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43화 (642/963)

643화. 소리는 어디로 (3)

사방무제(四方武帝).

삼백 년 전, 중원 무림 역사상 최악의 적이라고 알려진 혈교(血敎)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전설 같은 활약을 한 희대의 고수.

일각에서는 사방무제의 무력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감이 있다고, 자신을 드러내는 전장에만 참여하여 적장의 목을 날렸기에 실질적인 무력이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사방무제의 명성을 높여 준 전장의 적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방무제가 직접 싸운 적들은 당시 중원 무림의 어떤 고수도 맞상대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강적들이었다.

사방무제는 그런 적들을 모조리 해치웠다. 박빙의 승부도 아니고, 거의 모든 적을 압도하다시피 이기며 적들의 사기를 꺾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사방무제는 중원 무림이 내보일 수 있는 최강의 선봉장이자, 혈교 측에선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패의 무신(武神)이었다.

그렇게 혈교지란이 종식된 이후, 사방무제는 무림인들의 환호를 뒤로 하고 이름 모를 야산으로 들어가 조촐한 삶을 살았다.

전후, 모종의 일로 그를 찾아간 무림인들은 그가 신선의 영역에 도달해 신수(神獸) 황룡(黃龍)을 다루는 것까지 보았다고 한다.

해서 말년에 그의 별호는 황룡제(黃龍帝)가 되었다. 사방무제라는 별호가 워낙 유명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토록 유명한 사람이지만, 실제로 그의 성품과 무공에 관해서는 제대로 전해지는 바가 없었다. 그가 어떤 것을 좋아했고,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살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연호정은 사방무제라는 존재조차도 몰랐다.

어쩌면 살면서 지나치듯 몇 번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에 담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상관없는 정보는 모조리 쳐 내 버렸다. 그가 지닌 기억의 공간에는 죽어 간 전우들의 비석이, 그리고 앞으로 죽어 갈 전우들의 가무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사방무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제갈아연 덕분이었다.

공방과 회피, 반격에 압도적인 능력을 지닌 조화로운 무공을 사용했다는 고금제일인.

훗날 황룡제라 불리며 살아서 신이 되었다는, 전설을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 불세출의 강자.

그리고 그 기억은 광동 불산에서 다시 살아나, 과거를 벗어던지고 불사의 비밀을 파헤치는 무명의 노인들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받았다.

사신무(四神武)는 사방무제의 무공이다.

그리고 연호정은 그 무공을 이었다.

말하자면, 연호정은 고금제일인 사방무제의 진전을 이은 자였다.

아직은 몇몇 사람을 제외한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에 관련한 얘기를 당형이 꺼내고 있다. 연호정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무제를 아십니까?”

당형이 피식 웃었다.

“허리에 칼 차고 다니는 놈 중에 사방무제 모르는 놈이 있을까. 저잣거리 애들도 사방무제의 신화는 안다네.”

연호정은 괜스레 머쓱해졌다.

“그렇군요.”

“하나만 묻자고 했는데 자꾸 묻게 되는군. 하면, 자네가 연성한 무공이 사신무(四神武)가 맞는가?”

연호정의 얼굴에 또 한 번 놀라움이 어렸다.

“사신무를 아십니까?”

그는 자신의 무공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소문이 난다고 대응할 수 있는 무공도 아니었다. 일정한 형식이 없는 공부니까.

당형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정말이었군. 자네가 연성한 무공이 사신무고, 나아가 사방무제의 전인이 맞았구먼.”

“어떻게 그걸……?”

당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고문서에서 본 내용일세.”

“고문서요?”

“스스로를 유폐하기 전, 나는 본가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다 보았지.”

“……예?”

“단 한 권도 빼지 않았어. 새로 구비한 책이 있으면 그것까지 다 읽었네. 대부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부 읽었지.”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많은 책을 다 읽으셨단 말입니까? 몇 권이었길래요?”

“무공 서적을 제외하면 이만 하고도 칠천오백육십구 권이었지.”

“……?!”

이 양반이 지금 사람을 놀리나.

“장난하지 마십시오.”

“…….”

“……진짭니까?”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자랑도 아닌데.”

“자랑이라면 자랑이죠.”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어도 자식과 싸워서 이십 년 동안 절연했네. 책 많이 읽은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머리에 담은 지식으로 무엇을 했느냐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놀라움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 많은 책 중 얇은 책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두껍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의 책도 많았을 것이다.

하루에 열 권씩 읽는다 해도 이천칠백 일이 넘게 걸린다. 연수로 따지면 팔 년에 달하는 시간이다.

꼬박 팔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열 권을 읽어야 그 많은 책을 다 볼 수 있다.

무공 수련도 해야 하고 가내 일도 처리해야 하는 사람이 그런 게 가능할까?

“이거지.”

연호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한 듯, 당형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무극에 오르기 전에도 내 상단전은 남들보다 훨씬 방대하고 활발했네. 무극을 개방한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지.”

“아……!”

“상단전 활용에는 여러 방법이 있네. 나는 그것을 이용해 독해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렸지. 두꺼운 책 한 권을 읽는 데에 반 각도 안 걸렸다네.”

“그걸 다 기억하십니까?”

“다는 못 하지. 그래도 반 이상은 기억하네.”

무극의 경지에 도달한 것보다, 삼만 권에 가까운 책의 내용 중 절반 이상을 기억한다는 게 더 대단해 보였다.

“이야기가 좀 샜군. 여하간 본가의 고문서 중에는 삼백 년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해 기술된 게 몇 권 있었네. 그중 사방무제와 그의 무공 사신무에 대해 적힌 것도 있었지.”

“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모르냐고? 모를 수밖에 없지. 외국(外國)의 언어로 쓰인 거니까. 범어(梵語)의 일종인데, 그것도 땡중들이 아는 범어보다 더 고대의 것이라네. 글자가 달라.”

당형이 입맛을 다셨다.

“그거 해석하느라고 고생 좀 했네. 문제 하나를 풀지 못하면 절대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라, 이 년이 넘도록 석학들을 초빙해서 어떻게든 해석하긴 했네만.”

“허.”

“여하간 고문서를 해독해서 많은 것을 알아냈다네. 다만, 굳이 소문낼 일도 아니어서 기억만 하고 있었지.”

“그렇군요.”

“한데 한 가지 의문이 들더군.”

“예?”

“고문서에 적힌 내용은 제법 상세하고 생생했네.”

“……?”

“왜 굳이 고대 범어로 기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작성자는 그 시대 사람임은 물론, 혈교와의 싸움에 직접 뛰어들었던 사람이 분명하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방무제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게 없잖습니까. 무시무시한 실력을 제외하곤 말입니다.”

“그렇지.”

“한데 사방무제가 사신무를 연성했다는 걸, 필자는 어떻게 알았답니까?”

“그야 알 수 없지. 사방무제라고 홀로 고고하기만 했겠나. 친분을 나눈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지.”

“음, 그렇군요.”

“다만, 그 사서(史書)의 필자는 혈교와 사방무제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네. 모르는 글자가 많아서 다 해석이 된 건 아니지만…… 사방무제를 타인처럼 언급하면서도 마치 사방무제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것처럼 쓴 내용도 많았어.”

“……?!”

“어쩌면, 사방무제 본인이 직접 작성한 사서일지도 모르겠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굳이 고대 범어로 작성한 것이 의문이지만, 그 고문서들은 분명 대단한 보물이다. 하물며 사방무제가 직접 작성했다면,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 참, 얘기가 자꾸 다른 데로 새는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

“윤이에게는 그 문헌에 나오는 내용들이 허황된 것이라 하였네. 괜한 호기심에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라 생각해서 그리 말했네만, 그중엔 정말 허황된 내용도 있었네.”

“……?”

“사신무를 연성한 자가 천지의 수호신인 황룡(黃龍)을 다룰 수 있다더군.”

“……!!”

“또한 네 가지의 무공, 네 가지의 진기로 완벽한 형태의 전투 능력을 구사했지만, 완벽함이란 곧 자연스러움의 극치라 아무나 연성할 수 없는 무공이라고도 했지.”

당형의 눈이 빛났다.

“더하여 그 완벽한 무공을 진정 완성했다고 여길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그냥 그렇게 적혀 있었을 뿐이야. 황룡을 다룬다니, 어이가 없었지.”

“완성했다고 여길 때가 가장 위험하다……?”

“당시 나는 제왕독경을 창안하던 중이었네. 이 무공을 천하제일의 무공으로 만들고 싶었어. 황룡이니 뭐니 하는 건 관심도 없었지만, 그 문구만큼은 이상하게 내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네.”

당형이 씁쓸하게 웃었다.

“실수였지. 제왕독경은 사신무가 아니야. 이미 완성되었는데도, 그 문구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만족을 모른 채 그 너머를 추구했다네.”

“…….”

“그래서 이런 몹쓸 병마를 얻었지.”

아니다.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당형이 병마를 얻은 이유는 제왕독경에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단순한 당형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사신무에는 받침이 있다.’

완성을 탈피하고 나아간다?

완성은 완벽하니 완성이라 하는 것이다. 그에 도달하면 그 이상은 없다. 그래서 완성이다.

만일 완성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예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른 영역을 받쳐 줄 만큼의 방대한 기술 체계와 힘이, 사신무에는 존재한다.

‘황룡신왕공!’

그렇다.

하나도 아닌 무려 네 개의 진기로 육신을 완벽의 상태로 만드는 것.

그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의 순간을 완성하는 것.

사신무는 완성의 무공이고 자유의 무공이다. 그래서 그 이상인 황룡을 넘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당형의 제왕독경은 천하제일의 독공임은 분명하지만, 무공으로서 완성되었을 뿐 그 이상을 넘볼 수는 없다.

애초에, 그 이상을 넘보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형은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병을 얻은 것이다.

다른 차원의 힘을 얻기 위해 버텨야 할 육신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번쩍!

연호정의 눈에서 강렬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마치 계시처럼 당형의 실패 원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연호정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왜지?’

나는 암왕의 경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어떻게, 이 사람이 병을 얻은 이유를 이리 확신할 수 있는 거지?’

훅!

순간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아아!’

당형이 병을 얻은 이유, 그것을 확신하는 자신.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순간, 빛처럼 다가오던 한 줄기 깨달음이 무서운 속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잠에서 깨면 꿈의 내용을 더듬다가도 차츰 잊어버리는 것처럼.

“이보게.”

“……예?”

“괜찮나?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괜찮습니다. 갑자기 뭔가 떠올라서.”

“그렇구먼.”

당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가 되었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자네 무공의 근본을 되돌아보라는 것.”

“……?”

“사신무는 네 개의 진기를 이용한다 했네. 그 하나하나가 특출난 역량을 발휘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자네가 신경 써야 할 진기가 네 가지나 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제대로 팠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네.”

연호정은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신기 모두를 하나하나 분명하게 팠다고.

하지만 당형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하게, 확실하게 알았다고 언제부터 생각했을까?

나는 정녕 사신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극치를 본 이들이 그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고민과 사유가 생활화되어야 하네. 하나, 해도 해도 답이 안 나온다면 결국 자네가 돌아가야 할 곳은 근본(根本)이야.”

“…….”

“그것만 잊지 말게. 그 말을 해 주고 싶었어.”

물끄러미 당형을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놀랍진 않으십니까?”

“무엇이?”

“아무도 모르는 사방무제의 무공을 이은 자가 있는데, 그것이 그리 놀랍진 않으십니까?”

“놀랍지. 한데 그게 왜?”

“저 같으면 삼백 년 전의 무공이 궁금해서 이것저것 캐내고 싶을 것 같습니다.”

“자네 성격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당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금제일인의 무공이지만, 그 무공을 익혀서 고금제일인이 된 게 아니야. 최고의 무공은 어디에든 있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연성한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가이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노선배의 말씀이 실로 옳습니다.”

당형이 몸을 돌렸다.

“떠나기 전에 한번 들르게. 밥이나 한 끼 하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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