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41화 (640/963)

641화. 소리는 어디로 (1)

밤이 되었다.

흐린 하늘, 조금은 줄어든 달빛이 구름에 번져 뿌옇게 보였다.

창밖으로 달을 보던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야 제법 사천의 하늘 같군. 구름이 많은 것이, 내일은 우중충하겠어.”

습도가 높다.

모용군은 이 습도가 좋았다. 그가 익힌 무공이 양강의 뇌정공이라, 오히려 습도가 높은 환경에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모용군이 중지와 엄지를 대고 튕겼다.

딱! 파지직!

시퍼런 뇌기가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뇌기를 기반으로 한 무공을 익혔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뇌기는 뒤가 없는 강인한 힘이다.

손끝에서 순간적인 내공 조절을 하지 않으면 통제되지 않은 뇌기가 거처 곳곳으로 튀었을 터. 이러나저러나 모용군의 실력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군은 기뻐할 수 없었다.

“충분한가.”

모용군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과연 나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며 살고 있는가.”

근래 들어 재능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의 재능은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좋은 머리를 타고나고, 누군가는 몸 쓰는 재능을 타고난다.

손재주를 타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변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도 있다.

심지어 재능의 범위를 확장하면, 선천적으로 시력이 좋거나 목청이 큰 것도 재능이었다. 냄새를 잘 맡는 것도, 미각이 섬세한 것도 재능이었다.

인간 사회엔 무수히 많은 직업이 있으며, 그만큼 요구되는 재능도 다양했다.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의 세계에서 모두를 제치고 성공하기란 밤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니까.

그렇다면 무림인에게 요구되는 재능은 무엇인가?

“……모르겠군.”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이제는 모르겠어.”

무공의 경지를 빠르게 올릴 수 있는 재능?

물론 그것은 대단한 재능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능도 세분화가 필요하다.

처음 본 무공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복사(複寫)의 재능, 반사 신경이 좋아서 회피 기동에 이점을 갖는 재능, 힘이 좋아서 단순하고 정직한 공격에 강점을 보이는 재능, 내공이 잘 쌓이는 재능, 초식을 분해하는 재능, 약점을 보는 재능…….

열거하자면 정말 끝도 없을 것이다. 그중 몇 개의 재능을 타고났는가, 타고난 재능의 수치는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위치가 달라진다.

간혹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노력으로 재능을 뒤엎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

“개소리지.”

노력은 기본이다.

천재를 이기기 위해 그보다 두 배의 노력을 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천재가 하루에 여덟 시진을 수련하면 범재는 열여섯 시진을 수련해야 한단 말인가? 하루가 열두 시진인데?

열 시진으로 줄인다고 해도 잠은 언제 자는가? 수련만큼 중요한 것이 휴식이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휴식의 필요성도 줄어들지만, 그렇다고 잠과 영양이 아예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즉, 노력의 양으로 천재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양보다 질적 노력을 가하면 되는가?

그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천재의 질을 범재가 따라갈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 떠드는 놈들이 노력하면 다 이길 수 있다며 타인의 노력은 폄하하곤 한다. 실질적으로 타인의 노력을 따라갈 수 없는 현실임에도.

결국은 무림도 재능 있는 자들의 세계란 말이다. 냉혹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모용군이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 혼란이 드리워졌다.

“나는 노력의 끝이라도 보긴 했는가.”

성격이 꼬였을지언정, 모용군은 자기 자신에게 상당히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성천십삼좌를 존경하지만 경외하진 않는 이유는, 자신 역시 그 영역에 도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시기다.

‘지금처럼 살면, 나는 대체 언제쯤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모용군은 이루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무림맹주, 천하 무림 권력의 정점.

누군가는 백도의 정점일 뿐 흑도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양천이라는 존재 때문에 흑도가 급부상했을 뿐 실질적으로 무림의 제일가는 권력자는 무림맹주라 할 수 있다.

무림맹주가 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았다. 무림인으로서 강함을 증명해야 하고, 인품이 좋아야 하며, 영향력을 위해 따르는 세력도 많아야 한다.

세력이 따르게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사업을 벌여야 한다.

그야말로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 많은 일을, 모용군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묵묵히 잘해 나가고 있었다.

무공은 어떠한가?

모용군의 무공은 육대세가를 넘어 구파일방의 수장들과 비교해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강했다. 그는 자신이 무림인임을 잊지 않았고, 틈틈이 수련에도 힘을 쏟았다.

말하자면, 인품이나 성정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무림맹주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모용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설령 이대로 무림맹주가 된다 한들, 과연 내가 원하는 대로 권력을 쥐고 흔들 수 있을까.’

인간은 문화를 번성시키고 도덕과 법을 만들어 여타 다른 생물보다 고등한 위치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의 기본 원리는 동물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힘.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힘이 있어야 바로잡을 수 있다. 힘이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으며, 힘이 있어야 권위가 무너지지 않는다.

특히나 무림인에게는, 영향력이나 권력이 아닌 실질적인 힘이 중요했다.

다만, 보름 전까지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실질적인 힘에서 가장 선두를 달리는 성천십삼좌는 전대의 인물들, 당대의 정치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애초에 다른 세상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이 무극을 개방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드디어 당대 현역 중에도 무극을 연 자가 나타나 버렸다. 심지어 그자는 모용군이 일생의 숙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어이없게도 나이마저 어렸다.

‘이대로는 안 돼.’

삼교? 권력? 전쟁?

다 필요 없다.

연호정으로 인해 당대 무림의 판도가 또 한 번 바뀌었다. 그 판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무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힘이 있어야 한다. 내 검, 내 주먹에 실린 힘이 있어야 해. 선두 무리의 하나가 아닌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강해져야 한다.’

무림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 벌여 왔던 많은 일들.

지금은 멈춰야 한다.

자신의 재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미친 듯이 수련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맹주가 되어도 무의미하다.

‘내 인생에도 이러한 순간이 오는군.’

좋게 생각하자면, 어차피 무극을 개방하는 것은 적당한 수련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일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처음 검을 쥐었을 때로, 육신의 강함만이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용군은 진심으로 그렇게 살 생각을 했다. 그동안 이루어 놓았던 것을 가인들에게 맡기고, 인생을 걸 만한 수련 안에 자신을 녹일 순간이 왔음을 받아들였다.

스르릉.

검을 뽑아 드니, 흐린 달빛을 받은 검이 우웅, 하고 떨림을 발했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너도 그것을 바라고 있겠지.’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스르릉.

검을 집어넣은 모용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시오.”

드륵.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당관이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진지했던 표정은 어느새 찾아볼 수 없었다.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거늘.”

당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람이 싫어도 도움을 받았으니, 마땅히 한 번은 찾아와야 할 것 같았소.”

“허허.”

자신의 가문 내라고는 해도 참 솔직한 사람이다.

모용군은 새삼 당관의 솔직함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당관 역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솔직하기도 쉽지 않다. 환경 때문인지 뭔지, 자신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앉으시오.”

두 사람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당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가 사태에 도움을 주어 감사하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정말 고마운 것 맞소? 말투는 영 아니외다.”

“싫은 사람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하기가 어렵다는 걸 알 거요.”

“알지. 잘 알고 있소.”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려 했소만, 그게 쉽지는 않더군. 그래도 고맙소.”

가만히 당관을 보던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음?”

“진심 어린 감사가 아니라서 그러는 게 아니오. 실제로 나는 한 게 별로 없소.”

“…….”

“도움은 주었지. 하지만 이 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고수가 왔어도 똑같았을 거요. 내 덕이 아니라 연 대수 덕이오.”

당관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연호정 덕이라.’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모르겠군.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진심이든 빈말이든, 모용군 역시 자신 앞에서 저렇게 말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당관이 툭 던지듯 말했다.

“왠지 청승맞아 보이는군.”

모용군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내 한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지.”

“…….”

“당가주도 그렇지 않소? 내 자식 세대의 후배가 우리를 앞지르고 하늘에 닿았는데, 친분이 있다 한들 마냥 기분이 좋을 순 없겠지.”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소.”

담백한 인정이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이라면, 설령 자식의 성취 앞에서도 질투할 줄 알아야 하오. 하물며 핏줄도 아닌 타인의 성취에 순수하게 기뻐해 줄 수는 없더이다.”

“…….”

“여러모로 생각이 많소.”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답지 않은 모습이로군.”

“그렇소?”

“충격적이긴 하지. 그 연배에 무극을 열었다는 것, 모르긴 몰라도 무림사(武林史) 최초가 아닐까 싶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지금이지.”

“물론 그렇지.”

한숨을 쉰 모용군이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해서, 예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소? 단순히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 것 맞소. 다만, 인사치레만 하고 끝낼 생각은 없지.”

당관이 품에서 작은 금낭 하나를 꺼내 모용군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독단(毒丹)이오.”

“……?”

“독단이지만 지극히 양(陽)에 치중된 극독이외다.”

“…….”

“보통은 독으로 쓰지만, 다루는 방식에 따라서 영약이 되기도 하는 물건이오.”

모용군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당관이 말을 이었다.

“멀쩡한 영약을 드리고 싶지만, 당장 본가의 사업에 쓸 영약의 개수도 모자란 판국이오. 당호 그 녀석이 여기저기에 뿌려 버렸거든.”

“…….”

“말했듯, 독이지만 활용 방법에 따라서 상상을 초월하는 성취를 이룰 수도 있는 물건이오. 물론,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지. 죽을 수도 있고.”

“…….”

“고민이 많았소만, 적절하게 드릴 것은 이것뿐이더군. 성의의 표시이니 부디 받아 주길 바라오.”

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정말 용건이 그것뿐이었던 모양이다. 몸을 돌리는 그 행동에 한 치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만약.”

“…….”

“내가 이 독단을 취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진다면, 배가 아프지 않겠소?”

“아프겠지.”

당관이 모용군을 돌아보았다.

“동시에 삼교 놈들을 지극히 증오하는 아군의 힘을 키워 준 결과가 될 수도 있겠지.”

“……!”

“가오.”

그 말을 끝으로 당관이 방에서 나갔다.

독단을 내려다보던 모용군이 한숨을 쉬었다.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