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무극(無極)은 무한(無限) (2)
“음, 이쯤이 좋겠군.”
당형이 연호정을 데리고 간 곳은 유폐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당관은 이만 유폐지를 나와 같이 내원에서 살자고 했지만, 당형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겠다고 하였다. 정리할 것도 많고, 홀로 몸을 돌보기에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고 좋군요.”
너비가 족히 삼십여 장은 되는 공터였다.
이 정도면 초고수들의 격전장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 도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이상 회피 거리를 두기에도 넉넉했고, 충격파를 제어하기에도 제격이었다.
“게다가.”
연호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기관입니까, 진법입니까?”
“호오, 눈치챘는가?”
“쇠 냄새가 나는 걸 보면 기관에 가까운 것 같은데, 대기의 흐름을 보면 진법 같기도 합니다.”
당형의 얼굴에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
“시간 날 때 홀로 뚝딱거려 봤다네. 작품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내부에서 발생하는 충격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겠군요.”
“어지간한 충격은 전부 상쇄하지. 홀로 지내면서 이런저런 수련을 했는데, 괜히 가내 아해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 만들었네.”
연호정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대단하다.’
그는 순수하게 당형에게 감탄했다.
연호정은 아는 게 많았지만, 그만큼 모르는 것도 많았다.
관심이 없는 부분은 아예 들춰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생존, 전투, 심리, 정치 등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한 부분에선 누구 못지않았지만, 기관이나 의술, 진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당형은 달랐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공은 물론이거니와 학문, 기관, 의술, 진법 등등 모든 부분에 통달했다.
‘당가 공부의 전능자라더니, 과연.’
진짜 천재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흑암제 시절의 세월까지 생각해도 당형보다 십오 년은 덜 산 셈이지만, 당형의 깊고 방대한 지식은 십오 년 세월을 우습게 만들어 버릴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그나저나 자네도 대단하군. 보아하니 아직 스스로의 무공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은 듯한데.”
“그런 것도 보이십니까?”
“보인다네. 다 보이지. 자네보다 한참 선배거든.”
당형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연호정도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인상이 많이 달라졌다. 편안한 마음으로, 사심 없이 웃는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아직 제조법과 진법 구결을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두어 달만 더 투자하면 얼추 완성될 것 같다네. 그때 관이에게 전해 줘야지.”
“크게 감격할 겁니다.”
“감격할 게 뭐가 있나. 부모가 만든 것,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당연한 법이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지만, 여하간 당형과 당관의 사이가 훨씬 더 가까워졌다는 건 알겠다.
“자, 그럼.”
허리를 툭툭 두들기던 당형이 공터 중앙으로 걸어갔다.
“윤이는 저 큰 나무, 그 옆으로 가서 움직이지 말거라.”
“예.”
나무 옆에 선 당윤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난생처음으로 절대고수의 무공을 볼 수 있는 장이었다. 무림인으로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형이 연호정에게 턱짓했다.
“준비되었으면 슬슬 시작할까?”
평온한 어조로 지나가듯 묻는 당형의 모습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제왕독공을 봉인하셨습니다. 중단전과 하단전을 봉인하셨으니, 쓸 수 있는 힘에도 제약이 있지 않겠습니까?”
“역시 자네는 투사야. 일단 부딪칠 걸 예감했구먼?”
“그게 아니면 굳이 이런 거창한 곳까지 올 필요가 없었겠지요.”
“허허, 틀린 말은 아니지.”
미소 짓던 당형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언제 무극을 열었는지 아시는가?”
“…….”
“섣부른 말이지만, 자네의 재능이 아무리 출중해도 삼단전을 개방한 내 손에 십 초를 버티기 어려울 걸세. 운이 좋아도 삼십 합을 넘기기 어려울 테지.”
오만함이 느껴지거나 자부심이 드러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 사실이기도 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젊은이답지 않게 차분하군. 확실히 자네는 남다른 구석이 있어.”
“하지만…….”
“상단전만 개방되어 있으나, 나의 육신은 무한의 자연기(自然氣)를 이십 년 넘도록 담아낸 그릇일세.”
“…….”
“자네에게 도움을 주는 정도로는 충분하네. 걱정할 거 없어.”
연호정의 얼굴에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하수가 고수를 걱정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없지요. 그리 말씀하시니 제대로 풀어 보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미리 말하는데, 지금 상태로도 오십 합 내외로는 내 옷깃 하나 건드리기 힘들 걸세.”
중단전과 하단전이 할 역할을 육신의 정기와 상단전의 힘으로 이끌겠다는 뜻이었다.
그 한계가 바로 오십 합이다. 그 이후로는 몸에 무리가 가서 힘들다는 뜻이리라.
당형의 얼굴에 엄기(嚴氣)가 어렸다.
“제대로 얻어 가려거든 죽일 기세로 오는 게 좋아.”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인생이 투쟁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죽여야 했지요.”
“좋아.”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연호정이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광혈교의 마인과 싸운 이후, 제대로 힘을 개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때도 자신의 모든 힘을 개방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내 몸에 내재되어 있는 힘, 그 모든 걸 뽑아내는 것이다.’
오른발을 뗀 연호정이 이내 힘차게 바닥을 내디뎠다.
쿠우우우웅!
강인한 진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의 진각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지진이라도 일으킬 듯 파괴적이고 직관적이었던 진각이, 지금은 더 깊숙하고 둔중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땅 밑 깊은 곳, 지저(地底)의 세계까지 닿을 것 같은 힘을 반동 삼아, 내부에 잠자고 있는 힘의 중추를 단숨에 열어 버리는 것이다.
번쩍!
연호정의 두 눈에 신광(神光)이 떠올랐다.
화아아아악!
명치에 생겨난 빛의 그물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휘이이이잉!!
일순간 그의 머리카락과 의복이 미친 듯이 펄럭이며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콰드드드드득!
연호정의 오른발 아래에서 시작된 잔금이 순식간에 반경 십여 장까지 퍼져 나갔다.
번쩍! 번쩍!
사색의 진기가 피어오르다 점차 주먹만 한 크기로 뭉치더니, 이내 그의 몸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횡과 대각으로 도는 신비한 사색의 빛.
연호정이 지닌 무공의 핵이 광명신단이라면, 사신기는 힘을 받아 구현하는 통로이자 공격 수단 그 자체였다.
그러한 신기가 체외로 방출되면서도 완벽하게 주인의 통제하에 돌아간다. 몸 안에서 잠자고 있던 신기를 더 빠르고 즉각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아예 뽑아서 통제하는 것이다.
당형의 얼굴에 은근한 감탄이 일었다.
“돌아보진 못했지만, 깨달음을 곱씹긴 했던 모양이군. 아주 제법이야.”
스르릉.
연호정이 흑룡부를 꺼내 들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사색의 기운 중 붉은 구체가 도끼로 스며들었다.
화르르르르륵!
순간 흑룡부에 거대한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일 장 높이로 솟구치는 불꽃의 도끼다. 작은 손도끼라서 그런지 도끼는 그저 손잡이처럼 보였고, 오히려 치솟는 불꽃이 거대한 칼날처럼 보였다.
울컥울컥!
연호정의 팔뚝에 드러난 핏줄이 마구 꿈틀거렸다.
당형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멋진 재주로구먼. 한데…….”
“…….”
“언제 들어올 텐가?”
훅!
연호정의 신형이 당형의 후측방에 나타났다.
멀리서 보던 당윤은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호정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 하나도 읽어 내지 못한 것이다.
연호정이 당형의 목덜미를 향해 불꽃의 도끼를 휘둘렀다.
쾅!
사선으로 휘둘러진 흑룡부의 참격이 바닥에 이 장 길이의 흔적을 만들었다.
깊게 파인 땅 주변으로 잔불이 붙었다. 참격이 난 자리는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무서운 화력이었다.
“힘 하나는 좋군.”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어느새 당형의 목소리가 삼 장 거리 너머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파아아아앙!
허리의 탄력으로 몸을 돌려 좌장을 뻗었다.
콰앙!
허공을 격하고 쏘아진 무형의 장력은 당형이 서 있던 땅을 그대로 뒤집어 버렸다.
흑룡부로 내리친 참격처럼 장법의 위력 역시 이전과는 천양지차였다. 마치 하늘 밖 세상에서 떨어진 유성에 갈린 것처럼 뒤집힌 땅은,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형은 연호정의 공격을 피해 냈다.
“힘도 좋고, 진기 운용도 엄청나게 섬세해. 아주 좋아.”
연호정이 재빨리 몸을 돌려 다시 한번 흑룡부를 내리쳤다.
쩌어어어어엉!
순간 연호정의 몸이 십여 장 뒤로 밀려 나갔다.
미친 듯이 밀려 나가는 와중에도 두 발로 땅을 밟아 충격을 분산한다. 몸에 밸 대로 밴 극한의 임기응변이었다.
“어허.”
당형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뻗은 그의 손은 멀쩡하기만 했다. 흑룡부에 담아낸 주작화기로도 그을림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다.
“피하진 못할 것이요, 어떻게든 막아 낼 줄 알았건만. 막는 게 아니라 공격으로 상쇄했다, 이건가?”
재차 덤벼들려던 연호정은 순간 움찔했다. 땅을 박차려는 순간 발목에 작은 충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응변의 기지로 충격을 분산했지만, 당형의 가벼운 손짓에서 뿜어져 나온 힘이 발끝까지 남았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난 침투경이다.’
내부를 현무기로 철저하게 막아 두었다. 한데 당형의 침투경은 그것을 너무도 쉽게 파헤쳐 충격을 남긴 것이다.
힘이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氣)의 움직임, 발경의 날카로움이 그야말로 천외천(天外天)의 경지였다.
생전의 경지를 찾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리 쉽게 뚫릴 육신이 아니거늘.
‘이 정도면…….’
힘은 모르겠지만.
‘사음교주에 필적한다!’
침투경만큼은 사음교주에 필적, 혹은 그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우우우웅!
청룡기를 보내 발목의 충격을 완전히 증발시킨 연호정이 재차 당형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허공을 찢어발기며 나아가는 연호정의 왼손에는 어느새 백룡부가 들려 있었다.
비로소 뽑힌 두 자루의 도끼. 당형은 일순간 연호정의 기파가 두 배로 늘어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흑백쌍룡부가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쩌저저저저정! 퍼버버버벅!
마구 베어 내는 참격이 무형의 발경을 뚫지 못하고 땅 이곳저곳으로 튕겨 나가 살벌한 흔적을 남겼다.
쿠궁! 쿠구구궁!
공격 한 번, 한 번이 막힐 때마다 공터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거대한 힘의 충돌, 공기가 비명을 지르고 대지가 신음했다.
화려하게 전진하는 홍염육살공(紅焰六殺功)이 당형을 무자비하게 공격했지만, 당형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은 수공(手功)으로 연호정의 거친 공격을 모조리 튕겨 내고 있었다.
연호정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어떻게 막는 거지?’
발경을 중심으로 한 수공인데, 대체 어떻게 이 거친 공격을 막아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기상천외했다. 도끼를 향해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대충 훑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도 막혔다. 뿜어져 나오는 발경이 기가 막히게 회전하며 후속타를 연달아 튕겨 내는데, 천하의 연호정도 그 기의 운용법을 읽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쩌어어어엉!
온 힘을 실어 흑룡부를 내리친 연호정이 번개처럼 왼손을 뻗었다.
어느새 백룡부를 내려놓은 그의 손이 당형의 멱살을 잡았다.
‘힘으로!’
순간 연호정은 뒤집히는 세상을 보았다.
콰아아앙!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연호정이 놀란 얼굴로 당형을 올려다보았다.
쓰러진 연호정을 내려다보는 당형이 의관을 매만지며 물었다.
“죽일 기세로 오는 거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