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화. 소리는 어디로 (4)
다음 날.
“얼씨구.”
패율이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무공 수련한답시고 선배도 등한시하던 후배님께서 오늘은 어인 일로 찾아오셨는가?”
연호정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삐치셨습니까?”
“누가 삐……!”
울컥하던 패율이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됐고, 단기 강습은 잘 받았냐?”
“예. 모자란 저를 위해서 노선배님이 고생 좀 하셨지요.”
“좋겠다, 이놈아. 천하제일인한테 가르침도 받고.”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선배님이 천하제일인이라고요?”
“천하제일인이나 다를 바 없지. 신선제왕에 속한 누구라도 천하제일을 다툰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의미였군요.”
“직접 싸워 본 적들은 없는 만큼, 누가 누구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를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진정한 천하제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그분들보다 한참 멀었다는 건 알겠습니다.”
“당연한 것 아니냐. 절정고수들끼리도, 초절정고수들끼리도 격차가 하늘과 땅을 오가는 판국이다. 하물며 무극을 개방한 자들끼리는 더하겠지.”
이 또한 맞는 말이면서도 틀린 말이었다.
무극을 개방한 고수들 사이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격차는 몹시 얇은 종잇장과도 같았다.
다만,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를 넘는 게 평생 불가능할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론 종이 한 장 차이기에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다.
무극을 연 고수들이라도 싸움의 변수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무극을 개방하지 못한 고수들 간의 변수보다 훨씬 클지도 몰랐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경지. 그래서 무극은 외롭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에 묵룡부주가 백병신군에게 그랬지요. 너와 나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고. 그러자 백병신군이 말했습니다. 태산보다도 두꺼운 종이 한 장이라고.”
“어려운 말이로군.”
“인식에 따라 진짜 종이가 될 수도, 산봉우리처럼 크고 두꺼운 종이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와 그들 간은 종이 열댓 장 차이가 날 겁니다.”
“난 그런 복잡한 거 몰라, 인마.”
참으로 패율다운 말이었다.
“그래서, 이제야 꾸물꾸물 기어 온 건 나갈 때가 됐다는 뜻이렷다?”
아무리 후배라도 무극을 연 고수인데, 연호정을 대하는 패율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연호정은 그래서 패율이 좋았다. 패율의 저 일관적인 태도는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예, 슬슬 마지막 임무를 따내러 가야겠습니다.”
패율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음제에게 간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길 자신 있냐?”
“음제한테요?”
“그래.”
“초절정고수끼리보다 더 격차가 클 거라고 말씀하신 게 조금 전입니다만.”
“그건 내 시선이고. 그리고 자신을 갖는 건 별개의 얘기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힘 대 힘의 싸움이라…… 사실상 제게 승산은 없습니다.”
“빌어먹을, 역시 그렇군.”
“그나저나 벌써 싸울 생각을 하십니까?”
“음제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잖냐. 얘기로 잘 풀린다면 몰라도, 최악의 경우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그렇지요. 한데 선배는 싸우는 거 좋아하시잖습니까.”
패율이 대놓고 으르렁거렸다.
“주먹과 주먹, 칼과 칼이 부딪치는 싸움이야말로 생사의 간극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무사들의 유일무이한 재미다. 독을 살포하고 암기나 뿌리는 무리하고 붙는 게 무슨 재미가 있어? 하물며 음제잖냐? 소리로 사람을 죽여? 퍽이나 재미있겠다.”
그때였다.
“그냥 듣고 넘기기 어려운 말이로군.”
순간 패율이 움찔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어느새 귀신처럼 등장한 당관이 무뚝뚝한 얼굴로 패율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본가를 그렇게 보고 있을 줄 몰랐군.”
“오해하지 마시오. 당가를 나쁘게 보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내 싸움관이오.”
“변명인가?”
“변명 같은 거 안 키우는데? 실제로 재미없잖소? 어디에 독을 풀고, 언제 암기를 날릴지 다 계산해서 싸우잖아. 나한테는 안 맞소.”
전보다 부드러워졌다고는 해도 당관은 당관이다. 사천 당씨 문중의 주인 앞에서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당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에게는 받은 은혜를 안 갚아도 되겠어. 지금 그 발언을 그냥 넘긴 것으로 목숨 한 번 살려 준 거거든.”
패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도움 준 것도 없는데 차라리 잘됐소이다.”
“다음부터는 입조심하는 게 좋을 게야. 소리 소문도 없이 죽고 싶지 않다면.”
“그래서 싫소. 소리 소문 없이 죽이는 이들과는 싸움이 안 되잖아.”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패율이었다.
당관이 또 한 번 콧방귀를 뀌었다. 그냥 흘려듣고 넘기기에는 참으로 건방진 말이었지만, 패율이 당가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찾아뵈려고 했는데, 어찌 직접 오셨습니까.”
“널널해서 직접 왔다. 그리고 자네들, 여기서 시간깨나 뺏겼잖나.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 가주전까지 올 바에야 냉큼 떠나는 게 나을 거야.”
드르륵, 드르륵.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저 멀리 수레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수레를 끌고 오는 사람은 강량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황석태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강량이 투덜거렸다.
“이걸 왜 나 혼자만 끌고 있는 겁니까.”
황석태가 말했다.
“힘들면 말해라.”
“……안 힘들어요.”
“그럼 혼자 끌어라.”
묘하게 친분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그렇게 강량이 수레를 끌고 도착했다.
수레 안에는 보자기로 잘 포장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큼직한 병장기 하나가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저건?”
“네놈 거다.”
당관이 직접 그 병기를 집어 들었다.
병기를 들자 수레가 출렁였다. 그 병기의 무게가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창대의 길이만 육 척, 거대한 외날 도끼의 끝에는 창날까지 달린 살벌한 대부(大斧)였다.
“네 녀석이 쓰던 광룡부인가 하는 양인부(兩刃斧)와는 다를 거다. 그래도 무게는 얼추 비슷할 테고, 병장기 다루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니 다루기 어렵지도 않을 게다.”
연호정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모용가주를 시켜서 광룡부를 받기로 했습니다만.”
“그래서, 그걸 받은 뒤에야 음제를 만나려고?”
“그건 아닙니다.”
“한시를 다투는 상황이라는 걸 모르지 않아. 그런데도 자네들은 여기에 남아서 우릴 도왔어. 마음 같아선 더한 걸 해 주고 싶지만, 당장은 우리도 여력이 없어서 이런 것밖에 줄 수 없군.”
당관이 연호정에게 대부를 건넸다.
“받아라.”
연호정이 공손히 대부를 받았다.
당관의 말이 맞았다. 이 대부의 무게는 광룡부와 거의 비슷했다. 양인부가 아니다 보니 도끼날 쪽의 무게 중심이 달랐지만, 그 정도야 사용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형과의 비무에서 썼던 철추와는 전혀 다른 병기다. 전장에서 휘두르기에 딱 좋은 형태였다.
“급하게 만든 건 아니고, 본가의 창고에 있던 물건이다. 통천부(通天斧)라고 하지.”
“통천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름과는 달리 최상품(最上品)이라 할 만한 물건은 아니다. 광룡부나 흑백쌍룡부에 비할 수는 없어. 그래도 단기 결전에서 쓰기에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당관의 말대로였다.
광룡부는 최고의 장인이 만든 희대의 명품으로, 가히 신병이기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흑백쌍룡부와 동급의 병기인 것이다.
반면 이 통천부는 그 세 도끼보다 확실히 급이 낮았다. 명인이 만든 것 같긴 했지만, 재질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그래서 좋군.’
언제나 신병이기를 들고 싸운다면 그게 어찌 제 실력이라 할 것인가.
이 정도 중병이면 재질을 떠나 무게 자체가 위협이다. 그러나 연호정 역시 알게 모르게 광룡부나 흑백쌍룡부의 재질에 익숙해진 면이 있을 것이다.
돌발 상황에서 본신의 힘을 뽐내기에도 좋고, 수련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지금의 연호정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때, 황석태가 입을 열었다.
“통천부라면…….”
모두가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황석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산신마(蓋山神魔)의 그 통천부?”
당관이 의외라는 듯 황석태를 보았다.
“개산신마를 아나?”
“아오. 흑도의 전대 고수 중 하나니까. 홀로 활동했지만, 실력만큼은 대문파 수장한테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들었소.”
“틀린 말은 아니지. 전대 청성 장문인과 삼백 합을 겨루고도 승패가 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그 고수의 물건이 왜 당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오?”
“왜일 것 같나?”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당가를 건드렸군.”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전이 더디다고 청성에 시비를 건 이후 용케 살아서 본가에 왔지. 수장과 한판 승부를 원한다고 했었다.”
“……?”
“당시 가주가 아버지셨지.”
진짜 불쌍하군.
모두의 머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암왕 당형은 무극에 오르기 전에도 천하에서 손에 꼽힐 만큼 위험한 고수라고 정평이 나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고수에게 승부를 논하자고 했으니, 죽음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설령 당형을 이겼어도 분노한 당가인들의 손에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 버렸을 테지만.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른 놈이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슬리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인 미친 살인마지.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악적의 호승심과 발전을 위해 목숨을 건 태도 하나만큼은 본받을 만하다고 하셨다.”
통천부.
좋은 병기지만, 만듦새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거창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에는 개산신마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통천(通天)은 개천(開天)이고, 이는 곧 하늘을 열어 비상하고자 했던 개산신마의 꿈과 욕망이 담긴 것이다.
연호정이 통천부를 어깨에 걸쳤다.
“좋은 무기, 잘 받았습니다.”
“잘 만들어졌지만, 꽤 오래된 물건이다. 대충 보완은 했으나, 성천의 고수와 부딪치게 된다면 십중팔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야.”
“충분합니다. 게다가, 실제로 싸울지 어쩔지도 모르고요.”
“그 도끼는 희대의 살인마가 쥐고 흔들던 물건이지만, 무공이든 병기든 결국 주인의 의지에 따라 선기(仙氣)를 띠기도 하고 마기(魔氣)를 띠기도 하는 법이지. 다 늙은 병기(老兵)지만, 마지막만큼은 화려하게 보낼 수 있도록 제대로 날뛰어 봐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관이 턱으로 후문 방향을 가리켰다.
“말을 준비해 두었다. 안내해 주지.”
“가주님.”
“음?”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당관이 피식 웃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당대에 또 한 명의 절대고수가 탄생한 것을 목도하게 될 거다.”
외원의 후문, 말을 타고 떠나는 연호정 일행의 뒷모습은 자유분방하고도 위풍당당했다.
뒷짐을 진 채 그들을 보는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죽지 마라.’
저들에게, 특히 연호정에게는 큰 빚을 졌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연호정이 위기에 빠지면 당가 전체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다. 실로 그럴 만한 은혜를 받았다.
다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쉬웠다. 이번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한 손 보태고 싶었지만, 그는 당씨 문중의 주인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무수히 많은 목숨이 실려 있다. 그 책임감이 새삼 막중하게 느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연호정 일행은 한참 멀어져, 이제 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문을 닫아라.”
“예.”
쿠구궁!
문이 닫히자 당관도 몸을 돌렸다.
떠날 사람은 떠났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이제 각자의 전장에서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도록 치열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용두방주에게 서신을 보내라. 술자리 한번 갖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