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57화 (656/963)

657화. 존귀한 깨달음 (7)

우우우웅.

이명이 들렸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이 머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일순간 시야가 흔들리고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훅!

광명신단이 빛을 발하며 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번쩍!

순식간에 이명이 잦아들고 시야가 바로잡혔다. 대지를 디딘 두 발의 균형도 제대로 잡혀 들었다. 등 근육이 꽉 조여지고, 하복부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풀어졌던 전투 태세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체의 적당한 긴장도, 찰나를 쪼갠 순간 연호정의 몸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우웅! 우웅!

또다시 이명이 들렸다.

몸에 문제가 있어서 들리는 이명이 아니었다. 인지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진동이 그의 청각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순간 연호정은 양천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네. 음공(音功)에 꼭 음(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건 일차원적인 시각이야. 소리란 곧 진동일세. 음공의 고수란 음을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진동의 폭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들을 말한다네.’

‘내공력을 이용하여 진동 그 자체에 영향을 주는 것. 달리 생각하면 우리와 다르지 않아. 발경의 충격파 역시 진동이고, 발경도 크게 보면 진동일세. 그렇다면 음공의 고수가 발동하는 진동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묵룡부에서 떠나기 전, 음제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던 양천의 말은 무척이나 간결하면서도 놀라운 것이었다.

‘진동은 곧 진동으로 상쇄하면 되네. 물론 음제 정도의 고수가 발하는 공격을 상쇄하는 게 쉽지는 않지. 하지만 생각해 보게. 화기(火氣)의 발경을 막는 방법이 꼭 수기(水氣)의 발경일 필요는 없어. 똑같은 화기로 기운 그 자체를 상쇄시켜 버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네의 육신 주변에 진동의 방어막을 세워 두면 어떻게 될까?’

우우우우우우웅! 퍽!

연호정 주변, 허공 어딘가에서 기이한 괴성이 터졌다.

폭발에 가까운 소리지만, 폭음이 아니다. 필설로 설명하기 애매한 소리, 진동과 진동이 부딪쳐 상쇄되는 기음(奇音)이었다.

‘되는군.’

연호정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충격이 없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해.’

상대가 어떤 식으로 진동을 일으키는지 추측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방어는 가능했다. 몸 주변에 특성이 다른 사신(四神)의 발경을 깔아 두었기 때문이다.

진동의 폭과 강도는 제멋대로다. 한 가지의 발경으로는 힘들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발경을 네 가지로 나누어 상대의 공격에 맞춰야만 한다.

점진적인 내공 소모는 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놀라워.”

스르륵.

잡초를 밟는 비단 당화에 단호함이 묻어 나왔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세 번에 걸친 암공파(暗空波)를 그리 쉽게 무마한 고수는 오랜만이야.”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대화도 하기 전에 쓰러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야.”

“천하 무림인 중 성천의 음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나와 농을 하자는 것인가?”

“그럴 리가요. 다만, 선배님의 공격을 어찌 막았느냐는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후우웅.

바람이 불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 달라.’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사람이었구나.’

음제 하은교.

연배가 못해도 육십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삼십이 조금 넘은 미부처럼 보였다. 그마저도 풍기는 분위기가 몹시 특출나서 더 어리게 보이기도 했다.

미모도 뛰어났지만, 미모보다는 일신에 갖춘 기품이 더 대단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맷자락. 하얗고 얇은 장포를 걸쳤는데, 마치 선녀들이 입는 옷처럼 보였다.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비단결처럼 고왔고, 슬쩍 드러나는 손가락은 정갈하기 그지없어 섬섬옥수라는 말 이외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토록 곱고 우아한 외양으로 무서운 압박감을 발한다. 선녀의 육신에 거칠고 포악한 범 한 마리가 들어차 있는 듯했다.

‘강해.’

파라라락.

연호정의 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음제에게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강풍이 되어 연호정을 휩쓸었다.

‘굉장하다. 암왕 노선배와는 결이 달라.’

누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가는 알 수 없다. 따져 볼 필요도 없다.

하은교가 발하는 압박감은 깊고 깊은 노기(怒氣)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 이질적이기에 도리어 살벌한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대단하군.”

잠시의 침묵을 깨고 울려 퍼진 하은교의 음성은 그 기품과 같이 고왔다.

“반로환동은 아니고, 보이는 대로 젊은 나이임이 분명하군. 세상이 넓다더니, 이런 천재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연호정이 느낀 하은교의 존재감이 충격적이라면, 하은교 역시 연호정의 존재가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마흔 전에 무극을 개방한 고수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다.

물론 세상은 넓고도 넓어, 은거하며 가르침을 받는 초고수가 존재할 수도 있다. 은거기인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눈앞의 청년은 심했다.

삼십이 되지 않은 나이, 그런데도 무극을 열었다. 본신의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선명한 눈빛과 고요한 존재감은 초절정고수에게서도 볼 수 없는 절대강자의 그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드높은 경지를 이루었으니 명망 있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분명할진대.”

하은교의 눈이 지소현에게 닿았다.

지소현의 얼굴은 경악과 반가움, 두려움과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찌하여 어린 처자를 노렸는가?”

노렸다.

죽이기 위해서도, 몹쓸 짓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하은교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연호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을 뵙고 싶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어 부득불 제자분을 노렸습니다.”

노렸다는 말을 참으로 당당하게 한다.

하은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나를 보고 싶었다면 직접 찾아왔으면 되었을 것을.”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요.”

“어떤…….”

순간 하은교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음성도 같은 수준의 고수보다 선명하게 듣는 재주가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이 미지의 청년과 제자의 대화를 끝부분이나마 조금 엿들었다. 하여 이 청년이 제자를 납치했다는 걸 아는 것이다.

그것에 분개했고,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걸음을 빨리 옮겼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찌 알았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연호정이 말했다.

“곁에 악인들을 두셨더군요.”

“……!”

“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잡아 죽여야 할 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연호정은 일부러 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은교의 반응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 어떻게 나올 테냐.’

우우우웅!

광명신단이 환한 빛을 뿜었다.

사신기가 무섭게 조여지며 탄력을 증폭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통천부를 쥔 손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그때였다.

“자네 설마…….”

“……?”

“저들에 대해 알고 있는가?”

연호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은교의 말, 목소리 그리고 표정.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뭐지?’

묘하다.

‘사음을 알고 있다면 한통속이거나 피치 못할 이유로 저들에게 사로잡힌 경우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상식이었다. 사고를 열면 그 외의 수많은 이유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한통속은 아닌 것 같고…….’

통천부를 쥔 손에 살짝 힘이 빠졌다.

‘그렇다고 저들에게 사로잡힌 것 같지도 않은데.’

양천의 경우, 본인도 모르게 음황장에 중독되어 기량이 조금씩 하락하고 있었다.

사로잡혔다면 그런 경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약점이 잡혔다고 휘둘리기에는 성천의 이름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리 보니, 그조차도 아닌 모양이었다.

‘놀라움, 격정, 당황, 착잡함 그리고…….’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죄책감.’

하은교의 눈빛과 표정에서 보이는 감정들.

그중에 분명 죄책감이 있었다.

연호정이 제아무리 눈치가 빠르다 한들, 타인의 감정을 이렇게나 순식간에 읽어 내는 경우가 많진 않았다. 그만큼 하은교는 본인의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묘하군.’

음제 하은교가 강호의 일에 나선 적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풍진강호를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이의 어리숙함이 느껴졌다. 무극의 고수라도 순수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무인이라기보다는 예인(藝人)에 가깝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사음교라는 집단으로 신화교, 광혈교와 함께 광신삼교라 불리고 있습니다. 외세의 세력으로, 암암리에 중원을 노리고 있지요.”

연호정은 지금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절대적인 솔직함.

상대를 회유하거나 떠보기 위해 쓸데없이 말을 꾸며선 안 된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하은교는 스스로를 숨기는 데에 능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거짓을 판단하는 데에는 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감정을 읽어 내는 것. 어쩌면 그 부분에 있어서 자신보다 더 날카로운 사람이 하은교라는 느낌을 받았다.

“저는 그것을 막으려는 여러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만에 하나…….”

“…….”

“선배님께서 저들과 손을 잡았다면, 저에게는 상대해야 할 적이 몇 배로 늘어나는 셈이 되니까요.”

“자네…….”

흔들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는 하은교의 눈빛은 참으로 복잡해 보였다.

“정체가 무언가?”

쿵.

통천부를 땅에 박은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 연호정이라 합니다. 지금은 무림맹 유군 부대인 의정군의 대수를 맡고 있습니다.”

“연호정.”

하은교는 물론 지소현도 깜짝 놀랐다.

“연호정이라…… 그래, 들어 본 기억이 있네. 젊은 나이에 이미 구대문파 장문인에 밀리지 않는 무력을 손에 넣은 일세의 기린아라는 풍문을 들었지.”

“과찬이십니다.”

“소문이 잘못되었군. 장문인급이 아니라 그 이상이야. 그 연배에 무극을 개방하다니, 무림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닐는지.”

지소현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드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명망 있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 같다.

스승께서 상대를 칭찬하기 위해 한 형식적인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무극을 열었다니? 무극 개방이란 곧 성천의 영역이 아니던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무극을 열었지만, 반쪽짜리에 불과하지요. 제가 열 명이 있어도 선배님의 기량을 쫓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겸손이 과하군. 얼핏 보기에도 피비린내 그득한 전투적인 무공을 익혔어. 그처럼 실전적인 무도를 이뤄 냈다면, 나 역시 긴장해야 마땅하지.”

“싸울 일이 있다면 그러겠지요.”

“그 말은,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이곳에 함정을 설치했을 겁니다. 그러고도 선배님을 이길 자신은 없지만 말입니다.”

하은교의 얼굴에 복잡함이 드리워졌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됐다!

연호정의 얼굴에 일말의 안도가 흘렀다. 천하의 연호정으로서도 음제와의 전면전은 엄청난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중원의 강자인 음제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선배님을 불러낸 이유를.”

* * *

“으음?”

호연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충격파?”

훅!.

그의 몸에서 주기(酒氣)가 뽑혀 나왔다.

스르륵.

숲을 가로지르는 호연종의 움직임이 유령처럼 은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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