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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42화 (641/963)

642화. 소리는 어디로 (2)

다음 날.

“흐음.”

의관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연호정의 눈에 모용군이 보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 일찍부터 내 거처엔 어인 일로?”

모용군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담담한 눈빛이었다. 혼란이 완전히 걷히진 않았지만, 이전처럼 갈 길을 잃은 기색은 아니었다.

모용군이 말했다.

“슬슬 떠날까 해서.”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벌써 말이오?”

“뭐, 마음 같아서는 이 기회에 음제의 얼굴도 봐 두고 싶지만, 그건 자네 일이지 내 일이 아니지 않나?”

“…….”

“내 칼질이 도움이 된다면야 고려는 해 보겠네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됐소. 꾸역꾸역 도움을 청할 정도는 아니오. 당신 하나 간다고 일이 더 쉬워질 것 같지도 않고.”

받아들이기에 따라 꽤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모용군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자칫 잘못하다간 무력 충돌도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인데, 무극을 개방한 초고수의 격전에서 그에 도달치 못한 자들의 도움은 무의미하지.”

흥미로운 반응이군.

연호정이 팔짱을 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오. 그나저나, 예상보다 빨리 뜨는 것 같소?”

“자네에게는 자네 할 일이 있듯, 내게도 나만의 일이 있으니까.”

가만히 모용군의 얼굴을 살피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째, 당분간 하던 일 내려놓고 본분에 힘쓸 생각인 것 같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가주로서의 본분을 말하는 것인가?”

“무림인으로서의 본분 말이오.”

“그거야 상황을 잘 봐야겠지.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어디 벌여 놓은 일이 한두 개라야지.”

달라졌군. 확실히.

연호정은 모용군의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느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인사까지 하실 줄은 몰랐소.”

“이러나저러나 자네에게는 빚을 많이 지지 않았나.”

“빚이라…… 딱히 내가 손해 본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꼭 갚길 바라오.”

“그럼세.”

“하면, 맹으로 돌아가는 거요?”

“그렇다네.”

“언자방, 그 양반은 안 보이는데.”

“먼저 보냈네. 아직 자네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할 때는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겠지.”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부디 성공하기를 바라네.”

“나도 그러길 바라오.”

“듣기로, 음제 하은교는 중도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성품이 순후하고 자비로워 정도에 가깝다고 알고 있네. 세파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았을 뿐, 성향만 보면 흑도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어.”

“나도 그리 들었소.”

“다만, 세상은 뛰어난 자를 가만두지 않지. 바람은 어디에서나 분다네. 자네처럼 적극적으로 세상에 뛰어들지 않은 바에야, 대개는 그 풍파를 힘들어하지.”

“…….”

“고아한 나무가 되고 싶은 자들의 눈에는 삭풍에 긁힌 상처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네. 그런 건 별거 아니라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질책하지는 말게나.”

연호정이 얼굴에 의외의 빛이 어렸다.

“음제에 대해 잘 알고 있소?”

“모르지. 만난 적도 없네. 풍문으로 들은 소문이 전부야.”

“하지만 듣자 하니, 어째 음제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지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은 몰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아니까.”

“…….”

“최고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뛰어들지 말아라, 이왕 뛰어들려면 어중간하지 말아라…… 딸내미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지.”

연호정은 모용군의 말을 깊이 새겨들었다.

너무 단정적인 말이 아닌가 싶지만, 실제로 세상은 그러했다. 잘난 사람을 발견하면 어떻게든 소문을 내고, 소문이 나면 세상은 그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세상 그 자체를 상대할 만한 배포가 없다면,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결국 세파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음제의 성향이 소문대로라면, 모용군 말마따나 제법 복잡할 상황에 처했을 확률이 높았다.

삼교 입장에서는 성천이야말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적이니까.

회유든, 제거든.

“성공하게. 보란 듯이 성공해서,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게.”

“알겠소.”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면, 즉 만에 하나라도 음제가 변절한 것 같다면.”

번쩍!

모용군의 눈에 은밀한 살기가 어렸다.

“주저 없이 죽이게.”

“아직 삼교가 음제와 접촉했는지도 모르오.”

“했을 걸세. 자네도 짐작하잖나?”

가만히 모용군을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래야겠지. 내 힘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그 영역에 올라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만, 자네의 전투 능력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리라 보네.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다면 제일 좋겠지만.”

“쉽게 말하지 마시오. 단전 두 개를 봉인한 암왕 노선배에게도 무진장 깨지고 있으니까.”

“그건 자네가 목숨을 걸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비무를 보면 그런 말은 안 나올 거요.”

“자네의 본무대는 비무대 위가 아니라, 사태가 어찌 급변할지 모르는 실전 아니던가?”

“…….”

“답지 않게 앓는 소리 말고, 그래야 할 순간이 오면 이전처럼 거침없이 선택하게.”

“알겠…….”

“다시 말하겠네. 거침없이 선택하게. 상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괜히 힘든 길을 택하지 말게.”

모용군의 얼굴에 엄기가 어렸다.

“그 시간을 아끼는 것만으로도 훗날 벌어질 전쟁에서 아군 백 명이 살 수 있네. 자네의 선택이 천하에 미칠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기회를 주는 것은 사치야.”

“…….”

“자네가 그리 말하는 선은 전쟁에서 발휘되어야 할 게 아니야. 전쟁은 선 없는 자들의 싸움일세. 상대 상황 봐주다가는 내 사람들이 죽네.”

“…….”

“내 말, 꼭 명심했으면 하네.”

연호정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소.”

모용군이 표정을 풀었다.

“오늘 새벽에 연락을 받았네.”

“음?”

“무림맹으로 복귀했다더군. 의정군이.”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광동성의 일을 잘 마무리한 모양이군.”

“전해 주면 되겠나?”

“뭘 말이오?”

모용군이 턱으로 연호정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자네 도끼 말일세.”

“아.”

연호정이 엉덩이 위에 교차시켜 걸쳐 둔 흑백쌍룡부를 만지작거렸다.

“이걸로 충분하겠다 싶지만…….”

“…….”

“사람을 시켜서 보내 줄 수 있다면, 그리해 주시오. 다만 내가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시시각각 전해 줄 수는 없소.”

“개방을 시키면 되겠지. 어떻게든 전하기만 하면 되잖나.”

“그럼 나야 좋지.”

“알겠네.”

모용군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모용군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이 섰소?”

모용군의 걸음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평온한 기색으로 걸어가는 그의 등에 흔들림은 없었다.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고집 센 사람 같으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때로는 사소한 선택이 미래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기도 하고, 반대로 시커멓고 뻘겋게 물들이기도 한다.

과연 모용군의 선택은 그의 미래를 어떤 빛으로 물들일 것인가.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자신은, 그의 인생에 어떤 색을 칠하게 될 것인가.

연호정이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내 할 일이나 하자.”

* * *

쿵!

당형이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우리 수련은 끝일세.”

“……젠장.”

바닥에 처박힌 연호정이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어떻게, 제대로 한 대 날려 보지도 못하고 끝이 났습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녀석이 벌써 날아오르려 하면 안 되지.”

“아쉬워서 그럽니다.”

당형이 혀를 찼다.

“그게 자네의 단점이라면 단점이군. 어제까지만 해도 이십 합 내에 세 번을 당했네. 한데 오늘은 마지막 합에서야 한 번 당했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일세.”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아쉽습니다.”

피식 웃은 당형이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물끄러미 당형을 보던 연호정 역시 편히 앉았다.

당형이 말했다.

“이걸로 받은 은혜의 백분지 일 정도는 갚은 듯하네.”

연호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거창하신 거 아닙니까?”

“마음 같아선 나를 넘어설 때까지 따라다니며 가르쳐 주고 싶네. 그러고도 받은 은혜의 반도 갚지 못해. 내 기준에서는 그러하네.”

“참 감당키 힘든 분을 도와드렸습니다.”

“그래서 싫은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요.”

당형이 마주 웃었다.

“자네는 빨라. 빨라도 너무 빠르지. 그나마 지금은 빠름으로 남아서 다행이지, 빠름이 성급함이 되는 순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걸세.”

“세상 이치가 다 그러하지요.”

“잘 안다니 다행일세.”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진심으로요.”

“몸도 풀 겸 참견 좀 했을 뿐이야. 개의치 말게.”

웃으며 당형을 보던 연호정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당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연호정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어제도 한 번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암왕 노선배의 힘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봉인을 풀면 흑암제 시절의 나나 모용군에 필적할 거야. 오히려 무공의 기예(技藝)에 있어선 우리 둘을 넘어서겠지.’

당형의 무공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극치에 이른 섬세함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무공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섬세함으로 가득했다. 복잡한 상단전 운용을 시시각각 때에 맞춰 자연스레 풀어 쓰는 것만으로도 가히 역사에 길이 남을 성취라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검법의 고수가 도법의 고수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듯, 그저 가진 것을 활용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그렇다면 흑암제의 무공은 무엇이었나.

흑암제의 무공은 전진의 강함이었다. 빠르고 강하며, 변칙적인 무공이었다.

그것은 무극 개방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무공으로 흑도 역사상 최강의 무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때도 상단전 운용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 애초에 나는 그것을 육감, 약점 간파, 전투 능력 극대화로 이용했지, 직접적인 무공 구현으로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또한 다름이다. 연호정이 당형보다 경지가 낮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연호정의 무공에는 더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속수무책이야. 앞이 보이질 않는다.’

사신무는 완벽하다. 더 이상 고치고 말고 할 게 없다. 이제는 깊어지는 것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한데 그 완성된 칼날로 당형에게 유효타를 날리지 못한 것은 정말 의문이었다.

당형의 상단전 활용 능력이 너무 교묘해서?

사음교주의 상단전 활용 능력 역시 당형에 밀리지 않았다. 연호정은 그런 사음교주의 몸뚱이를 피범벅으로 만들어 버린 전신(戰神) 그 자체였다.

제아무리 그때의 경지를 되찾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마치 반쪽짜리 같아.’

무극을 개방했지만, 정작 무극을 개방한 고수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연호정을 보며 당형이 말했다.

“고민이 많을 때는 자신의 무공을 근본부터 들여다보는 것이 좋지.”

“…….”

“무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간 내심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네. 물어도 되겠나?”

“무엇을 말입니까?”

“자네, 사방무제라고 아는가?”

“……예?!”

“자네가 혹시 사방무제의 진전을 이었는가?”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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