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화. 존귀한 깨달음 (5)
지소현의 목덜미를 잡아 올린 연호정 뒤로, 패율과 강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이 너저분한 것들은.”
“모르겠습니다.”
“보아하니 산적이…… 오호라?”
패율이 눈을 빛냈다.
“그냥 크기만 한 근육이 아니야. 외공(外功)만 단련해서는 이런 근육이 나오지 않지. 내공을 제대로 익힌 놈들이다.”
“그렇습니다.”
“산적이 아니야, 이놈들.”
“그렇다고 정파 백도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흑도인가?”
그때, 강량이 말했다.
“흑도는 흑도인데, 그냥 흑도는 아닙니다.”
“응?”
“살수입니다.”
패율이 뜨악한 표정으로 강량을 바라보았다.
“살수? 요새 살수들은 다 이렇게 몸집을 키우나?”
“보통 살수가 아니라서 그렇죠. 이놈들은 추명방(追命房) 놈들입니다.”
“추명방은 또 뭐냐?”
고개를 갸웃거리는 패율에게 연호정이 말했다.
“중원 북부에서 활동하는 살수 집단입니다. 그렇게까지 유명하진 않아요.”
“유명하지 않다는 건 실력이 없다는 거냐?”
“실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만큼 철저히 숨기고 있는 겁니다.”
“너는 그럼 어떻게 아는 거냐?”
“들어 봤으니까요.”
흑도의 제왕으로 군림했을 적, 수많은 살수 집단이 흑제성에 들어가기 위해 성문을 두들겼다.
추명방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들에 대해서는 그때 알았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뒷조사를 명했고, 훗날 무사들을 보내 깡그리 박멸시켜 버렸다.
사람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지만, 추명방은 최소한의 선이 없는 놈들이기 때문이었다.
“저도 이놈들이 추명방 소속인 줄은 몰랐습니다. 추명방이라는 이름만 들어 봤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떨떠름한 얼굴로 두목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이놈들이 의뢰를 수행해야 한다며 호남까지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때 본문으로 직접 찾아온 놈이 바로 저놈입니다.”
“직접?”
“예. 호남의 한 일가족을 납치, 살해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결과는?”
“아버지께서 단칼에 거절하셨지요. 세상이 흑도를 뭣같이 봐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놈들은 민간인 살해와 납치를 업으로 삼고 있었어요.”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안 죽였냐?”
“저도 그게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네요. 추명방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북부의 살수 집단뿐만이 아니라 거기와 연관된 흑도 문파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것참.”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도리에 맞게 살기 힘든 법이지요.”
패율은 죽은 귀철검문의 주인, 강량의 아버지를 비겁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무림이 흑과 백으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비슷했다. 당장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수뇌부 중에도 저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무사들을 파견해 없애진 않았다.
다들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뭐가 되었든, 그 추잡한 살수 집단에서 음제의 제자를 노리고 있었단 말이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음제의 제자를 노린 건지, 아니면 그저 저열한 욕망을 채우고자 한 건지는 모릅니다. 알 바도 아니고.”
“알 바가 아니다…… 하긴 그렇지.”
“일단 이놈들부터 멀리 치웁시다. 량이가 수고 좀 해 줘.”
강량이 투덜거렸다.
“형님은 안 도우시게요?”
“철장개 장로에게 듣기로 사음교 놈들이 마을로 오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어. 음제의 제자가 하루에 한 번씩 들렀고, 가끔 음제 홀로 들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요?”
“기다려야지. 음제가 오기를.”
“……!”
강량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어렸다.
연호정이 바위에 걸터앉았다.
“사음교 놈들이 지척에 있으니 서신을 보낼 수도 없다. 그러니 제자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걱정한 음제가 직접 나서길 기다리는 수밖에.”
“형님.”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이 지경까지 온 마당에 할 말은 아니지만…… 이거 진짜 위험합니다.”
“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돌파구가 없는 임무다. 그렇다면 초장부터 목숨을 걸어야지.”
쓰러진 산적 둘을 들쳐 멘 패율이 물었다.
“떨어져 줄까?”
모르긴 몰라도 음제는 크게 분노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패율과 강량은 도리어 연호정에게 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떨어져 주신다기보다는, 아까 들렀던 협곡 인근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만에 하나 사음교의 잔당들이 움직이면 곧바로 보고해 주시고.”
“알았다.”
“제 쪽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일이 틀어진 겁니다. 그러니 곧장 왔던 길로 돌아가십시오. 저도 최대한 그쪽으로 빠지겠습니다.”
패율이 머리를 긁적였다.
“살아 돌아올 수 있겠냐?”
“그래야지요.”
“죽을 거면 음제 몸뚱이도 적당히 작살내 놓고 죽어라. 그래야 복수라도 해 주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복수는 해 주시는 겁니까?”
“살면서 선배 소리 낭낭하게 해 주는 놈이 얼마나 되겠냐? 이 싸가지면 몰라도 네 복수 정도는 해 줘야지.”
강량의 얼굴이 찌그러진 놋그릇처럼 변했다.
“저도 꼬박꼬박 선배 소리 해 주는데 왜 차별해요?”
“닥쳐, 인마. 넌 귀여운 맛이 없어.”
“허억?! 그럼 형님은 귀엽단 말입니까?”
패율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강량이 목을 움츠렸다.
“장난도 못 친다니까. 갑시다, 가.”
후다닥 산적들을 포개어 어깨에 짊어진 강량이 뒤뚱거리며 숲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눈에 힘을 푼 패율이 재차 연호정에게 말했다.
“주둥이 관리 제대로 해. 괜히 상대 심기 건드리지 말고.”
“누가 들으면 입방정 때문에 손해만 보고 산 줄 알겠습니다.”
“혼삿날도 제삿날로 바꿀 혓바닥이지. 모르고 있었냐?”
“커험!”
“간다.”
“조심히 가십시오.”
패율이 나머지 산적들을 들쳐 메고 사라졌다. 초절정고수라 그런지, 덩치 큰 장정 셋을 포개 메고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천보다 훨씬 춥구먼.”
* * *
‘음?’
호연종이 고개를 돌렸다.
노인, 신기자가 물었다.
“왜 그러시는가?”
“…….”
“삼호법.”
“이상하구먼.”
“뭐가 말인가.”
호연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기운이 느껴졌는데…….”
“신경 거스르는 기운이라니? 누가 오기라도 했나?”
“그걸 모르겠소. 너무 찰나라서. 산짐승의 기운 같기도 하고.”
신기자가 피식 웃었다.
“자네 앞에 나뒹굴고 있는 술병을 좀 보게.”
대륙의 술이 맛있다고 죽엽청주만 열댓 병을 비운 호연종이었다.
억지로 내공을 눌러 두었기에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그럼에도 육신이 항상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지라, 이보다 더 깊게 취하면 순간 방출된 내공이 주기를 몰아냈다.
취하고 싶어도 쉽게 취하기 어렵다. 물론 작정하고 내공을 풀어 버리면 만취하는 것도 어렵진 않겠지만, 중원에 나온 이상 그렇게까지 정신을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호연종이 머리를 긁적였다.
“늙은이 말이 맞소이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취해 본 적이 얼마 만인가 싶어.”
“산(山)에서는 술을 멀리한 모양이군.”
“딱히 멀리한 건 아니오. 그저 할 일도 없으니, 혼자서 진득이 수련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지.”
신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강하지 않나? 나는 잘 모르지만, 그만한 경지에 오르면 실질적인 수련보다는 명상 같은 정신적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고 들었네만.”
호연종이 코웃음을 쳤다.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둘을 안다고 착각하는 병신들의 헛소리외다. 명상만 해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라면 개나 소나 다 얻지.”
“흐음.”
“명상도 하나의 방법이고, 육체의 고련도 하나의 방법이오. 나한테 맞는 수행 방법을 그때그때 찾아서 몰입할 수밖에 없소.”
“신기하군. 사실 말일세, 나는 자네가 완전히 비인간적으로 변할 줄 알았다네.”
호연종이 피식 웃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오?”
“그 영역은 신의 영역이야. 애초에 사람의 영육(靈肉)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라 하였네. 당연히 이전의 자네와는 완전히 다를 거라고 보았지.”
시원하게 잔을 비운 호연종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아무리 몸뚱이가 커져 봤자 개는 개고, 고양이는 고양이오. 늑대나 범이 될 수는 없지.”
“자네 재능의 한계가 있다는 뜻인가?”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요. 타고나길 개로 태어났다면 늑대처럼 무리 지을 수 없소. 범처럼 큰 고양이라도 포효할 수 없는 법이외다.”
빈 잔을 채우는 호연종의 얼굴은, 얼핏 씁쓸해 보였다.
“나는 범이 되고 싶었지만, 역시나 고양이에 불과했소. 이 경지에 들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소.”
신기자는 생각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참 많이 달라졌다고.
교에서 봤던 호연종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 그지없던 인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호연종 대의 호연씨 중 살아남은 자는 오직 그 하나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재능과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하늘의 문을 열기 직전에 도달했으니, 어찌 오만하지 않을 텐가.
그런 호연종이 지금은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무공의 경지는 신의 반열에 도달했는데, 도리어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 똑같구나.’
신기자는 새삼 깨달았다. 사람은 절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선택받은, 이를테면 삼교의 교주들처럼 타고나지 못하면 누구도 신이 될 수 없다.
당장 음제 하은교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룬 무공은 눈앞의 호연종보다도 대단할 텐데, 고작 핏줄에 연연하여 이성도 잃고 사음교를 돕고 있다.
남들은, 특히 대륙의 무림인들은 이 상황을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성천십삼좌라 칭송받는 이들을 반쯤 신선처럼 보는 이들인지라, 그들에게도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한 병 더 하겠나?”
“술이 더 있소?”
“많네.”
호연종이 손을 저었다.
“됐소. 이제 자정인데 자야지.”
“자네 같은 고수도 꼬박꼬박 자야 하나?”
“고수는 사람 아니오?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야 몸이 건강하지.”
호연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기자가 허리를 두들기며 함께 일어났다.
“아랫것들에게 치우라 할 테니 먼저 들어가서 주무시게.”
순간 호연종의 눈에 은근한 비웃음이 어렸다.
“저놈들만으로 거길 치겠다고?”
“저놈들만이 아니지. 그 선봉에 자네가 있지 않은가? 나도 있고.”
“저것들 대다수가 죽을 거요.”
“그렇겠지. 뭐,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잖은가?”
“그건 그렇지.”
호연종이 피식 웃었다.
“궁금하군. 구파의 저력이라는 게 얼마나 될지.”
“우습게 볼 건 아닐세. 심산유곡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흩어져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 개중에는 자네와 대등한 강자가 존재할 수도 있네.”
“있다면 꼭 만나 보고 싶소이다.”
“아서게. 자네 호승심이나 채워도 되는 임무가 아닐세.”
“알고 있소.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호연종이 몸을 돌려 숲 쪽으로 향했다.
신기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가시는가? 거긴 마을 쪽인데.”
호연종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찝찝한 게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성격이거든. 아까 느꼈던 그 기운이 뭐였는지만 확인하고 돌아올 거요.”
신기자가 혀를 찼다.
“사고 치지 말고 금방 돌아오게. 작전 시작은 내일 자시 초야.”
“알겠소.”
스르륵.
호연종의 몸이 숲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