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7화. 음황(陰荒)의 숨결 (2)
분광신검(分光神劍) 여광은 당대 장문인의 사형이었다.
올해 칠순에 접어든지라, 장문인의 사형치고도 유독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그것은 그가 지나치게 늦은 나이에 입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능력을 폄하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여광은 약관을 넘긴 나이로 무공에 입문했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발전했다.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고, 재능도 엄청났다.
만약 여광이 십 년만 일찍 무공에 입문했다면, 종남의 위세가 화산을 누르고 소림과 무당에 필적했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재능을 갖고도 여광은 사제에게 장문인 자리를 양보했다. 자신은 무(武)의 그릇일 뿐, 한 문파를 이끌 재목은 아니라고 못을 박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런 선택은 종남 문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사형제지간에 의가 상하지 않은 건 물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나름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광은 종남 문인들에게 장문인보다도 더 존경받았다. 실질적인 무공도 전대를 제외하면 종남 최고라 할 만했다.
그런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분명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근 십여 년 동안 무공에만 매진한 당대 종남 최강의 검사가 내려온 것만으로도 일대 사건이라 할 만했다.
“흐음.”
여광의 눈이 번뜩였다.
“저이들인가?”
“그렇습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이는 종남파의 막내 장로인 홍적이었다.
같은 장로지만 직책과 연배, 영향력과 무공 수위가 차원을 달리했다. 사형제들은 여광을 존경했지만, 그만큼 어려워했다.
“대단하군.”
여광의 눈은 종남 상궁을 지키는 거목처럼 단단했다.
“놀라운 고수들이야. 누구 하나 만만한 이가 없어.”
홍적은 내심 크게 놀랐다.
종남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여광은 자신이 이룬 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광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러한 성격이 오만으로 보일 수 없는 법이다.
“한 사람에게서는 창산(蒼山)의 향기가 나는군. 점창에서 온 모양이야. 선두에 선 저 청년은 모르겠고…… 남은 둘은 역시나 거칠군. 보고 받은 대로야.”
“선두에 선 청년이 바로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이라는 자입니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라고 불리지요.”
“……천하제일이라.”
여광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본문의 아해들이 노력 좀 해야겠구먼.”
“…….”
“한데 이상하군. 듣기로 무공이 구파 장문인급이라 알고 있거늘.”
“예?”
우웅.
여광의 눈에 은은한 신기(神氣)가 일었다.
자연스레 안력이 높아지고 기감이 확장되었다.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여광은 연호정의 표정은 물론 피부에 난 미세한 상처까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여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
“보아하니 다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내공을 숨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참으로 기묘하군.”
“그, 그렇습니까.”
“뭐가 되었든 얘기를 나눠 보면 알겠지.”
잠시 후.
두 일행의 거리가 삼 장으로 좁혀졌다.
철컹!
말 안장에 통천부를 매어 둔 연호정이 지상에 내려섰다.
여광이 턱을 치켜들었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종남의 검사들을 뵙습니다. 무림맹 의정군 대수 연호정입니다”
여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네. 종남의 여광이라 하네.”
화려한 수식어 따위는 필요 없다. 종남의 여광이라면 섬서를 넘어 중원 천하가 알아주는 이름이었다.
연호정이 포권을 풀었다.
“드높은 이름, 많이 들었습니다.”
홍적의 눈이 가늘어졌다.
딱히 예의에 어긋나지는 않는데, 묘하게 예의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예를 표함에도 분위기가 딱딱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연호정이 종남의 검사들을 바라보았다.
“기세가 몹시 삼엄하군요.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홍적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반면 여광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환영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싸울 생각도 없네.”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자네는 협의로 이름 높은 벽산연가의 장남이자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이야. 우리가 왜 자네와 싸우겠나?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차나 한잔 나눌 사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여광의 말을 주목했다.
자네들이 아니라 자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자신 외에, 일행 중 누군가와는 싸울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연호정은 이번에도 상대를 떠보지 않았다.
“누가 문제가 되는 겁니까?”
여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흐릿한 미소, 젊은이의 빠른 눈치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흑도의 무리는 세상 어디에서나 창궐하기 마련이지. 섬서도 마찬가지야. 그런 이들은 어디에나 있고, 박멸해도 끊임없이 생겨나지.”
“…….”
“하나, 작금의 섬서는 다르다네. 본문과 화산의 노력하에, 섬서에선 더 이상 그럴듯한 흑도 문파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네.”
여광의 눈이 황석태와 강량을 향했다.
“무림맹과 묵룡부가 일시적 동맹을 맺었음을 모르지 않네. 그래도 흑도의 고수들이 섬서로 진입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일세.”
황석태의 눈이 깊어졌다. 강량 역시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선배님 말씀 중에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음?”
“저는 무림맹 의정군의 대수인 동시에 묵룡부의 특임 부관입니다.”
“……?!”
“제 어깨에는 맹과 부, 양측의 정당한 명령을 이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 제게 이들은 동료이자 전우입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들 모두와 함께 섬서로 진입해야 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무림맹과 묵룡부는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을 상징하는 사람이 바로 연호정이다.
즉, 연호정에게는 정파와 사파 양측 모두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무림에서 존중이란 곧 자존심을 접어 주는 것이었다.
여광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네.”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유라.”
여광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나이 차이가 수십 년 이상 나는 후배였지만, 그래도 상대에게는 직책이 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말했듯, 당금 섬서는 아주 평화롭게 유지되고 있네. 흑도를 표방하는 문파는, 적어도 본문과 화산이 알기로는 단 하나도 없네.”
“…….”
“그렇다고 흑도가 멸절된 것은 아니야. 언제고 다시 세력을 일으키기 위해 그림자 속에 숨어 와신상담 중이지. 그런 상황에서, 제아무리 임무라 하더라도 흑도의 이름 높은 고수들이 섬서에 발을 들이면 어찌 되겠는가?”
“자신감을 얻어 문파를 세울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건 알 수 없지. 다만 본문과 화산은 수십 년간 섬서의 흑도를 청소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네. 공기가 청정할수록 작은 먼지에도 민감해지기 마련이지. 그것은 우리도, 흑도의 잔당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네.”
황석태와 강량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거친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여광은 흑도를 쓰레기나 벌레로 취급하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의 흑도 사파라 불리는 이들은 양민의 등골을 빼먹는 악인이었다. 세상의 인식이 흑도를 나쁘게 보는 건, 어떤 의미로는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작게는 무림의, 크게는 천하의 안위를 위한 임무입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임무이니, 부디 상황을 고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상황이 어떤지 우리는 모른다네.”
“그것은 저희와 얘기할 게 아니라 무림맹이나 묵룡부와 얘기해야 할 부분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직접 연락을 드려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여광의 눈이 깊어졌다.
“젊은 친구가 꽤나 배포가 있구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싸가지 없다는 말은 많이 들어도, 배포 있다는 말은 잘 못 듣는데 말입니다.”
“……흐음.”
여광이 턱을 치켜들었다.
홍적은 여광의 눈치를 살폈다. 딱 봐도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대사형이 얘기 중이라 끼어들지 않은 것뿐이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여광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도 맞네. 사실 자네가 보기엔 우리의 처사가 다소 갑갑하게 느껴질 테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대답 없는 대답이었다.
여광이 말을 이었다.
“우리도 불허(不許)라는 답만 가져온 건 아닐세. 해결책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삼가 듣겠습니다.”
“흑도 측 고수들이 섬서로 진입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 자네들의 임무를 돕겠네. 아직 자네들 임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종남이 나서서 돕는다면 자네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닐 걸세.”
뜻밖의 제안이었다.
확실히 섬서의 패권을 거머쥔 종남이 이번 임무를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뭐라?”
“오히려 종남이 나서지 않아 주기를 희망합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유는?”
“무림맹 군사님께 답변을 들으시면 될 겁니다. 저희로서는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종남의 도움이라는 것이 꼭 무력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앞마당인 만큼 정보력도 출중할 터. 그 정도 도움만 준다면 연호정으로서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연호정은 이들의 도움이 제 바람대로 이뤄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굳이 종남이 아니더라도 한 지역의 패자라면 자존심이 강할 수밖에 없다. 명목은 도움이지만, 도움을 넘어 자기들 식대로 처리하기 위해 과격한 행보를 보일 위험성이 다분했다.
나아가, 만에 하나 음제 주변에 삼교의 고수들이 있다면 그 또한 문제였다.
음제와 함께 있다면 삼교 측에서도 어중이떠중이를 보내진 않았을 터. 그들과 싸우게 되면 종남이 받을 타격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훗날의 전쟁을 위해서라도 전력을 온존하는 것이 좋은 판단이다.
게다가 이 일은 무력만으로 해결을 볼 만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말하자면 해결사가 필요한 상황이고, 그러기 위해 양천은 연호정을 보낸 것이다. 힘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무림맹에 연락하여 부대 몇 개를 보내라고 했을 것이다.
즉, 이모저모 따져 봐도 여광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호정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여광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눈치가 빠른 것 같은데, 자네라면 우리가 많이 양보했음을 모르지 않을 걸세.”
“저도 의아하군요.”
“무엇이?”
“종남이 무림맹 소속이라면, 제아무리 패권을 쥔 지역이라도 소속 조직의 명령을 거부해선 안 될 것입니다. 하물며 부당한 명령도 아닙니다.”
“맹에서 공문이라도 보냈다면 또 모르겠지. 하지만 이번 임무는 묵룡부에서 받은 것 아닌가?”
“그래서 방해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방해?”
“무림맹과 묵룡부의 동맹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자유지만, 조직 체계를 안다면 지금 선배님이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호오?”
“죄송하지만 저희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요.”
번쩍!
연호정의 두 눈에 신광이 어렸다.
“길을 열어 주십시오.”
“……안 된다면 어쩔 텐가?”
“더 이상 떠보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군요. 대답을 바랍니다. 길을 여실 겁니까? 아니면 끝까지 막으실 겁니까?”
여광의 얼굴에도 기어이 노기(怒氣)가 어렸다.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네들은 절대 섬서로 넘어올 수 없네.”
“유감입니다.”
연호정의 손이 뒤로 향했다.
우우우우우웅!!
팔십 근 통천부가 벼락처럼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