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화. 존귀한 깨달음 (8)
“흠.”
여광이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말없이 고개를 들어 황석태를 보는데, 그 시선이 참으로 모호했다.
“해서, 도움을 청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소.”
여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첫 만남 때 꽤 과격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싶었거늘, 이리 빨리 도움을 요청할 거라면 너무 고개를 빳빳이 세웠던 게 아닌가?”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저 전달자일 뿐이오.”
“뭐, 그렇겠지.”
여광은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황석태가 몸을 돌렸다.
“그럼.”
“잠깐.”
황석태가 여광을 돌아보았다.
“가려면 같이 가야지, 어찌 자네 혼자 가는가?”
“갈 것이오?”
“개방의 정식 직인까지 찍힌 서신인데, 도움을 주지 않을 수가 있나. 하물며 동네 이웃인 화산이 위험하다는데 당연히 한 손 거들어야지.”
“길을 안내하겠소. 따라오시오.”
“지금 당장? 그건 아닐세.”
“……?”
“그처럼 큰일이라면, 제아무리 대장로라도 독단으로 처리할 수는 없네. 물론 상부에서 난색을 표한다면 나 혼자라도 갈 생각은 있지만, 일단 연락부터 해 봐야지.”
종남파의 장문인은 현재 무림맹에 있다. 봉공이 아니라 장로의 직분으로.
황석태의 눈이 깊어졌다.
“그럼 늦을 것이오.”
“어쩔 수 없네. 이 건은 생각보다 큰 건이야. 독단으로 움직여서는 아니 될 일이지.”
“그렇소?”
“그렇다네.”
“하면 먼저 가겠소.”
“이왕 예까지 왔는데, 밥이나 한 끼 하고 가지 그러시는가?”
“당신은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여유가 없소. 동료들이 언제 싸움에 휘말릴지 모르오.”
“그건 또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로군. 자네 말을 듣자 하니, 마치 우리는 동료를 챙기지 않는 사람이란 것처럼 느껴지네.”
“당신이 내 말을 어떻게 느끼든 나와는 상관없소이다.”
여광의 눈이 반짝였다.
한 번 콕 찔러 보았을 뿐인데 대응이 아주 일품이다. 흑도 놈답지 않게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흑도 놈 주제에 제법 그럴듯하구먼.’
여광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 무림의 선배이거늘, 말투가 다소 딱딱하구먼.”
“흑도와 백도가 연합한 지 꽤 되었소.”
“음?”
“잠시라도 한배를 탄 사이라는 뜻이오.”
“그럼 더더욱 선배 대접을 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당신은 흑도를 먼지 취급을 했는데, 내가 당신에게 선배 소리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여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황석태가 몸을 돌렸다.
“지원군이 없다면 없는 대로 날뛰면 그만이오. 지금 당장 올지, 나중에 올지는 알아서들 결정하시오.”
“참으로.”
스르륵.
여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여유가 묻어 나오는 움직임을 보여 주는데도 위험한 분위기가 풍긴다.
“참으로 건방지구나. 흑도와 백도가 연합했다? 무림맹과 너희 묵룡부가 연합한 것이지, 흑도와 백도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 아니야.”
“말 상대가 필요하면 재주껏 찾으시구려. 바쁜 몸이라 당신과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
애써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지만, 황석태의 어조도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황석태는 여광이 한심했다.
흑도와 백도가 얼마나 뿌리 깊은 불신으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살았는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광의 말은 나이 먹은 늙은이의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화산이 위험하다?
윗선에 얘기하고 자시고 할 게 아니라 일단 되는 대로 병력을 추려 도우러 가야 한다.
그것은 흑도에서도 기본이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도 많았지만, 제대로 정신이 박힌 문파라면 동료 문파의 위기 앞에 이유 없이 도우러 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고작 이 정도인가. 구파일방이라는 것들은.’
황석태의 얼굴에 분명한 실망감이 감돌았다.
순간 여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표정은 무엇인가?”
황석태는 말없이 문으로 걸어갔다.
여광의 주먹이 탁자를 후려쳤다.
쾅!
탁자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종남의 검사들이 문을 막았다.
우우우웅.
적룡신창이 나직이 울음을 토해 냈다.
황석태가 차갑게 말했다.
“비켜라.”
화아악!
종남 검사들의 몸에서 날카로운 검기(劍氣)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그에 맞서듯 황석태의 눈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흘러나왔다.
“비켜라.”
움찔!
검사들은 저들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황석태의 살기는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나름대로 강호 경험이 출중한 그들이었지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종의 무공을 익혔든, 흑도 사파의 무공을 익혔든.
황석태는 종남의 검사들을 한참이나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당장 이 주루에서 그와 맞상대가 가능한 고수는 여광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차아앙!
검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발검(拔劍)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만큼 황석태가 발하는 위압감이 엄청났던 것이다.
그때였다.
“이놈!”
훅!
등 뒤에서 불어닥치는 기파에 황석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광이 범처럼 으르렁거렸다.
“예가 어디라고 감히 흑도의 쓰레기가 살기를 발하는……!”
순간 황석태의 몸이 한 줄기 폭풍으로 돌변했다.
콰쾅!
폭음과 함께 여광의 몸이 벽까지 밀려 나갔다.
막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발경이었다. 기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때 검을 뽑지 못했다면 갈비뼈 몇 대가 그대로 부러졌을 터, 여광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당장 저놈을……!”
퍼퍼퍼퍼펑! 콰아아앙!
벼락처럼 움직이는 붉은 용의 아가리에서 돌풍을 방불케 할 경력이 터져 나와 주루 전체를 휩쓸었다.
쿠구구궁! 콰앙!
주루의 기둥 몇 개가 그대로 분질러졌다. 황석태의 앞을 가로막은 종남의 검사 여섯 명이 경력의 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좌우로 튕겨 날아갔다.
황석태의 눈이 번뜩였다.
콰앙!
회전하며 질러지는 창날 일격에 거대한 주루의 문짝이 통째로 날아갔다.
파아악!
단숨에 주루에서 빠져나온 황석태가 곧장 말 위에 올라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엄청나게 빠르다. 말에 오르는 움직임과 속도만 봐도 그의 기마술이 신기(神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죽일 놈이!!”
황석태를 뒤따라온 여광, 어느새 검을 뽑은 그의 몸에서 해일 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황석태가 냉정하게 장(掌)을 휘둘렀다.
쾅!
위태로이 흔들리던 주루, 외부에서 또 하나의 기둥을 박살 냈으니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네놈의 선택지는 둘이다. 날 따라오거나 제자들을 살리거나.”
황석태가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오늘의 모욕은 임무가 끝난 후 직접 풀러 오겠다.”
두두두두두두!
말이 단숨에 관도를 내달렸다.
몇 번 주춤하던 여광은 이내 이를 갈며 무너지는 주루로 들어갔다. 황석태 말마따나 이곳에는 종남의 검사들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그들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잠시 후.
콰아아아앙!
주루가 무너지며 주변의 거목 십여 그루를 그대로 분질러 버렸다.
다행히 종남의 검사들은 모두 무사했다. 찰과상을 입은 이들이 많았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광이 외쳤다.
“모두 흑도 놈을 쫓는다! 너희 둘! 둘은 막내 사제에게 전하거라! 모종의 무리가 화산을 노리고 있다고!”
* * *
“그렇군.”
하은교의 얼굴에 격정이 일었다.
“내가 저들과 한통속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왔군.”
“나아가, 선배께서 무림맹이나 묵룡부로 오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은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연호정은 잠시 기다리다 말을 이었다.
“삼교의 중원 진출은 단순히 무림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수준에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피와 정복입니다. 우리와 관계없는 많은 사람이 다칠 것입니다.”
“…….”
“중원의 무림인으로서가 아닌, 드높은 경지를 이룬 위대한 무인으로서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도, 무림맹도, 묵룡부도요.”
“……그런가.”
“그렇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놀랍고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청년이 왜 굳이 제자를 납치하면서까지 자신을 불러냈는지를.
혼란으로 가득한 하은교의 얼굴.
그녀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괜찮은 것이냐?”
“네?”
짧고도 무게감 있는 대화에 압도되어 있던 지소현이 깜짝 놀랐다.
“아, 네! 제자는 괜찮습니다.”
일순 하은교가 날카로운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혹여 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제 목적은 오로지 선배님과의 대담이었습니다.”
하은교의 표정이 풀어졌다.
“워낙 험한 세상일세. 내 보기에 자네는 나름대로 선을 지키는 사람 같지만, 그래도 납치를 한다는 발상은 아무나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야.”
“…….”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길 경우, 자네는 물론 자네가 속한 조직 모두를 용서하지 않을 걸세.”
“죄송합니다.”
하은교는 연호정의 말에서 진심 어린 미안함을 느꼈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마 제자도 느꼈을 것이다. 이 청년의 행위는 나빴지만, 본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은교가 손을 휘둘렀다.
투둑!
순간 지소현의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단전의 봉인이 풀린 것이다.
“고생이 많았다. 가자꾸나.”
“네, 네!”
하은교가 지소현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선배님.”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하은교가 탄식하듯 말했다.
“저들이 싫네. 아니, 증오하네. 내 평생 절대 저들과 사상을 같이하거나 저들의 명을 받고 죄 없는 이를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그럼 이만…….”
“이미 죄 없는 이를 죽이는 데에 한 손 거드셨잖습니까.”
순간 하은교가 움찔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들에게 무공을 전수하셨습니까?”
“……!”
“무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심법 정도는 전수하셨겠지요. 아마 진동을 다루는 데에 초점을 맞춘 신공(神功)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하은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왜?”
“저는 엉망진창이 된 당가의 일을 수습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공격한 마인(魔人) 무리가 원리를 알기 힘든 화탄 비슷한 것을 터트렸지요.”
“……!!”
“화탄은 아니지만, 강한 음파로 상대의 오감을 망가트리는 마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하은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연호정이 한숨 쉬듯 말했다.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하지만…… 이미 선배님께서는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
“…….”
“지금이라도 사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면…….”
그때였다.
“조심!”
하은교의 느닷없는 외침에 연호정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콰아아아앙!
일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연호정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통천부의 널찍한 도끼날로 막았지만, 그 충격이 상당했다. 온몸의 근육이 삐걱거릴 정도였다.
번쩍!
도끼날 뒤로 몸을 숨긴 연호정, 그의 두 눈에서 붉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걸 막았어? 대단하구만. 영락없이 터트려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스르륵.
아무런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자.
호연종이 거기에 있었다.
“이거, 처음 뵙는 분들이 많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