 무색투명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연호정의 모습은, 지옥의 마귀들을 통솔하는 연옥의 장군처럼 보였다.
“그래, 물어본다고 순순히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지.”
쿵!
두 주먹을 마주 부딪친 호연종이 재차 자세를 낮추었다.
음황무를 대성했지만, 음황무 자체가 완벽한 무공은 아니다. 세상 어떤 무공도 완벽할 수는 없다.
음황무의 단점 아닌 단점이라면, 완벽하게 구사하기까지의 준비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음황사기가 세맥 곳곳으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 점점 방대해지며 신체 곳곳으로 파고든 음황사기가 어느새 그와 하나가 되었다.
“팔다리를 뽑아 주마. 너 정도 고수라면 사지를 뽑아도 주둥이는 놀릴 수 있겠지.”
스르륵.
호연종의 몸이 일순 확! 하고 커졌다.
전신의 근육이 순간적으로 팽창했다. 과다 발달한 등 근육이 휘어지며, 그의 체형도 맹수의 그것처럼 굽어졌다.
사음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투쟁술인 광표무신(狂彪武身)이었다. 호연종은 음황무와 광표무신을 동시에 구현하는 방법을 깨우친 것이다.
“…….”
약간의 침묵.
그리고.
파아아아아앙!
두 짐승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파바바바박!
호연종의 두 주먹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직선의 투로는 찾아볼 수 없는 곡선의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빠르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주먹에 담긴 힘은 파멸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연호정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통천부를 휘둘렀다.
쾅! 콰쾅! 쾅!
부법(斧法)과 권법(拳法)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벌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콰지지지지직!
두 사람 주변, 다섯 방위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가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이 자식!’
퍼퍼퍼퍼펑!
광표무신의 상태로 돌입한 호연종의 권법은 엄청난 속도와 탄력, 그리고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의 통천부가 자아내는 파괴력은 호연종 이상이었다. 대지를 지지하는 두 발, 허리의 회전과 상반신의 탄력으로 휘두르는 통천부의 위력은 말 그대로 파천(破天)의 공격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피슉!
호연종의 의복 어깨 부분에 날카롭게 찢겨 날아갔다.
사아악!
연호정의 옆구리 의복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서로의 빈틈을 노리는 동시에, 코앞에서 터지는 충격파를 막아 내며 싸운다. 빈틈을 파고든 공격을 막지 못해도 죽지만, 정면에서 발생하는 충격파를 막아 내지 못해도 죽는다.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파괴력 넘치는 싸움.
연호정의 통천부가 공기를 찢어발기는가 하면, 어느새 호연종의 주먹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호연종의 조공이 공간을 찢어 내는가 하면, 어느새 통천부의 창대가 물결과 같은 충격파를 일으켰다.
땅에 깔린 잡초들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두 사람 주변, 반경 이십 장 안쪽은 지진이라도 난 듯 온통 부서지고 박살 났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의 정면 승부, 누구 하나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기에 더더욱 충격파가 거세진다.
퍼어엉!
연호정의 상반신이 좌측으로 돌아갔다.
힘과 파괴력에서는 연호정이 한 수 위였지만, 속도와 탄력에서는 호연종이 한 수 위였다. 기어이 빈틈을 찾아내 한발 빠른 일격을 꽂아 넣으니, 어느새 연호정의 공격이 뚝 끊어지고야 말았다.
호연종의 안광에 살기가 번졌다.
‘지금!’
파아아아앙!
호연종의 쌍장(雙掌)에서 해일과도 같은 장력이 뿜어져 나왔다.
하단이나 상단을 구분하지 않고 연호정의 몸 전체를 노렸다. 한번 무너진 흐름, 상대는 절대 피할 수 없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가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럼에도 이 공격에서 벗어난다면…….’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연호정이 십여 장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물러나는 그의 두 발이 대지에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정강이까지 땅으로 파고든 모습,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훅!
호연종은 어느새 연호정의 우측방 일 장 거리로 접근했다.
‘미친놈! 그걸 막았어?!’
역시나 피하진 못했다. 하지만 막았다.
장력이 연호정을 휩쓸기 직전, 호연종은 어느새 연호정의 전면에서 솟구치는 반투명한 흑색의 장벽을 보았다.
수기(水氣)의 방벽이었다. 현무공의 북천십이벽 중 진무대제중벽의 기공술이 호연종의 장력을 막아 낸 것이다.
하지만 완벽히 막아 내진 못했는지, 연호정의 몸은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대단했지만, 여기서 끝이다.’
번쩍!
호연종의 주먹이 연호정의 옆구리를 노렸다.
음황신권, 황호유성(荒呼流星)이었다.
‘죽어라!’
화르륵!
실제 유성과 같이 강한 열기와 빛을 뿜으며 휘둘러지는 주먹은, 보기만 해도 엄청난 위력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퍼어억!
“컥!”
묵직한 팔꿈치에 안면을 얻어맞은 호연종의 몸이 오 장 거리를 날아 바닥에 처박혔다.
주르르륵!
부러진 코에서 폭포수처럼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다.
호연종은 얼떨떨했다.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 세운 후 부러진 코를 맞췄지만, 놀라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뭐야? 어떻게?’
츠츠츠츠츠.
고개를 숙인 연호정, 그의 어깨와 등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제법이군.”
번쩍!
고개를 든 연호정의 두 눈은 야수의 안광으로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투로 연마가 완벽에 가까워. 과연, 그 개새끼가 죽이지 않고 살려 둘 만하구나.”
“뭐?!”
“이제부터 내 차례다.”
연호정의 두 발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번쩍!
호연종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화기(火氣)가 폭발하는 순간, 어느새 연호정은 그의 코앞에 있었다.
살벌한 내공 소모를 감수한 혈익휘천의 속도는 호연종보다도 미세하게 더 빨랐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무극을 개방한 연호정의 사신무, 진정한 백호공(白虎功)의 호왕구벽세(虎王九霹勢)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허어엉!
산천초목을 떨게 할 산군(山君)의 포효 뒤로.
연호정의 통천부에 범의 의지가 실렸다.
콰르르릉!
폭발하는 발경이 마치 범의 포효 같았다.
단순한 휘두름에 불과하지만, 그 기세는 산중 대왕의 그것이었다. 일격의 공격력도 막강했지만, 폭음 자체가 하나의 음공(音功)이 되어 적의 뇌리를 뒤흔든다. 호포(虎咆)였다.
콰앙! 콰아앙!
한 번, 그리고 두 번.
그 사이의 빈틈이 무(無)에 가깝다. 범의 송곳니가 먹잇감의 목줄을 꿰뚫어 버리듯, 연호정의 통천부가 범의 송곳니가 되어 대지에 두 줄기 흔적을 남겼다. 호아(虎牙)였다.
부우우우웅! 콰아아앙!
백호군림보법(白虎君臨步法)과 함께 좌우 사선을 그리며 진격하는 통천부가 궁극의 파괴력을 자아냈다. 호왕(虎王)이었다.
호왕구벽세의 전반 삼초, 호포살(虎咆殺)과 호아살(虎牙殺), 호왕살(虎王殺)의 초식이 연환으로 펼쳐지며 호연종을 압박했다.
미친 듯이 물러나는 호연종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다. 한순간 사람이 달라진 듯 자유분방하면서도 파훼가 불가능한 상형무(象形武)를 펼치는데, 그 수준이 광표무신 이상이었다.
파악!
호연종의 양 팔뚝이 피범벅이 되었다. 음황사기의 방벽으로 근육까지 베이진 않았지만, 도끼날에 찢어진 팔에서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진의 무공, 호왕구벽세는 아홉 초식으로 이뤄진 호흉(虎凶)의 무공이라.
남은 여섯 개의 초식이 하나씩, 하나씩 풀려나오며 그 진가를 드러냈다.
연호정이 힘찬 진각을 밟았다.
쿠르르릉!
태풍에 휩쓸리는 숲이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