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45화 (644/963)

645화. 소리는 어디로 (5)

“갔는가?”

“그렇습니다.”

아들이지만 동시에 가주였다.

분명한 사석이 아닌 이상, 당형은 당관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다.

당형이 한숨을 쉬었다.

“음제 하은교라…… 한 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지.”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의 독과 암기는, 어떤 의미론 중원 무림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축에 속합니다. 하지만 음공만큼은 아니지요. 음공을 제대로 다루는 자, 온 무림을 통틀어 반의반 줌도 되지 않을 겁니다.”

“건너 건너 들은 얘기는 있네. 음제의 무공은 중원의 그것과 궤를 달리한다고 하였어. 음공이 주력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성품이 온후하고 예술을 사랑하며, 속세의 일에 어지간해서는 나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서도 본인이 나선 줄 모르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으셨는가?”

“용두방주입니다.”

“용두방주라…….”

당형이 피식 웃었다.

“그 늙은이는 잘살고 있나 모르겠군.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늘.”

비록 무극을 열진 못했지만, 용두방주 화진천의 연배는 당형과 비슷했다.

그 연배에 현역으로 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선에서 물러나 편안한 노후를 보내도 괜찮을 텐데, 참 열정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음제는 어디에 있다고 하던가?”

“묵룡부 측의 정보를 따로 받고 움직인다고 해서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듣기로는 섬서 인근이라 하였습니다.”

“섬서라…….”

당형이 눈살을 찌푸렸다.

“골치 아픈 동네로고.”

섬서성에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다.

중원은 열 개가 넘는 성(省)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 성 하나하나의 규모가 어지간한 소국(小國)과 맞먹었다.

당가가 사천의 제왕이라 불리는 이유도 사천 땅이 그만큼 넓기 때문이다. 그저 힘이 강해서 제왕이 아니라, 사천 전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가문인지라 실제로 왕(王)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섬서는 사천과는 달랐다.

사천의 청성과 아미는 전통적으로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섬서의 화산과 종남은 적극적으로 민사에 관여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 많은 문파 중 화산과 종남에 선을 대지 않은 문파가 없을 지경이었다. 각자가 뚜렷한 개성을 지닌 사천의 문파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었다.

당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연호정 그놈, 얼핏 막 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치밀하게 계산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상황을 이끄는 데에 능한 녀석입니다.”

“음.”

“이번에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적어도 화산이나 종남 때문에는요.”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에 불미스러운 일이 끼어들면 훗날 골치가 아파질 걸세.”

“그도 그렇긴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 대수가 무극을 열었다는 것인데.”

당관이 은근하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현재 싸가지, 아니 연호정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당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갓난아기지. 다만 누워서 팔다리나 겨우 놀릴 줄 알아야 하는데, 벌써 기어 다니는 것이 놀라울 뿐이야.”

“그렇군요.”

“그리고 두려운 것은, 기어 다니는 아기의 주먹질에도 뼈가 부러질 수 있다는 건데.”

당관의 눈이 반짝였다.

“한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당형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모르겠네. 연 대수는 참으로 독특한 사람이야. 분명 이제 막 무극을 개방한 것이 분명하거늘, 진기 운용이나 전투술만큼은 성천의 고수들과 비벼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네.”

“……!”

“하지만 어이없는 곳에서 실책을 저지르기도 하더군. 무극을 연 고수답지 않게 말이야.”

“그럴 녀석이 아닌데…….”

“만약 가주께서 지금 무극을 개방하면, 당장에 연 대수보다는 한 수 위일 것이 분명하네.”

“예?”

깜짝 놀랄 만한 말이었다.

당형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무극을 열고 성천의 반열에 오르긴 했는데, 뭔가 속이 비어 있어. 실력의 모자람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의 부재에 가까운데, 그것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

“…….”

“굳이 말하자면 여기와…….”

검지로 머리를 툭툭 친 당형이 이내 자신의 명치를 두들겼다.

“여기의 조화가 안 이루어진 듯한 느낌이랄까.”

“…….”

“번뜩이는 깨달음이 아닌, 힘으로 이 경지를 열어 버린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었네.”

당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싸가지 그놈의 경지가 반쪽짜리라는 말씀이신……?”

“아니, 반쪽은 아니야. 반쪽일 수가 없지. 어중간하게 올라설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네.”

“……?”

“말하자면…… 정신과 육체가 괴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네. 어떻게 보면 이 경지에 지극히 익숙한 것 같은데, 또 달리 보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도 있고.”

당형이 입맛을 다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만큼이나 이룬 경지도 독특하기 그지없더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형이 아는 무극과는 전혀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워낙 눈치가 좋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니 금방 자신의 길을 찾겠지. 무공만큼이나 번뜩이는 기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더구먼. 내 걱정도 곧 무의미해질 게야.”

“그렇겠지요.”

당형이 웃으며 당관을 보았다.

“가주께서는 질투가 나지 않는가?”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나겠습니까. 다만, 지금 저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면, 저 역시 뒤처지지 않도록 날아올라 봐야지요.”

“가주는 오를 수 있을 걸세. 충분히.”

“그래야지요.”

두 사람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습한 날씨지만, 하늘은 제법 맑았다.

* * *

‘한중(漢中)과 태백(太白) 사이, 섬서 사람들이 용안산(龍眼山)이라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호미곡(虎尾谷)이라는 골짜기가 있지요. 현재 음제는 그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달리던 중, 묵룡부의 정보원 하나에게 전달받은 정보는 꽤 상세했다. 연호정 일행이 사천의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묵룡부는 끊임없이 음제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과연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한 지역을 통째로 뒤질 필요는 없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래서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혼자 있나?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거기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오가는 사람들의 말과 소문을 취합해 본 결과, 정체불명의 무림인들이 그곳 인근에 자주 출몰한다고 하였습니다.’

‘정체불명이라…….’

‘아직 화산과 종남도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본인들의 앞마당인 만큼, 수상쩍은 무리의 존재를 인지하는 건 시간문제가 아닐지 싶습니다.’

연호정은 속으로 정보원의 말을 부정했다.

‘모를 리가 없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묵룡부의 정보력은 분명히 대단하다.

하지만 한 지역의 패자들보다 빠를 수는 없다. 백번 양보해서 음제의 존재는 모를 수 있지만, 수상한 무림인들이 오간다는데 천하의 화산과 종남이 그걸 모를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급하다.’

두두두두두.

일행이 탄 말의 속도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하나같이 여느 말보다 덩치가 크고 다리가 길쭉했다. 체력과 기동성이 뛰어났고, 그 긴 다리로도 방향 전환 능력이 대단했다.

하물며 팔십 근의 중병을 이고 있는 연호정을 태우고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아마 사천 최고 품종의 말을 고르고 골라 준비했을 것이다. 그것도 전투 경험이 꽤 많은지, 몸 여기저기에 훈장 같은 자잘한 상처들이 많았다.

연호정은 당관의 배려에 감사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슬슬 쉬는 게 어떻겠나?”

황석태의 말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일행은 적당히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 말을 세우고 건초를 먹였다.

날이 어두웠다. 슬슬 가을도 다 지나가는지 바람이 제법 매서웠지만, 사천 특유의 덥고 습한 공기 덕에 서늘하진 않았다.

“이틀 정도 더 가면 사천을 벗어날 수 있겠군.”

패율이 지친 얼굴로 물을 마셨다.

강량이 은근슬쩍 물었다.

“지치십니까?”

“몸이 근질거려. 차라리 신법을 펼쳤다면 좋았을 거다.”

강량이 무종을 돌파하며, 일행 모두가 초절정고수 이상의 실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 정도 경지라면 말보다도 빠르게 달릴 수 있다. 거리가 멀수록 말의 기동성을 따라잡을 순 없겠지만, 한 지역과 지역 사이라면 오히려 초절정고수의 신법이 더 빠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시간이 다급해도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 있다. 일행에게는 그것이 체력이었다.

“나는 잠시.”

연호정이 통천부를 들고 일어났다.

강량이 물었다.

“어디 가세요, 형님?”

연호정이 몸을 돌리며 답했다.

“명상.”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일행이 보이지 않는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강량이 콧방귀를 뀌었다.

“저 양반도 참, 저만한 경지에 올랐으면서도 뭔 명상이래? 답지 않게.”

투덜거리던 그가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쩝.”

어느새 황석태는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양 무릎 위에 길쭉한 적룡신창을 얹은 모습이 마치 수행자를 보는 것 같았다.

‘흑도 최강, 최악의 부대를 이끄는 사람이.’

강량이 콧방귀를 퍽퍽 뀌어 대다 다시 패율을 바라보았다.

패율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봐?”

“체력 보존하려고 말을 타는 건데 그렇게 지친 기색을 보이시면 어쩝니까?”

“내가 무슨 낯짝을 하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보는 사람도 힘 빠지잖아요.”

“……요놈 봐라?”

패율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무종지벽 하나 넘었다고 이제 뵈는 게 없냐?”

“넘기 전에도 뵈는 건 없었죠.”

“뭣이?!”

“새삼스럽게 뭘 그러십니까? 정 답답하면 저랑 한판 하시겠습니까?”

패율이 강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후회하지 않겠냐? 꼴에 깨달음 좀 얻었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모양인데, 이전처럼 봐주지 않아.”

“봐주면 당할 텐데?”

“……따라와, 이 자식아!”

강량이 환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 아주 일품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도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연호정이 향한 곳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황석태가 눈을 떴다.

“시끄러운 사람들이로군.”

나무에 등을 기댄 황석태가 적룡신창을 만지작거렸다.

명상에 잠긴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속으로 생각이 많은 그였다.

‘음제라.’

황석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상부의 명령으로 연호정을 따라나서긴 했지만, 지금까지 오면서 그는 자신의 무공을 많이 돌아보았다.

‘음제 주변이 시끄럽다고 했지. 정체 모를 무림인들이 많다면, 싸움이 벌어질 확률도 높다는 건데.’

황석태가 한숨을 쉬었다.

‘영 실력 발휘가 안 되는군.’

낙원소 고수들과의 접전, 그리고 당가 내에서의 전투.

탁 트인 개활지에서의 일대일 정면 승부에 특화된 그에게는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하지만 황석태는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전투를 치르며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다.

‘일대일, 전면전. 세상 싸움은 그리 정정당당하지 않다는 거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부대를 이끌면서 어느새 그러한 싸움에 무뎌진 모양이었다.

‘바뀌긴 바뀌어야 해. 도움은 못 될지언정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될 테니.’

황석태가 숲을 힐끔거렸다. 연호정이 향한 방향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결심한 얼굴로 일어날 때였다.

쩌어어어어엉!

살벌한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반대쪽에서 터져 나왔다.

“강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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