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화. 거짓된 살의 (2)
순식간에 거처로 돌아온 하은교는 지소현의 명문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후우우우웅.
풍성하고도 촘촘한 진기가 순식간에 지소현의 몸을 장악했다.
지소현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나빴다. 호연종의 살기가 순식간에 침투하여 온 경혈을 헤집어 놓았는데, 세맥 곳곳이 터졌고 단전도 불안정했다.
고작 한 번인데, 제아무리 강렬한 살기에 노출되었다 해도 이건 좀 심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손을 쓰거나 경력을 발출한 것도 아니었다. 한데도 이만큼이나 심한 내상을 입었다는 건, 호연종의 살기에 특수한 힘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하은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각 이상으로 다친 제자의 상태에 분노가 치밀었다.
‘진정하자.’
진기란 곧 의념이다. 내가 분노하면 진기 역시 난폭해진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하은교는 지소현의 몸으로 파고든 진기를 신중하게 다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우.”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체내를 장악하고 있던 답답한 것들이 빠져나갔음을 느끼는 지소현.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안색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다 나으려면 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방 안에 지소현을 눕힌 하은교는 다시 절벽 앞에 섰다.
쿠우우웅!
저 멀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굉음이 굉장했다.
‘일방적인 승부가 아니구나.’
하은교의 눈이 흔들렸다.
‘싸움이다. 박빙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굉음의 질만으로도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막강한 공격을 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은교가 이를 악물었다.
‘도와야 하는가.’
연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처음 본 청년이었고, 심지어 제자를 납치하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상식적으로 좋은 마음을 갖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청년의 말이, 청년의 진심이 자꾸만 마음에 남았다.
연호정은 진심으로 중원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삼교라는 족속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것은 옳은 감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터전이 외세의 침략에 신음한다는데, 누가 있어 화를 내지 않을 것이며, 누가 있어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것인가.
하은교 역시 중원 출생으로서 연호정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를 돕고 싶었다.
‘…….’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제아무리 자식 때문에 묶여 있는 몸이라지만, 목숨을 걸고 자신을 보러 온 청년의 용기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가야 한다.’
하은교가 이를 악물었다.
‘저 청년은 이름 모를 무수히 많은 양민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그게 아니면 그 정도의 맹목적인 진심은 나오지 않아.’
설령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지금 하은교의 마음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지? 어쩌면 좋지?
지금껏 사음교의 만행에 동조한 것만으로도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대죄를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자식을 다시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그 부덕하고 죄스러운 삶을 버텨 왔다.
또 버텨야 할까? 이번 일만 끝나면 자식을 만나게 해 준다고 했는데. 지금 나서 버리면, 이제껏 참아 왔던 그 모든 일이 헛것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는 해도…….’
상대가 연호정이라서가 아니었다.
연호정이 아닌 그 누구라도, 목숨을 걸고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정도 용기는 아무나 부릴 수 없는바, 하은교는 연호정이기 때문이 아니라 목숨을 건 용장(勇將)의 출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만한 인재가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보기에는…….’
그때였다.
사라라락.
바람에 실려 오는 무수히 많은 소리.
하은교가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녀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얼굴을 본 적 없는 사음교 측 고수, 그 하나만 있다면 또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을 협박한 신기(神技)의 기술력을 갖춘 노인과 휘하 고수들 또한 심상치 않은 충격파를 느끼곤 다 같이 이동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지금 저들의 속도라면 격전지에 도착하기까지 일각 정도 걸릴 것이다.
자신이라면 반 각이 채 걸리지 않는다.
충분할까? 저들 모르게 달려가서 연호정을 도와 이름 모를 사음교의 고수를 죽이고, 다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이곳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털썩!
하은교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그러한 일에 자식의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들보다 먼저 도착할 수는 있지만, 연호정과 싸우는 고수가 극단적인 도주를 선택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낼 수 없다.
당연히 자신의 참전도 들킬 것이다.
자식의 목숨도 그 길로 날아갈 것이다.
주르륵.
그녀의 두 눈에서 한스러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음제가 아니었다. 자식이 일말의 가능성으로나마 살아 있다면, 그것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어머니였다.
“미안하네.”
연호정을 떠올린 하은교는 하염없이 울음을 쏟아 냈다.
* * *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호연종의 몸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발걸음으로만 치면 호연종보다도 두 걸음을 더 밀려났다.
“이놈!”
호연종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굵은 도낏자루가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력을 후려쳐 튕겨 냈다.
번쩍!
벼락처럼 사선으로 휘어져 떨어지는 도끼날이 단숨에 호연종의 육신을 노렸다.
‘이 자식…….’
저만한 도끼를 이토록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놈은 처음 보았다. 아니, 애초에 이 정도의 거병(巨兵)을 다루는 초고수와의 격전도 처음이었다.
크고 무거운 병기를 다루는 놈들은 하나같이 어설픈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수정해야겠다.
내리치는 도끼가 이렇게까지 위압감이 넘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신을 꽉 잡고 있지 않으면, 어느새 싸움의 주도권이 상대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콰앙!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기세로 이기기 위해서 호연종은 정면 승부를 택했다.
실제로 강하게 후려치는 그의 권력(拳力)은 통천부의 참격 못지않게 강했다. 무게감과 힘은 연호정이 한 수 위였지만, 빠르고 날카로운 발경에 있어서는 호연종이 한 수 위였다.
호연종의 왼발에 바람이 실렸다.
파바바바박!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각법이었다. 마치 수십 개의 다리가 돋아난 듯 무식한 속도로 휘둘러지는데, 그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연호정의 대처였다.
파파파팡!
근접 거리에서 그 예측 불허의 빠른 각법을 상반신의 움직임만으로 모조리 피해 내고 있었다.
호연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개나 소나 피할 수 있을 만한 공격도 아니었다. 충분히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심지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호연종의 각법을 피해 낸 연호정이 돌연 도낏자루를 놓고 벼락처럼 파고드는데, 그 속도가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보다도 빨랐다.
콰아아앙!
호연종의 몸이 크게 들썩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몸통 박치기?!’
어깨를 전면으로 내걸고 등판이 다 보이도록 밀어붙이는 무공.
막무가내식 몸통 박치기가 아니라 고법이었다. 어깨와 등 전체에 막강한 발경을 둘러치고 힘 있게 밀어붙이는 강렬함 그 자체의 무공이었다.
번쩍!
밀어붙임과 동시에 회전하여 손을 휘두르는데, 어느새 그 손에는 거대한 도끼가 잡혀 있었다.
도낏자루를 언제 다시 쥐었는지는 호연종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빈틈이 보였는데도 빈틈으로 만들지 않는 능력, 상대의 인지 능력을 저하시키는 신들린 움직임이 거기에 있었다.
콰아아앙!
또다시 폭음이 울렸다.
이번 일격은 실로 대단했다. 진실로 죽일 작정이었던 듯, 한순간 대지를 초토화시키는 경력이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후두두둑.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자잘한 돌멩이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대단해.”
어느새 오 장 거리 밖으로 피한 호연종이 자세를 낮추었다.
“적당히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 나도 전력을 다해야겠어.”
사아아아아아아!!
연호정의 눈에 핏발이 어렸다.
상체를 바닥에 닿을 듯 수그린 호연종, 그 상태로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사냥 직전의 맹수와 같았다.
기수식이었다.
저 자세, 저 눈빛, 저 기세.
저것은 하나의 사악한 무도(武道)를 거침없이 구현하겠다는 의지였다.
음황무(陰荒武).
사음교주는 중원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수히 많은 무공을 체득하고 있다.
그중 그가 평소에 가장 선호하는 무공이 바로 음황무였다. 침투경에 능한 음황무는 자체적으로 독특한 독기(毒氣)를 품고 있어서, 제대로 일격을 당하면 천하의 고수라도 목숨이 위태롭다.
그리고 그 무공을, 연호정은 수도 없이 상대해 보았다.
꾸욱!
통천부를 쥔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강철로 만든 도낏자루가 그대로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연호정의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다.
“……큭.”
호연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상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지금 웃고 있는 건가?’
그때, 연호정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큭큭.”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했지만, 그것을 뚫고 기어이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으하하하하!!”
우르르릉!
무서운 광소가 숲 전체를 진동시켰다.
뱃속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광기 어린 웃음. 고개를 젖힌 채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는 연호정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뭉클뭉클!
어딘지 모르게 많이 어두워진 사색의 기운이 진한 연기가 되어 합쳐지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으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커져서, 어느새 그 자체로 외물에 영향을 주었다.
퍽! 퍼버벅! 퍼억!
쓰러진 나무들이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퍽퍽 터져 나갔다.
콰드드드득!
연호정의 두 발이 딛고 선 자리, 그 황량한 대지에 굵고 깊은 금이 거미줄처럼 쫙 퍼져 나갔다.
호연종의 눈이 흔들렸다.
츠츠츠츠츠츠.
한 손으로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한 손으로는 눈을 가린 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는 연호정의 등 뒤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보다 더 생생할 수가 없다.
‘저게 뭐야?!’
사신(四神)의 진기가 제아무리 깊다 한들, 광명의 신단이 제아무리 밝다 한들 그가 품은 어둠의 일면이라도 걷어 낼 수 있을까.
죽음이 범람하는 싸움터를 전전하며 온갖 적과 싸웠던 그에게 있어, 최악의 적이 사음교주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바.
그의 무공을, 그의 피를, 그의 힘을 이어받은 적이 비로소 나타남에, 연호정은 필연을 가리고 있던 흐린 하늘을 보며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애써 가리지 않아도, 아직 불사르지 못한 내 본성이 무엇인지는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망할 놈의 하늘.
덕분에 가족과의 한을 풀었으니, 이제부터는 적과의 한을 풀라는 것인지.
시시각각 문젯거리를 던져 주는 저 하늘의 자상함에 몸서리가 다 쳐졌다.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훅!
호연종을 바라보는 연호정의 얼굴은 어느새 무색투명함으로 가득했다.
쩍!
땅에 박힌 통천부가 서서히 들리며, 그 끝에 삐죽 돋아난 창날이 호연종을 가리켰다.
“머리 아픈 일은 잠시 접어 두고, 진절머리 나는 한의 일부나마 풀어 보자.”
“무슨 개소리를……!”
“와라.”
연호정의 자세가 낮아졌다.
그의 광기는 높아졌다.
“네 빌어먹을 아비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
콰앙!
호연종의 신형이 벼락처럼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