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3화. 존귀한 깨달음 (3)
다음 날 아침.
“좋군.”
말 상태를 점검한 강량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몸 상태는 어떻소? 어제 그렇게 마셔 대더만.”
황석태가 말에 오르며 말했다.
“난 숙취가 없어.”
“숙취가 없긴 개뿔. 내공으로 날려 보냈겠지.”
황석태는 강량을 무시했다.
패율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 낫지도 않은 놈이 술을 그리 마셔도 되냐? 일에 지장 가면 일 난다.”
“선배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잖아요.”
“누가 몸에 마기 들어온 것도 모르고 웃고 떠들라 하더냐?”
“쳇.”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량은 내심 웃었다. 패율의 반응을 보니 자신의 몸에 칼질한 미안함을 잘 이겨 낸 것 같았다.
“그나저나 형님은요? 형님 말이 없네요. 형님도 방에 없고.”
“먼저 갔다. 이십여 리 앞 협곡 입구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관도를 따라 십 리 정도 가다 좌측 대숲 쪽으로 꺾으면 된다고 했다.”
“에잉?! 왜요?”
“몰라, 인마. 그 여우 속을 누가 알아.”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치이이익!
강량의 몸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체내의 주정을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이다.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좀 과음하긴 했소. 임무에 지장이 가면 안 되니까.”
“누가 뭐라던가.”
“나중에 정식으로 붙읍시다.”
“술은 즐기려고 마셔야지.”
그 말을 끝으로 황석태가 먼저 출발했다.
패율이 피식 웃었다.
“내세울 게 없어서 술로 자존심 부리려는 못난 머저리들처럼 살지 말게나, 후배님.”
강량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내가 언제……!”
히히히힝!
거센 울음을 토해 낸 패율의 말이 황석태의 뒤를 따랐다.
강량이 투덜거렸다.
“맨날 나만 갖고 그래.”
휘이이이잉!
협곡을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눈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역시.’
어젯밤 화검자와의 대화를 끝내고 먼저 이곳을 들러 보았다.
철장개의 정보에 따르면 딱 이 지점부터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와서 보니, 과연 그러했다.
‘이 협곡은 저기 두 번째 산과 이어져 있다. 저곳에 음제가 있는 모양이야.’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츠츠츠츠.
광명신단이 명멸을 반복하며 기감을 확장했다.
짹짹짹!
청각이 예민해지며 온갖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바람 소리가 가장 강했지만, 그 너머에 지저귀는 새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삐이이익!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매의 울음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짐승의 걸음 소리도 들렸다. 둔중하면서도 날렵함이 느껴지는 소리. 멧돼지 같았다.
의외로 호랑이와 같은 거대 맹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 특유의 노린내와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늑대로 추정되는 발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는 없었지만, 직감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
연호정이 눈을 떴다.
‘투기(鬪氣).’
저 멀리, 협곡과 이어진 두 번째 산에서부터 지극히 은밀한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딱히 숨긴다고 숨긴 것이 아니라서 눈치챌 수 있었다. 제아무리 무극을 개방했다고 해도 작정하고 기척을 숨긴 무사의 투기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했다.
‘싸우려고 일으키는 투기는 아니야. 습관적인 분위기다. 항상 만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데.’
연호정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정예를 데리고 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천하의 음제를 감시하는 일이다. 물론 감시인지 실제로 동료인지는 모르지만.
뭐가 되었든 답은 하나다.
‘몰래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온갖 기오막측한 전략과 전술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데 능한 연호정조차도, 이번 임무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나 음제의 사정이었다.
정보나 소문으로 들은 것을 조합하면, 음제는 결코 삼교에 붙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삼교는커녕 중원의 문파들과도 연을 맺으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음교의 잔당들이 음제 주변에 몰려 있다. 그리고 음제는 저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지. 문제는, 사음교 모르게 음제와 접촉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부터가 어렵다. 대화가 된다면 괜찮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공격받을 수도 있다. 음제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음교의 잔당들을 돌파하고 음제를 만나려 한다는 것도 위험하다.
안 그래도 바쁜 전투에 음제가 개입하면, 자신은 몰라도 아군은 십 할에 가까운 확률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골치 아프군.’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처리하는 게 최고인 경우가 있다.
이번 일은 그조차도 힘들다. 단순하게 정면으로 돌파해서 모든 것을 알아낸다?
지금이 아니라 흑암제 시절의 무(武)를 간직하고 있어도 성공을 장담키 힘들 것이다.
적어도 연호정의 예감은 그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순 없어. 최대한의 안전은 챙겨야겠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순간이 올 수 있다.’
통천부를 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역시 개방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그는 어젯밤, 철장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정기적으로 마을에 들른다고 하네. 음제의 제자로 추정되는 여인이 말이야.’
‘마을.’
‘생필품의 수급 때문일세. 그래서 이상하지. 만약 음제가 삼교와 손을 잡았다면 굳이 마을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을 텐데.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른다더군.’
‘답답해서 그럴 수도 있소. 한곳에 죽치고 있으려면 얼마나 좀이 쑤시겠소.’
‘그것은 음제와 삼교가 손을 잡았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분석일세.’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이상 어떤 분석도 소용이 없소. 그 때문에 수많은 분석이 의미가 있지.’
‘말 한번 어렵게 하는군. 하지만 자네 말이 맞아. 현재로서는 음제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
‘우리 측에서 도움을 줄까 싶네.’
‘어떤 도움 말이오?’
‘시선 분산 말이야. 당장 섬서에 고위급 병력이 없어서 무력 충돌까지는 어렵네. 다만, 그 외의 도움이라면 가능하지.’
‘생각해 보겠소.’
‘고집부리는 건가?’
‘고집이 아니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거요. 음제가 개방을 싫어하면 어쩔 거요?’
‘그럴 리가 없어.’
‘확신하시오?’
‘…….’
‘필요하면 내일 따로 연락을 취하겠소. 그때까지 고민 좀 합시다.’
‘마음대로 하게.’
그 대화가 끝나고 철장개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연호정에 대한 감정이 좋진 않은 모양이었다. 강호의 대선배인 화검자의 목에 도끼를 겨눈 것도 모자라 개방 장로인 자신을 살기로 쓰러트리기까지 했다. 좋은 감정을 갖기가 어려우리라.
연호정은 피식 웃었다.
철장개는 자신을 싫어할지 몰라도, 연호정은 그의 강단 있는 성격이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앞과 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철장개와의 대화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화검자와의 대화도 떠올랐다.
‘그들은 화산을 칠 거야. 그리고 지금의 화산은…… 모르긴 몰라도 저들의 공세를 버티기 어려울 걸세.’
‘왜 그렇소? 화산에는 고수가 많잖소.’
‘명문이지. 인정하네. 게다가 내 대의 도사들은 모르지만, 사질 중에 멀쩡히 살아서 도와 검을 닦는 이들도 꽤 많을 걸세.’
‘세상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중 무극을 연 고수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지 않소?’
‘가능성은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이야. 게다가 심산유곡에서 수련한 무(武)는, 제아무리 무극이라도 전장에서 제 위력을 내기 어려울 걸세.’
‘그래도 무극이오. 잘 찾아보면…….’
‘화산이 얼마나 넓은지 모르나?’
‘…….’
‘화산이 위험해지면 모습을 드러내겠지. 하지만 그 전까지는 사숙이라도 수행 중인 사질들을 부를 수 없네.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진짜 답답하군.’
‘자네가 보기에는 그럴지 몰라도, 도를 닦는 도사들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활이야.’
‘눈 뜨고 당할 수는 없고, 화산에 마수가 닿기 전에 저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최고지. 가능하겠는가?’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그저 최선을 다할밖에.’
화검자는 자신 역시 도울 것이 없느냐고 했지만, 연호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들은 이곳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날카롭게 벼린 칼날은 곧장 화산을 향할 것이다.
먼저 눈치챈 화산이 역으로 저들을 공격하는 수는 없을까?
‘나쁘진 않지.’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해결사의 입장으로 왔기에 많은 병력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활용 가능한 병력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써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 규모였다.
‘누구 하나 죽지 않고 적의 귀계를 막는 것이 최고겠지. 하지만 최고가 최선은 아니며, 최고의 방법과 최선의 방법이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적의 목숨을 날리는 일이다. 내 목숨을 걸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단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사음교 몰래 음제에게 접근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 음제와 사음교 놈들을 떼어 놓는 것이 급선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떼어 놓는다…… 떼어 놓는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사실, 방법 하나를 떠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써도 되는지가 문제다.
“빌어먹을. 나는 왜 항상 이따위 방법만 떠오르는 거야.”
투덜거리던 연호정이 문득 눈을 치켜떴다. 후방 멀리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각 후.
“여기였군.”
“오셨습니까.”
푸르륵!
말들이 투레질하며 몇 번 발을 놀리더니 그 자리에 섰다.
강량이 투덜거렸다.
“말도 안 하고 먼저 가시면 어떻게 해요.”
“선배한테 말했다.”
“모두한테 해 줄 수 있잖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하냐.”
“쳇.”
맨날 이런 식이지.
댓 발 입을 내미는 강량을 무시한 연호정이 황석태에게 물었다.
“자네, 기마술이 일품이던데.”
일품인 정도가 아니다. 말을 다루는 실력만 보자면 중원 천하에서도 손에 꼽힐 것이다.
황석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당연히 기마전에도 능숙할 것이고.”
“아무래도 그렇지.”
“음…… 좋아.”
비슷한 기량의 말이라도 다루는 주인에 따라 속도 차이가 난다. 그것은 당연했다.
“똥개 훈련하는 것 같지만, 이해해 주게. 자네가 어딜 좀 다녀와야겠어.”
“어디?”
“벽월루라고, 여기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주루야.”
“벽월루?”
“종남 산하의 주루지. 개방 장로의 말에 따르면 현재 분광신검 일행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을 걸세.”
패율의 눈이 커졌다.
“종남은 안 끌어들인다며?”
누가 화산이 위험한 상황인 줄 알았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겠습니다. 도저히 답이 안 보여요.”
패율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생각해도 너무 막막한 임무였다.
연호정이 품에서 붉은 서신을 건넸다.
“개방 장로의 직인이 찍힌 문서야. 믿어 줄 걸세.”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오지.”
“돌아오면…… 아마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확률이 높아.”
모두의 눈이 빛났다.
연호정이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 한번 걸어 주게. 저쪽에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을지 모르거든.”
황석태는 말없이 피식 웃고는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빠르게 멀어지는 황석태를 뒤로한 연호정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슬슬 움직입시다.”
패율이 물었다.
“어쩌게? 정면 승부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쩔 거냐고, 그럼?”
연호정이 재차 한숨을 푹 쉬었다.
“범죄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뭐?”
“제자 납치요.”
“……?!”
“호랑이와 따로 만날 방법을 모르면, 호랑이 새끼를 잡아다가 유인해야지요.”
패율과 강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