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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39화 (638/963)

639화. 무극(無極)은 무한(無限) (3)

통증은 있어도 충격 자체는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정신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굉장한 전투 능력이야. 그 저돌성과 공격성, 온 천하를 뒤져도 찾기 힘들겠어.”

“…….”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그 경지에 아주 익숙해 보이네. 진기를 조율하는 능력만큼은 완숙하기 그지없어. 하지만…….”

당형이 고개를 저었다.

“그뿐이야. 그런 식으로 덤벼들어 봤자 자네는 오늘 내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걸세.”

스르륵.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형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들어와야지?”

“물론 그래야지요.”

“그럼 지체하지 말고 들어오시게.”

연호정은 대답 없이 당형을 바라보았다.

당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들어오나?”

“생각 중입니다.”

“생각이라…… 언뜻 보아도 자네의 무도는 이성보다 본능에서 발현된 투쟁술에 가깝거늘, 생각이 필요할까 싶구먼.”

“어지간하면 근성과 본능으로 해보겠는데, 이번만큼은 좀 막막해서 말입니다.”

당형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런가?”

역시 보통 놈이 아니야.

저것 또한 본능이라면 본능일까?

사람이라면 응당 익숙한 행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 어색한 것, 다른 것에 쉽게 자신을 던지지 못한다.

그것은 나쁜 게 아니었다. 무림인이 정신을 잃었을 때조차 본능적으로 초식을 구현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적을 살상하는 기술을 인이 박이도록 연마했기 때문이었다.

즉, 생존과 승리에 필수인 본능이다. 천하 모든 무림인이 그러한 본능을 몸에 심고 살아간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본능에서 벗어나야 할 수도 있다.

바로 지금, 연호정이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 방법이 틀렸나? 아니야.’

연호정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나의 전투 방식은 예전과 크게 다를 게 없어. 흑암제 시절에도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싸워 왔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치열한 싸움을 거듭하며 상대를 죽이고 살아남았다. 그의 투쟁술은 경지가 달라진다고 바뀔 만큼 만만한 무도(武道)가 아니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이 방식으로는 노선배 말마따나 옷깃 하나 건드리기 힘들어.’

이유가 뭘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 발경법.’

당형의 발경은 절묘함 그 자체였다.

사음교주의 음황무가 떠오를 정도로 엄청난 침투경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대련이라서 다행이지, 실전이었다면 손 한번 써 보기도 전에 당했을 것이다.

‘무형의 진기를 순간적으로 발경화한다. 나라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생성 속도와 위치 선점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은 간단했다. 당형이 발경을 생성하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공격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만한 속도가 나올 리 없다는 것이다. 힘이나 초식을 떠나서, 당형의 발경은 의지가 이는 순간 구현되고 있었다.

만들겠다 마음먹은 순간 이미 만들어져 있는 발경이라면 가히 빛의 속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호정의 무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광속으로 도끼를 휘두를 수는 없었다.

‘약점은 있어.’

당형은 자신의 공격을 막을 때에만 그러한 발경술을 구현했다.

막상 본인이 공격하려는 순간에는 발경의 구현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물론 상대적으로 느려진 것일 뿐, 그조차도 연호정의 공격 속도와 비슷할 정도로 빨랐다.

‘그 시간 차이를 못 읽었어.’

멱살을 잡는 순간 당형의 의도를 읽었다. 그래서 한 박자 빨리 힘을 빼고 재차 힘을 주려는데, 그 순간 역으로 당해 쓰러져 버렸다.

‘공격과 방어의 차이는 확실하다. 노선배는 그 발경을 남발할 수 없으며, 공격할 때는 속도가 느려져.’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공격할 때조차도 광속의 발경이 튀어나오면, 천하에 당형을 이길 자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기가 막히는군. 뭐가 됐든 뚫을 수가 없다는 건데.’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중단전과 하단전까지 봉인한 양반이 참으로…… 응?!’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르릉.

흑룡부를 집어넣는 연호정을 보며 당형이 눈을 빛냈다.

툭. 투툭.

흑백쌍룡부의 부갑까지 풀어 낸 그가 두 자루 도끼를 저 멀리 던져 버렸다.

“포기한 것 같지는 않은데.”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게.”

“당가 대장간에 크고 무거운 중병(重兵)이 있습니까?”

“중병이라면 어느 정도의?”

“무거울수록 좋습니다. 이 두 자루 도끼 외에, 제 애병(愛兵)은 무게가 팔십 근이 넘는 거대한 도끼였지요.”

당형이 혀를 내둘렀다.

“쥐고 휘두를 만하던가?”

“손맛이 아주 그만입니다. 그래서, 그만한 병기가 있습니까? 꼭 도끼가 아니어도 됩니다.”

당형이 당윤을 바라보았다.

그 먼 거리에서도 이곳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당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훅.

당윤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당형이 물었다.

“무기를 바꾸면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대항할 생각은 없고, 배울 생각은 있습니다.”

“허허.”

“저는 죽일 기세로 덤빌 테지만, 노선배께서는 다 받아 주실 거 아닙니까? 그간 쌓인 분도 풀 겸, 이것저것 쓰면서 날뛰어 볼 생각입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하기 힘든 말이었다.

당형이 피식 웃었다.

“암기 안 꺼내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게. 독 한 줌만 제대로 뿌려도 자네는 대항 자체를 못 할 게야.”

“슬슬 따라온다 싶으면 거리낌 없이 쓰십시오.”

“따라오면 말이지.”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가 말인가?”

“상단전의 운용법이 일품이에요. 오십 합이라…… 그래서 오십 합이었군요.”

순간 당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벌써 읽어 냈단 말인가?”

“뭘 읽었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노선배님의 상단전 활용 능력이 엄청나다는 건 알았습니다. 벼락처럼 빠른 발경 구현 속도라니, 역시 세상은 넓군요.”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당형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날카롭구먼. 눈치가 빠른 것도 재능의 범주로 넣어야 할 것 같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기대되는군. 두 번째 비무가.”

잠시 후.

“이걸 가져와 봤습니다만.”

당윤이 가져온 것은 다섯 자가 넘는 길이의 거대한 추(椎)였다.

강철로 만든 창대 끝에 합금으로 제작된 둥그런 추를 달았다. 그 추의 크기만 해도 연호정의 상반신과 비슷할 정도였다.

“무게는 대략 백 근 정도입니다. 병기의 용도가 아니기에 균형을 맞추진 않은 것 같습니다. 맞추기도 어렵고요.”

“흐음.”

연호정이 철추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당윤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백 근에 가까운 중병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드는 것이, 괴력도 저런 괴력이 없었다.

무극을 열기 전에도 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병을 다루는 데에 지극히 익숙해 보였다.

“유사시에 성벽이나 성문을 깨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누가 쓸까 싶어서 한동안 무기고에 보관하던 것이지만, 나름대로 관리는 잘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연호정이 창대 중앙을 잡고 철추를 휘둘러 보았다.

부우웅! 부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그야말로 흉악했다.

당윤은 기가 질린 얼굴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균형도 안 잡힌 백 근짜리 강철 추를 저리 가볍게 다루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확실히 균형이 안 잡혀서 불필요한 힘이 낭비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깨에 철추를 거치한 연호정이 당형을 바라보았다.

“시작할까요?”

“언제든지.”

“하면, 갑니다.”

파아악!

번개처럼 접근한 연호정이 힘차게 철추를 휘둘렀다.

당형의 눈이 번뜩였다.

쐐애애애액!

공기를 가르며 내리쳐 오는 철추의 속도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흑백쌍룡부도 신병이기라 불릴 만한 물건이지만, 위압감의 차원이 달랐다. 실제보다 훨씬 크고 길게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당형의 양손이 쫙 펼쳐졌다.

콰아아앙!

무형의 발경을 빗맞은 철추가 그대로 땅을 후려쳤다.

쿠구궁!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역시.’

투우웅!

백호군림보로 접근한 그가 하단에서 상단으로 철추를 올려 쳤다.

쩌어어엉!

발경 방패에 맞은 철추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쿵!

연호정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철추를 휘둘렀다.

쩌어엉!

또다시 철추의 움직임이 흐트러졌다.

연호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다시 한 발을 디디며 철추를 휘두르는데, 이전보다 더 빠르고 위압적인 일격으로 당형의 빗장뼈를 노렸다.

쩌어어어엉!

이번에도 발경 방패에 가로막힌 철추가 훅 튕겨 나갔다.

철추의 무게와 속도를 감안하면 연호정의 몸이 그대로 중심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연호정은 절대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극한까지 단련된 육신과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진기가 몸의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대를 잡은 연호정의 양손에 강한 힘이 깃들었다.

부웅!

당형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번 공격은 이전과는 또 달랐다. 속도가 더 빨라졌고, 결정적으로 휘둘러 치는 게 아니라 찔러 들어오는 일격이었다.

쩌어어어엉!

곧게 찔러 들어간 철추가 이번에도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퍼억!

철추가 날아가며 땅에 박혔다.

그때, 연호정이 당형에게 달려들었다. 당형이 철추를 정면으로 받아 내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히 튕겨 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읽었구먼.’

연호정의 두 주먹이 무섭게 휘둘러졌다.

콰콰콰콰쾅!

터져 나오는 굉음의 질이 달랐다.

처음으로 당형이 뒤로 밀려 나갔다. 쓰러지진 않았지만, 연호정의 힘을 해소하지 못하고 물러나 버리고야 만 것이다.

부웅!

매섭게 당형을 몰아치던 연호정의 오른손에, 어느새 철추의 창대가 잡혔다.

당형의 눈이 흔들렸다.

‘허공섭물!’

백 근에 달하는 철추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허공섭물로 끌어왔다.

기가 막힌 내공 조예였다. 무극을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이리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허공섭물을 구사할 줄이야!

연호정이 힘차게 철추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철추가 땅을 뚫고 들어갔다.

후속타가 들어올 것을 대비하던 당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호정이 자세를 푼 것이다.

“안 들어오나?”

“오십 합입니다.”

“……?”

“숨 좀 고르시지요. 전 배우러 온 것이지, 노선배 몸 상하는 걸 보러 온 게 아닙니다.”

당형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다 세고 있었나?”

“당가주한테 맞아 죽지 않으려면 이런 부분은 신경을 써야죠.”

“허허허.”

자세를 푼 당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어떻게 알았는가? 내 발경 방패의 정체 말일세.”

“몰랐습니다. 다만, 중단과 하단이 봉인된 노선배님에게는 상단전의 힘을 극대화하는 수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상단전은 곧 정신의 힘. 얄팍한 두 자루 손도끼로 위협해 봤자, 견고하기 그지없는 노선배님의 정신은 뚫기 힘들지요.”

“허어.”

“그래서 중병을 휘두른 겁니다. 위압감이 다르니까요. 상대의 정신을 뒤흔들어 방어력 그 자체를 낮춘다. 그게 제 판단이었습니다.”

당형은 나직이 감탄했다.

“자네는 정말 대단하구먼.”

“과찬이십니다. 사실상 꼼수죠.”

“어떤 수법이든 상대에게 통한다면 그게 최고지.”

“그렇습니까.”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당형이 고개를 저었다.

“차근차근, 하나하나 심어 줄 생각이었네. 하지만 자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겠구먼.”

“…….”

“일각 후에 다시 시작하지.”

“좋습니다.”

“다음은 삼십 합일세.”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오십 합이 삼십 합으로 줄었다.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가 그대로라면, 그 한도 내에서 더 강한 힘으로 맞서겠다는 뜻이었다.

당형의 동공이 은은한 녹광을 띠었다.

“상단전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 가르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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