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9화. 음황(陰荒)의 숨결 (4)
티이이잉!
“앗?”
스승이 타던 금줄이 또 한 번 끊어진 것을 본 설향의 눈이 커졌다.
여인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또 끊어져 버렸구나.”
“스승님…….”
“되었다. 이것은 내가 처리할 테니, 너도 이만 쉬거라.”
당황한 눈으로 여인을 보던 설향이 고개를 숙였다.
“차를 타 올게요.”
“아니, 괜찮다.”
“스승님께서 좋아하시는 철관음이 남았어요.”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구나. 너도 간만에 공부를 내려놓고 휴식을 만끽하는 게 어떻겠니?”
누구보다도 인자하지만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함 그 자체였던 스승이다.
그런 스승이 이리 말씀하실 정도라면, 정말 오늘의 공부는 끝이 났다는 뜻일 것이다.
설향이 고개를 숙였다.
“하면 제자는 잠시 아랫동네에 다녀올게요. 푹 쉬세요, 스승님.”
“그래, 알겠다.”
이윽고 설향이 방에서 나갔다.
끊어진 줄을 매만지던 여인은 이내 방 한구석에 금을 놓아두곤 밖으로 나갔다.
후우웅.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들이 수도 없이 보였다. 삭막했지만, 또한 장관이었다.
차분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어느새 언덕 끝에 선 여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우웅! 후우우웅!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 듯했다.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바람이구나.”
범부라면 두툼한 털옷을 입어도 추위를 느낄 만한 날씨였다.
하지만 여인은 아니었다.
외양은 삼십이 조금 넘은 듯한 완숙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지만, 기실 그녀는 육십을 넘긴 나이였다. 절대의 경지에 달한 공력(功力)이 노화를 막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은 공력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것 역시 무력(武力)에 한해서일 뿐이었다. 평생토록 연마한 내공과 육신은 그녀의 몸을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문제는 정신이었다.
‘언제일까.’
여인, 하은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대체 언제쯤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하은교는 후회했다.
평생 예인(藝人)으로 남겠다고 다짐했던 결심을 깨고, 힘에 취해 무(武)에 미쳐 버렸던 과거를 후회했다.
평생 예인으로 살았다면 이와 같은 치욕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제아무리 무공이 좋아도 일생의 자유만큼 좋을까.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 열성. 그 열성이 그녀의 재주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려 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 가 버렸다.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정말 늦어 버린 뒤였다.
‘내 분수를 알았어야 했다.’
하은교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잔인하게 끊어 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사랑은 끊을 수 있었다. 아니, 끊어야만 했고 실제로 아직도 배신감을 느꼈다.
사랑은 잊었다. 그러나 모정(母情)은 끊을 수 없었다.
뱃속에서 자식이 커 가고 있을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할 수 있었다. 끊을 수 있다고. 이미 잉태한 아이의 목숨이 아까워 낳기야 할 테지만, 낳고 나면 충분히 정을 뗄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제로 일시적으로는 떼었다. 그녀는 한 번 아이를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버리고 하루가 지나서,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다시 아이를 찾았지만, 어느새 아이를 데리고 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흔적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십오 년이 지난 후.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간 곳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그때 이후로, 하은교는 자신의 인생을 버렸다. 그리고 오 년이 지났다.
지난 오 년은 속죄의 길인 동시에 끊을 수 없는 모성의 길이었다.
그동안 지금처럼 한 번씩 자유를 못 견디게 갈망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유도 결국 자식을 볼 수 있는 자유였다. 그녀는 자식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단 하루만 살아도 그 삶을 택할 거라 생각했다.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그들은 말했다. 이제 곧 끝날 것이라고.
조만간 자유를 줄 것이라고. 자식과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은교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 역시 강호 경험이 없지 않았다. 세상이 얼마나 흉흉하고 더러운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자식을 데리고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이미 제 자식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혹시라도 자식이 살아 있다면?
그들의 제안이 사실이고, 조금만 지나면 자식을 볼 수 있다면?
하은교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 가능성 하나를 버리지 못해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미안하구나.”
주르륵.
기어이 하은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미의 가슴에 칼을 꽂아도 좋다. 나를 비웃어도, 원망해도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세상 어떤 자식이 자신을 버린 부모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번만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하은교는 하염없이 울었다.
중천에 뜬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맑은 달이 뜰 때까지 계속 울었다.
* * *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는 중년 사내의 얼굴에 은근한 감탄이 일었다.
“다르긴 다르구먼.”
올 때는 몰랐는데, 하루를 푹 자고 일어나 심호흡을 하니 확실히 공기가 달랐다.
“대륙이라…… 중원 운운하는 놈들의 자존심이야 알 바 아니지만, 확실히 우리 고향보다 공기가 맑아. 아주 상쾌하군.”
경치도 예술이었다.
고개만 돌리면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늘어선 절경이 펼쳐졌다.
장엄하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시간만 난다면 섬서의 모든 산을 정복하여 이 뜨거운 호연지기를 발산해 보련만.
“별수 없지.”
제아무리 그라도 위에서 시킨 명령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어지간한 명령은 상큼하게 씹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교주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야생마 같은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교주였다. 신화의 화신이나 광혈의 마신이라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지만, 사음의 주인은 달랐다.
중년 사내, 호연종(呼延棕)이 고개를 돌려 작은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깊어졌다.
‘저기로군.’
가만히 언덕을 올려다보던 호연종이 거처를 나와 계곡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헉!”
“삼호법(三護法)님을 뵙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복면인들이 호연종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호연종은 그들의 인사를 받지도 않은 채, 계곡 옆 널따란 평상 위에서 무언가를 만지작대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노인이 힐끔 호연종을 바라보았다.
“왔는가?”
호연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투덜거렸다.
“젊어서 그런지 몹시 빠르군. 열흘은 더 걸릴 줄 알았거늘.”
“환갑이 지난 나이에 젊기는.”
“벌써 그렇게 되었나?”
호연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한 반신혈족(半神血族)은 마흔 전에 제거되오. 그리고 나는 이십삼 년 전에 마흔이었소.”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는 걸 보면 아직 젊은 게 맞아.”
“늙은이한텐 무슨 말을 못 하겠군.”
“그 싸가지는 여전하구먼.”
“호법에게 싸가지라고 말하는 늙은이의 주둥이도 여전하오.”
노인이 피식 웃었다.
“삼호법이라……. 대단하긴 해. 우리 중에 호법 직위까지 올라간 건 자네가 처음일 게야.”
“무공에 재능도 없으면서 그 나이까지 산 반신혈족은 늙은이가 최초일 거요.”
“시끄럽고, 이거나 좀 봐.”
노인이 건넨 물건은 작고 시커먼 쇠공이었다.
쇠공이라고는 하지만 그 크기가 성인 남성의 손에 쏙 들어갈 정도였다.
호연종의 눈이 빛났다.
“이게 산음신탄(散音神彈)이오?”
“산음신탄을 더 개량한 물건이야. 이름은 같지만, 위력은 이전과 다르지.”
“그래 봤자 그 계집년이 전수한 심법 없이는 무용지물인 물건 아니오?”
노인이 눈을 끔뻑였다.
“자네, 그 심법 안 익혔나?”
호연종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노인을 보았다.
“그따위 장난 같은 심법을 내가 왜 익힌단 말이오?”
“그 심법 없이 이걸 어떻게 써?”
“안 쓰면 그만이오. 쓸 만한 게 천지에 널렸는데.”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게.”
“만약의 경우란 없소.”
우우웅.
호연종의 손에서 떠오른 산음신탄이 일순 무서운 속도로 그의 몸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애액!
어찌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 어느 순간 노인은 호연종의 몸을 휘감아 도는 산음신탄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노인 역시 절정고수 수준의 무공은 연성한 사람이었다. 그런 고수의 눈으로도 움직임을 잡아낼 수 없다. 소름이 끼치는 회전 속도였다.
호연종이 손을 뻗었다.
탁!
그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간 산음신탄에서 은근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노인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망가트린 건 아니겠지?”
호연종이 미소를 지었다.
“내공으로 소리도 억압했소. 설마하니 이 귀한 물건에 흠집이라도 냈겠소?”
“이리 내놔.”
호연종이 노인에게 산음신탄을 건넸다.
산음신탄은 상당히 뜨거웠다. 내공으로 속도와 바람을 모두 제어했다지만, 공기와의 마찰로 달궈진 쇠공의 표면 온도까지 모두 제어할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노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까지 익혔나?”
“뭘 말이오?”
“음황무(陰荒武) 말일세. 보아하니 오 년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호연종이 고개를 저었다.
“진즉 극의에 닿았소.”
“대단하군.”
“극치에 달하도록 연마한 것은 대단한 게 아니오. 진짜 중요한 건 완전히 통달한 무공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그것이지.”
호연종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늙은이도 무공을 익혔으니,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무공과 담쌓은 지 오래야. 내가 이때까지 살아남은 건 무공 외에 재주가 있기 때문이지.”
“하긴, 신기자(神機者)라는 별호까지 하사받을 정도니 오죽하겠소.”
노인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그 별호로 부르지 마. 나는 이름도, 별호도 없는 무명의 늙은이일 뿐이다.”
“알았소, 늙은이.”
호연종이 팔짱을 꼈다.
“그나저나, 들었소?”
“뭘?”
“사천의 일 말이오.”
“……?”
“못 들은 모양이군. 낙원지계(樂園之計)가 박살이 났다고 하더이다.”
순간 노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박살이 났다고?”
“정확히는 박살이 나는 중인 것 같소. 당가의 일도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더군. 당가주 놈이 개방의 여우와 손을 잡고 사천을 정리하고 있다 하더이다.”
“……믿을 수 없군. 광혈에서 사혼(死魂)까지 파견했네. 그네들에게 산음신탄을 건넨 게 나야.”
“사혼 정도가 아니오. 잘은 모르겠지만, 전대 육사제장까지 소환되었다고 들었소. 그런데도 막힌 모양이오.”
“설마…….”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암왕이 나선 것인가?”
“나서기야 했겠지. 하지만 늙은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했소. 일순간 소탕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아마 중간에 제법 대단한 조력자가 있었던 모양이오.”
“허!”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십 년이 넘도록 쏟아부은 사업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단 말인가?”
“오히려 잘된 거 아니오? 우리와 신화 쪽에서 일을 벌이는 동안, 광혈은 사천 하나만 담당하고 있었소. 그쪽도 적당히 피 좀 봐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지파끼리의 싸움도 대륙 정벌 이후에야 의미가 있는 것이야. 다른 곳은 몰라도 사천이 무너져선 안 되었어.”
“알 바 아니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듯했다. 심드렁하게 말하는 호연종의 얼굴에는 나른함만이 가득했다.
호연종이 저 멀리 언덕을 바라보았다.
“저기겠지? 음제인가 뭔가 하는 계집이 있는 곳이.”
“그래.”
“멍청한 년. 그깟 자식새끼에 연연해서 이것저것 퍼다 주는 꼴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노인의 얼굴에 불편함이 어렸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런 물건도 만들지 못했어.”
호연종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그는 저따위 잔재주에 열성을 쏟는 노인도, 상부의 지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분간 지루하겠군.’
호연종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뭔가?”
“음제의 자식은 정말 우리한테 잡혀 있는 거요?”
노인이 피식 웃었다.
“신의 피를 반이나 이은 자들도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면 죽는 판국인데, 이국의 여자가 낳은 천한 핏줄을 교주께서 신경이나 쓰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