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무극(無極)은 무한(無限) (4)
“후우우!”
공격적으로 숨을 내쉬는데도 얼굴에 평온함이 가득했다.
‘신기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는 강량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해 보였다.
‘이것이 무종지벽,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자들의 육신이구나.’
싸움이 끝난 후 치료를 받고 나서는 온종일 육신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았는데도 신기했다. 세맥까지 타통된 몸, 손톱 끝 미세한 지점까지 들어찬 진기가 온몸을 순회하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가 몸을 보호한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이 경지에서 순도를 높이면 어지간한 기습 정도는 몸이 알아서 막아 줄 것만 같았다.
‘융통무애로구나.’
진기를 다루는 방식과 신공 자체는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룩한 경지가 높을수록 모두가 비슷한 지점으로 모이게 된다.
강량은 확신했다. 대다수의 초절정고수가 자신의 이 상태를 공유하고 있으리라는 걸.
‘같은 조건이라.’
무종지벽 이전까지는 각자의 개성이 강하게 묻어 나오는 고수가 많았다면, 이후부터는 모두가 비슷한 것들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지에서 남들보다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선 잔재주에 신경을 써선 안 될 것이다.
“아닐걸?”
강량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거기엔 붉은 창을 안은 채 나무에 기대어 선 황석태가 있었다.
“네 생각과는 다를 거다.”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소?”
“그런 능력은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아서.”
“신통하군.”
“그리고 너는 생각보다 표정을 읽기가 쉬운 녀석이다.”
“그건 또 몰랐소이다.”
강량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황석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말 자신의 생각을 읽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시선, 그리고 앞날을 어떻게 개척할 건지다.
이 경지에 오른 이후, 아직 작정하고 수련해 보지도 못했다. 조언을 구하는 것은 벽에 부딪혔을 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어인 일로 오셨소?”
“당가주가 보자더군.”
강량이 눈을 끔뻑였다.
“나 말이오?”
“나와 자네, 그리고 모용가주와 점창의 장로까지 전부.”
갑자기 뭔 일이래?
의아해하는 강량에게 황석태가 말했다.
“우리는 곧 떠날 거다. 그래도 나름의 도움을 줬다고 이것저것 챙겨 줄 모양이지. 당가는 은원에 확실하니까.”
“아.”
강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은혜라면 형님한테나 갚을 것이지.”
“잘 갚고 있는 모양이더군.”
“음?”
“암왕에게 뭔가를 받으러 갔다고 들었다.”
“……암왕.”
강량의 눈이 빛났다.
무극을 개방하여 천상으로 날아오른 천외천의 고수들.
자신이 벽을 뛰어넘었듯, 연호정 역시 벽을 뛰어넘었다. 당연히 연호정이 보는 그 세상은 자신의 세상과 또 다를 것이다.
강량은 궁금했다. 그 영역에서는 무엇이 보이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가.
마음 같아서는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그 영역에 올라가고 싶었다.
“아직 멀었어.”
“……음?”
“이제 걷기 시작한 놈이 날아오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강량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표정을 읽기 쉽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구려?”
“첨언하자면, 새로운 영역에 올라섰다고 이전과 다르게 접근할 생각이라면 그 또한 오해라고 말해 주고 싶다.”
“……!!”
“인간의 개성은 그 자신이 어떤 경지에 오르든 변하지 않아. 당장 모용가주와 당가주만 봐도 그 무공 구현 방식이 다르지 않나? 하물며 연 부관은 더하지. 연 부관은 성천에 올랐어도 자신의 전투 방식을 바꾸려 들지 않을 거다.”
강량의 얼굴에 은은한 충격이 일었다.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연배에 무종을 돌파한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지만, 그 경지를 지나치게 특별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오만이다. 이 영역까지 올랐다면 더더욱 자신의 길을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게 좋을 거다. 적어도 내가 본 사람들은 다 그랬어.”
“…….”
“물론, 결정적인 순간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겠지만.”
강량의 표정이 멍해졌다.
황석태가 몸을 돌렸다.
“명상 끝났으면 이만 가지. 당가주가 기다린다.”
“알려 줘도 되는 거요?”
“무슨 말이냐?”
강량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내게 있어 묵룡부주는 철천지원수요. 훗날 내가 강해져서 묵룡부주를 죽이려 든다면, 당신은 후회할지도 모르오.”
꽤 자극적인 말임에도 황석태는 코웃음을 쳤다.
“걱정하지 마라. 너 같은 애송이한테 당할 분도 아닐뿐더러, 그 전에 내 창이 너의 심장을 뚫을 테니까.”
“자신감이 대단하시오.”
“쓸데없는 말은 그쯤 하고 가지.”
황석태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위풍당당한 뒷모습이 견고한 성벽과도 같았다.
강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는 참 강자가 많아.”
그만큼 멋진 사람도 많다.
* * *
퍼어어어엉!
폭음과 함께 철추가 하늘을 날았다.
하늘을 나는 철추의 창대는 중간 부분이 훅 휘어져 있었다. 첨예한 힘의 충돌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쿨럭!”
연호정이 신음 같은 기침을 토해 내며 무릎을 잡았다.
놀랍게도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호흡 역시 상당히 격했다.
초입이라고는 하나 무극을 열고 신세계로 돌입한 고수의 모습이라고는 상상키 힘들다.
반면 당형은 지극히 멀쩡했다. 의복이 다소 흐트러진 걸 제외하면, 처음 부딪쳤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뭐지?’
땀을 닦고 허리를 편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과 불신이 어렸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삼십 합의 비무 때부터 당형의 무공은 돌변했다.
이것이 두 개의 단전을 봉인한 사람의 무공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당형은 강했다. 처음 보여 준 발경술은 유지한 채, 불가사의한 속도와 이해할 수 없는 무리(武理)로 자신의 모든 무공을 차단했다.
청룡공으로도 반격할 수 없었고, 현무공으로도 방어할 수가 없었다.
백호공의 공격력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으며, 주작공의 살법은 당형의 몸에 닿기도 전에 소멸해 버렸다.
‘대체 어떻게?!’
그때, 당형이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섬세함이 살아나는군. 신선제왕급은 모르겠지만, 그 진기 운용 능력만큼은 능히 삼군 이상이라 할 만하네. 대단했어.”
“…….”
“하지만 자네는 너무 일관적이로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당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가 그리도 빠른 사람이, 또 이런 부분에서는 둔하구먼.”
“…….”
“자네는 이 경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예?”
“단순히 하나의 벽을 넘어선 또 다른 경지,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인가?”
“……?”
연호정은 당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형의 얼굴은 상당히 엄해 보였다. 마치 학동을 가르치는 훈장과 같은 모습이랄까.
“하나 묻겠네. 자네는 분명 무극을 열기 전보다 강해졌네. 조금 더 빨라졌고, 훨씬 더 강해졌으며 품고 있는 진기는 아예 다른 차원의 경지에 올라섰지.”
“…….”
“그것 빼고 달라진 게 뭔가?”
“……?!”
“이전처럼 똑같이 달려들고, 똑같이 약점을 공략하고, 똑같이 심리를 뒤흔들어 방심을 유도하지. 그다음은? 그게 전부인가?”
“그건…….”
“더 강한 힘, 더 파괴적인 발경술, 더 위압적인 기파를 발산하는 것 말고 이전과 달라진 게 뭔가?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연호정은 충격을 받았다.
당형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확실히 어중간하긴 했다.
“처음 나의 상단전 활용 능력을 깨닫고 위압적인 철추를 요구한 것은 창의적인 공략 방법이었다네. 나도 감탄을 금치 못했어. 상단전은 정신의 힘이라 그 힘을 증폭시키면 진기 운용의 신세계를 엿볼 수 있지만, 동시에 정신이 위축되면 그만큼 무공 구현도 어려워지기 마련이지. 말하자면 양날의 검이었고, 자네는 단숨에 그것을 간파했어.”
“…….”
“하지만 그것은 공략 방법이지, 자네의 변화가 아니었네. 자네는 원래도 그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이지 않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상단전 활용이라는 것이, 그저 발경 속도를 높이고 내공 방패를 보이지 않게 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나?”
“……?!”
“백 근에 달하는 허공섭물을, 내가 눈치채지도 못한 새에 발휘하여 휘두른 자네의 능력은 어디에서 기인했나?”
“……!!”
연호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당형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연호정이 비로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익숙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닐세. 익숙한 것을 더 크고 날카롭게, 더 강하고 빠르게 만들어야지. 하지만 그것은 새로이 얻은 진기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당형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렸다.
“여기일세. 여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자네를 늑대로 보았던 적이 어느 순간부터는 호랑이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야.”
우우우우우웅!
연호정의 오른손에 백호기가 어렸다.
당형이 그의 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거기서 어떻게 할 텐가?”
가만히 당형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상단전, 즉 정신.’
정신의 힘이란 곧 의지의 힘이고, 의지의 중심은 곧 영혼에 있는 법이다.
‘영혼을 담아서 공격하라는 게 아니다. 내 영혼, 나의 본성이 무엇을 추구하는가. 내 정신은 어떤 창의를 발휘하는가.’
일각 후.
번쩍!
눈을 뜬 연호정이 땅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콰콰쾅!!
그 순간 연호정의 주먹이 꽂힌 땅에서부터 폭풍이 일며, 삼십여 장에 달하는 공터 전체의 땅이 들썩이며 쪼개지기 시작했다.
“헉!”
깜짝 놀란 당윤이 나무를 부여잡고 몸의 중심을 잡았다.
휘이이이이잉!!
타격 지점에서부터 뻗어 나간 폭풍이 방위를 가리지 않고 광란의 춤을 추었다.
콰드드득!
공터와 가까이 있는 나무 몇 그루가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쿠구궁.
이내 폭풍이 사라지자 답답했던 공기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연호정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주먹질 한 방으로 이런 결과를 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흑암제 시절에도 이만큼 강력한 일타(一打)를 내친 적은 없었다.
적어도 멀쩡할 때는 그러했다.
“참으로 자네답군.”
당형이 고개를 저었다.
“상단전의 힘으로 상대의 능력을 억압하고 옥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기와 결합시켜 무공 자체의 파괴력을 더 끌어올려 버렸단 말이지?”
“…….”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고수는 또 오랜만에 보네. 하기야 상단전의 활용법은 무한하니,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좀 과하게 단순하긴 하지만 말일세.”
연호정이 당형을 바라보았다.
당형이 미소를 지었다.
“나와 싸우면서 진기가 잘 이어지지 않고 숨이 턱턱 막혔지?”
“그렇습니다.”
“범인은 당연히 나였다네. 내 상단의 신기(神氣)로 자네의 진기 운용을 방해하고 폐장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뒤흔들어 놓았지.”
“허……!”
“잔재주라고 생각하나?”
“절대 아닙니다. 실전이었다면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겁니다.”
“허허.”
당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자네가 만나게 될 무극의 고수들은 모두 그와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네. 말하자면 기본 소양이지.”
“소양…….”
“무극은 무한.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에 제한을 두지 말게. 눈치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니, 익숙해지면 이 늙은이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상단전 운용이 가능할 게야.”
“…….”
“잊지 말게. 거기서부터 시작이라는 걸. 거기에 익숙해져야 삼군을 제치고 신선제왕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게야.”
“노선배님.”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