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6화. 존귀한 깨달음 (6)
“헉!”
거친 호흡과 함께 지소현이 눈을 떴다.
“정신 차렸소?”
낯선 사내의 음성.
깜짝 놀란 지소현이 상체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육포를 뜯는 한 청년이 있었다.
지소현의 눈이 차가워졌다.
“당신은?”
연호정이 육포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뒤에 물이랑 주먹밥 있소. 배고플 텐데 자시오.”
지소현이 저도 모르게 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곳에는 수통과 댓잎에 잘 싸인 주먹밥이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지소현이 연호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연호정은 말없이 육포만 씹었다.
지소현의 눈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내 내공을 봉쇄했군요?”
“그렇소.”
“날 납치한 이유가 뭔가요? 당신들은 누구예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설마 그 ‘당신들’이라는 말에 산적 놈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거면, 그놈들과는 초면이오.”
“그럼 왜……?”
“모르지. 다만 그놈들이 어디 소속인지는 알고 있소. 추명방이라고, 북부 무림에서 제법 악명 높은 살수 집단이외다.”
“살수 집단…….”
지소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살수 집단에서 대체 왜 나를?”
“그거야 나도 모르지.”
가만히 곱씹던 지소현이 재차 물었다.
“그들은 그렇다 치고, 당신은 왜 나를 납치한 거죠?”
연호정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물과 밥부터 드시오. 많이 배고플 거요.”
물론 배는 고팠다. 하지만 모르는 사내 앞에서 긴장을 놓을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말없이 연호정을 노려보던 지소현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곧 밤이 찾아올 것이다.
지소현이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말로 할 때 나를 풀어 주세요.”
“그전에 하나만 물읍시다.”
“…….”
“당신 사부가 음제 하은교, 맞소?”
지소현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당신, 내가 아니라 스승님을……?”
“맞군.”
육포를 다 삼킨 연호정이 손을 털었다.
“당신 내공은 내가 아니면 풀어 줄 수 없소. 음제라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력으로 풀 순 없을 거요.”
“…….”
“밥이나 드시오.”
“왜 자꾸 밥을 먹으라는 거죠?”
“배고플 테니까.”
“남을 생각해 준다는 사람이 타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 사람의 제자를 납치하나요?”
“그러게나 말이오. 나도 이 상황이 참으로 개탄스럽소.”
“물과 밥에다 무슨 독이라도 탔나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건 또 대단한 착각이시오. 당신을 어찌하려 했다면 굳이 약이 필요하겠소?”
“그건 나도 모르죠. 다만 당신이 내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요.”
“맞는 말이군.”
바위에서 내려온 연호정이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치 자기 집 안방에 들어앉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시오. 그래 봤자 배고픈 건 당신이오.”
강호 경험이 부족하지만, 지소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청년이 자신에게는 아무 흥미도 없다는 것을. 위해를 가할 생각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더욱 의아했다.
“내 스승님을 불러내기 위해 날 이곳에 붙잡아 두었다고요?”
“…….”
“당신, 제정신이에요?”
음제의 무공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대륙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같은 성천의 강자라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절대고수를, 제자까지 납치해 가며 유인한다?
“스승님께서 이곳에 오시면 당신은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한번 지켜봅시다. 나도 입방정은 최대한 자제할 생각이라서.”
“……장난해요? 당신이 제아무리 예의를 차려도 날 잡아 둔 행위 자체가…….”
“그건 다 내가 감당할 몫 아니오?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그 얘기는 그만해도 좋소.”
진심이군.
지소현은 깨달았다. 이 미친 청년은 정말로 스승님과의 독대를 원한다는 것을.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세상 어떤 스승이 제자를 납치한 광인과 대화를 나누겠는가? 문답무용 칼부터 뽑아 들 것이 분명했다.
‘저 사람…….’
방만하게까지 보이는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청년의 모습은, 뜻밖에도 묘한 운치가 있었다.
‘무서워하지 않아.’
강호 경험이 일천하다고 사람을 보는 눈까지 무딘 것은 아니었다.
지소현은 무공 이전에 음을 배웠고, 소리로 사람을 감동케 하는 법을 배웠다. 적어도 여느 범부보다는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는 데에 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저 청년에게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지소현이 물었다.
“내가 목적이 아니라고 했죠?”
“그랬소.”
“스승님이 목적이지만, 그분과 싸우는 것은 원치 않는 듯하군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천하의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음제와 싸우고 싶겠소?”
“……무슨 일로 그분을 만나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적어도 나쁜 마음은 아닌 것 같군요.”
“그리 생각해 준다면 고맙지.”
“사과하세요.”
“응?”
지소현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에게 사과부터 하라고요.”
“사……과?”
“그 목적이 선하다고 해도, 사람이 사람을 납치한 행위는 악한 것이에요. 나를 해하려 한다면 모를까, 그럴 사람도 아닌 것 같으니 나름의 상식인이라고 생각하겠어요.”
“…….”
“그리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죠.”
놀란 얼굴로 지소현을 보던 연호정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그래, 맞는 말이지.”
“…….”
“미안하오. 소저 말마따나 사과부터 해야 했는데, 나도 꽤 긴장했던 모양이오. 내 이렇게 사과하리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지소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진심 맞죠?”
“그렇소.”
날카로워졌던 지소현의 눈이 천천히 풀어졌다.
“진심 어린 사과, 잘 받겠어요.”
“고맙소.”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납치된 주제에 사과까지 받아 낸 내가 별종이죠.”
그러게? 별종은 별종이네.
주변 사람에게 어지간히 독특하다는 소리를 듣는 연호정도 지소현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지소현이 소매로 코를 닦았다.
“춥네요. 걸칠 만한 거 없어요?”
연호정이 피풍의를 벗어 건넸다.
연호정에게 받은 피풍의를 반으로 접은 지소현이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한옆에 수통을 놓았고, 무릎 위에는 댓잎에 싸인 주먹밥을 놓았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 하는 거요?”
댓잎을 벗기던 지소현이 주춤했다.
“왜요?”
“추운 거 아니었소?”
“그래서 바닥에 깔았잖아요.”
“……보통은 그걸 입을 생각을 하지, 이불처럼 깔 생각은 안 하는데?”
“그거야 내 맘이죠.”
“밥 드시게?”
“먹으라면서요?”
“안 먹을 것처럼 굴더니?”
“사과도 받았으니 이제 먹어 볼 생각이에요. 배가 고프긴 했거든요.”
진짜 독특하네.
연호정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지소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웃어요?”
“아니오.”
지소현이 뭐라고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후우웅.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른 수통이 연호정의 손에 잡혔다.
지소현은 깜짝 놀랐다.
‘허공섭물?!’
연호정이 가죽 수통을 흔들더니, 이내 수통에 내공을 집중했다.
스으으.
묘한 소리와 함께 수통 입구에서 보일 듯 말 듯한 김이 올라왔다.
우우웅.
다시 허공을 난 수통이 본래 있던 자리에 놓였다. 연호정은 팔짱을 끼고 바위를 베개 삼아 기대앉아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놀라서 연호정을 보던 지소현은, 문득 수통을 만져 보았다.
‘……!!’
뜨겁다고 하기에는 뭣하고, 마냥 따뜻하다고 하기에는 뜨거운 절묘한 온도였다.
지소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나 섬세한 내공 조예…… 말도 안 되는 고수구나!’
허공섭물을 숨 쉬듯 자연스레 구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다. 한데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로 물을 가열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섬세한 일이었다.
이 정도 기예는 무종지벽을 초월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들었다.
“당신…… 정체가 뭐죠?”
“으음?”
지소현이 떠듬떠듬 말했다.
“그 연배에 이런 신기(神技)가 가능하다니,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었군요?”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본인을 납치한 사람의 기술을 신기(神技)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도 평범하진 않다. 정말 여러모로 묘한 여자였다.
“그냥 바보요.”
“……?”
“바보니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을 납치하지.”
“…….”
“추우니까 물부터 한 모금 하시오. 뜨끈한 게 들어가야 속이 편해지지.”
흔들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던 지소현이 수통의 물을 마셨다.
연호정의 말대로였다. 뜨끈한 물이 들어가니 순식간에 몸 전체로 열기가 번지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지소현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배가 고프긴 많이 고팠는지 입가에 밥풀까지 묻혀 가며 주먹밥 세 개를 뚝딱 해치우는데, 그야말로 걸신들린 거지가 따로 없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품에서 육포를 꺼내 들었다.
“이것도 드시오.”
아쉬움에 댓잎을 내려다보던 지소현이 움찔했다.
소매로 입술을 닦아 낸 그녀가 기품 어린 자태로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잘 먹었어요.”
“잘 먹은 건 알겠군. 밥을 거의 마시던데.”
“…….”
“소문은 안 낼 테니까 안심하시길.”
지소현이 헛기침을 했다.
피식 웃은 연호정은 육포를 뜯었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육포를 뜯는 밤이라, 이것도 꽤 운치가 있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일각이 지났을까, 이각이 지났을까.
“보내 주세요.”
연호정이 지소현을 바라보았다.
곱게 앉은 지소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을 뵙는 게 목적이라면 차라리 저를 보내 주세요. 이곳으로 직접 모셔 올 테니까요.”
“…….”
“당신이 나를 납치했다거나 기절시켰다는 말도 하지 않겠어요.”
“…….”
“물론, 내 말이 믿기지 않을 수도…….”
“믿소.”
“네?”
“당신 말을 믿소. 당신은 분명 그럴 사람이오.”
뜻밖의 말이었다.
지소현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
“그래도 안 되오.”
“왜죠?”
“음제가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무슨 말이에요? 날 믿는다면서요?”
“당신은 믿지만, 음제가 당신 말대로 날 만나러 와 줄지는 모르잖소?”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지소현이 재차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는 한 번씩 마을에 들르는 걸 좋아하세요. 그때 뵈면…….”
“대화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
“이보세요. 그때부터는 당신이 알아서 노력해야죠.”
“그때까지 갈 것 없이 지금 노력하고 있소. 나라고 당신을 잡아 놓는 게 좋겠소?”
“…….”
“음제가 올 때까지 조금만 참으시오.”
지소현은 답답했다.
“지금까지 스승님을 걱정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죄송해 죽겠다고요.”
“그래서 납치한 거요. 이 정도 일을 벌이지 않고서야 순순히 따라 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사과를 한 거고, 돌려보내 줄 수 없어서 더더욱 미안해하는 중이오.”
“…….”
“이해를 바라진 않겠소. 다만 조금만 참아 주시길.”
“대체…….”
지소현이 이를 악물었다.
“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죠? 왜 그렇게 스승님을 뵙고자 하는 거죠?”
“…….”
“대답 좀 해 줘요! 어차피 보내 주지도 않을 거고, 그렇다고 죽이지도 않을 거잖아요!”
그때였다.
쿠구궁.
연호정이 통천부를 쥐고 천천히 일어났다.
지소현의 입이 텁 하고 다물어졌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이 쥔 통천부에서 심상치 않은 울림이 번져 나왔다.
지소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 당신?!”
설마 마음이 바뀐 건가? 날 죽일 생각인가?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쩌어엉!
한 줄기 날카로운 공명음이 들렸다.
아무런 전조 없이 터진 공명음은 바로 연호정의 어깨에서 난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연호정의 상체가 흔들린 것 역시 그 공명음 때문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연호정에게는 낯설고, 지소현에게는 익숙한 목소리가 숲 한쪽에서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한 수는 있구나.”
지소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푸스스스스스.
매서운 존재감.
한 신인(神人)의 등장에, 그녀의 좌우로 버티고 선 나무들이 몽땅 기울어지는 듯한 환상이 일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