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37화 (636/963)

637화. 무극(無極)은 무한(無限) (1)

“부주님!”

그답지 않게 다소 흥분한 기색의 백서를 보며 양천이 피식 웃었다.

“자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건 참 오랜만에 보는구먼.”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무언가. 그래, 무슨 일이기에 그리 헐레벌떡 들어왔나?”

“당가 측, 연 부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그는 백서가 공손히 내민 서신 몇 장을 빠르게 읽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성공할 줄은 알았지. 알았는데…….”

“…….”

“낙원소라고?”

“당가주의 동생이 십 년도 전에 삼교의 하나와 결탁하여 사천 곳곳에 낙원소라는 걸 만든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서신에는 그에 관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양천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무지막지하구만.”

“…….”

“이 정도면 흑도라는 정체성을 저쪽에 양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될 지경이야. 아니 그런가?”

“정말 지독한 일을 했습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지. 힘이 없을 뿐, 흑도 뒷골목에는 저들보다 더 비인간적인 놈들이 우글대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양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좀 심했군. 위계가 무너질 대로 무너졌어. 이걸 당관의 역량 부족이라고 해야 할지, 동생 놈의 야망이 대단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혹은.”

백서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광혈교의 술수가 그만큼 교묘하고 지독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양천이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편한 자세임에도 그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기가 차는구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게야. 신화교가 황궁과 관부를 건드리고 있었고, 사음교는 나를 통해 중원 무림으로의 출정을 위한 교두보를 건설하려 했으며, 광혈교는 중원 침공 일 순위인 사천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어.”

“…….”

“대단하군. 이제는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교활한 놈들입니다.”

“교활하지만 인내심도 깊지.”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추정되는 삼교의 전력은 최소로 잡아도 중원 무림과 전면전을 벌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네. 그만한 힘을 지닌 단체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오랫동안 물밑 작업을 벌여 왔어. 이게 보통 일인가?”

“…….”

“그래, 수장들이야 그런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겠지. 문제는 아랫것들이야. 자신의 세대에 신세계를 보고 싶은 열망이 대단할 텐데, 삼교의 수장들은 그런 수하들의 욕망까지 철저히 다스리면서 지금껏 중원을 공략하고 있었던 것이야.”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조직을 철저하게 다스리고 있군. 동시에, 수장을 향한 신뢰가 너무나도 확고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충의로 무장하지 않으면 이런 대공사는 절대 불가능한 법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그 안에 사람은 많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통제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삼교에는 당장 전쟁을 일으키자는 주전파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주전파 중에는 삼교의 수장에게도 위협이 될 만한 고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제어하여 지금까지 끌어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삼교의 수장들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확실히.’

양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통 그릇은 아니었어.’

그는 사음교주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당연히 무상 지원은 아닐세. 우리도 투자한 만큼은 뽑아 먹어야겠지.’

‘알고 있소.’

‘다만 궁금한 것은 자네가 흑도를 제대로 통합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지. 조직은 돈만 많다고 운용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뼈저리게 잘 알고 있소.’

‘아니, 모를 걸세. 적당한 패거리들 몇 거느려 봤다고 다가 아니야. 수천, 수만 명의 수하 중 두어 명만 입을 잘못 놀려도 조직 전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진다네.’

‘…….’

‘거기까지 통제가 되어야 진정 수장다운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법. 자네는 지금보다 더 성장해야 하네. 적어도 수장으로서는 그러하지.’

반쯤 미치광이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런 대화에서만큼은 닳을 대로 닳은 위정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음교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당시의 양천에게는 사음교주의 깊이가 보이지 않았다.

광기도, 통치력도.

나아가 무공까지도.

‘문제는.’

양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떨떠름한 표정, 막막함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런 작자가 둘이 더 있고, 성천에 비견되는 강자들도 꽤 보유하고 있다는 것.’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차는 일이었다.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린 고수들은 모두가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그릇이라고 정평이 난 괴물들이다. 그들 하나하나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거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반선(半仙)들의 격전장이라 불리던 삼백 년 전 무림과 필적할 만큼 무수히 많은 천재가 득실거리는 지금의 세상.

한데 삼교에도 중원 무림에 비견될 만큼의 고수가 있다면?

‘그야말로 재앙일 테지.’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쉽게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얼마만큼의 전력을 보유했는진 모르겠지만, 많아도 우리 성천만큼은 아닐 테지.’

만약 무극을 연 고수가 많았다면, 굳이 백병신군의 사례처럼 그보다 수준 낮은 고수들을 급파해 잡으려 들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 내부에서도 특수한 상황 때문에 최고 전력들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천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양천이 백서를 보며 말했다.

“신화교의 무장들을 죽였고, 사음교에서 파견한 고수들도 죽였고, 광혈교가 담당하던 사천 역시 정화가 될 거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정말 삼교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군.”

백서의 얼굴이 긴장이 떠올랐다.

“침공을 해 올 것이란 말씀이신지요?”

“전면전을 하려 들지는 않을 걸세. 아무리 화가 나도 그간 투자한 시간이 있거늘 함부로 전면전을 일으킬 순 없겠지.”

“…….”

“하지만, 문제의 근원이 되는 부분들을 도려낼 생각 정도는 할 게야.”

“문제의 근원이라면……?”

“연 부관.”

“……!”

백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천이 턱을 괴었다.

“우리 성천도 그렇고, 각파의 수장들도 고려해 볼 만할 걸세. 다만, 그들이 제대로 정보를 쥐고 있다면 연 부관만큼은 어떻게든 제거하려 들 걸세.”

“……위험하겠군요.”

“위험하지.”

양천이 피식 웃었다.

“본인은 그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

“여하간 사천의 일이 잘 처리되었다니 다행이군. 이제 슬슬 음제에게로 가겠어.”

백서의 얼굴에 다시 긴장이 차올랐다.

“과연 연 부관이 음제를 데리고 올 수 있을까요?”

“……모르지. 성천, 아니 무극을 연 고수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독특해. 착한 사람은 말도 안 되게 착하고, 독한 놈들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독할 거야.”

“예?”

“성격이 극단적으로 변하기 쉬운 경지거든. 나처럼 천품을 유지하는 자들은 많지 않을 게야.”

“……예에.”

“성격도 성격이지만, 그 강함이 문제인데.”

양천의 얼굴에 은근한 걱정이 묻어 나왔다.

“가능하려나 모르겠군. 아무리 천재라지만 그 무공으로 과연……?”

* * *

“괜찮느냐?”

“예?”

당윤이 의아한 얼굴로 당형을 바라보았다.

당형이 웃으며 말했다.

“네 형의 일을 돕느라 무척 바쁘다고 들었다. 이렇게 식사 때마다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당윤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야 쪼개면 언제든 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다만, 네 몸이 상할까 무섭구나.”

“몸이 상하는 것보다 정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입니다.”

“어허.”

“이십 년이 넘도록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별일이 없는 한 시간 날 때마다 찾아뵐 테니, 밥은 저나 형님과 함께 드시지요.”

당형이 피식 웃었다.

막내가 이런 녀석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기억하는 막내는 착하고 때로는 소심했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드러낼 때가 드문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이제 다 커서, 효심 가득한 말도 자연스레 할 줄 아는 녀석이 되었다.

감개무량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벌써 다섯 번째다. 그 질문.”

“몇 번씩 여쭤봐도 대답해 주십시오.”

“오냐. 멀쩡하다 못해 훨훨 날아다닐 것 같다.”

“정말이지요?”

“성천이라는 이름을 얕보지 말거라. 두 개의 단전을 봉인했을지언정, 그만한 힘을 품고 있는 이 육신의 강건함은 너희와 또 다르다.”

당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수준으로는 아버지의 경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면, 정말 괜찮으신 모양이었다.

“애비는 멀쩡하니 네 몸이나 신경 쓰거라. 며칠 전보다 확연히 수척해졌어.”

당윤이 미소를 지었다.

“살이 좀 쪘는데, 덕분에 빠진 듯하니 다행입니다.”

당형이 혀를 찼다.

“네 재능은 그냥 두기 너무나도 아까운 것이다. 대충 일이 마무리되면, 무공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어떠냐?”

“무공…….”

씁쓸한 얼굴로 읊조리던 당윤이 애써 쾌활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형은 당윤의 마음을 이해했다.

당윤은 자신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다. 제대로 수련하기 시작하면, 이 늦은 나이에도 금세 당관의 뒤를 쫓을 수 있을 것이다.

당윤은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당관을 넘어서게 되면 형제간의 우의에 금이 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형이 말했다.

“자존심은 강할지언정, 네 형의 그릇은 충분히 크고 넓다. 네 걱정이 깊을수록 네 형이 못난 사람이 되는 것이야.”

“아, 저는 그런 뜻이…….”

“걱정하지 말고, 뜻이 있다면 거침없이 달리거라. 나나 네 형이나, 네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당윤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만히 당윤을 바라보던 당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윤이 당황해서 어정쩡하게 따라 일어났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

“다 먹기도 했고, 손님도 왔다.”

“예?”

당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네 녀석이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던 무열(武熱)을 제대로 끄집어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지.”

“……?”

잠시 후.

마당으로 나온 당형과 당윤 부자 앞에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식사 중이셨군요. 제가 너무 급하게 찾아온 건 아닌가 싶습니다.”

당형이 고개를 저었다.

“잘 맞춰 왔네. 은인이라 내가 찾아가야 함이 옳지만, 어차피 움직여야 하는지라 미안함을 무릅쓰고 이리 불렀네.”

“별말씀을.”

연호정이 당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당형이 웃으며 물었다.

“밥은 자셨는가?”

“아직입니다. 아침을 일찍 해서.”

“좋구먼. 본디 운동은 빈속에 해야 속이 안 뒤집히는 법이지.”

“예?”

얼이 빠진 연호정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당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은혜를 갚아야 할 것 아닌가?”

“……?”

“다 늙어서 돈도 없고, 이렇다 할 패물도 없고. 그렇다고 암기나 쓸 만한 독을 건네주자니, 내가 이 집안의 주인이 아닌지라 허가 없이 물품을 내줄 수가 없다네.”

“아니, 노선배님.”

“물론 이번 한 번으로 은혜를 다 갚았다고 생각지는 않네. 훗날 시간이 나면 언제든 찾아오게. 뭐가 되었든 도움이 되어 주겠네.”

“그건 감사한데요.”

“됐고, 옆에 숲으로 가세. 널찍한 공터가 있다네.”

당형이 미소를 지었다.

심성 좋아 보이는 그 미소 위, 서늘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부족한 게 많아 보이는군. 몇 가지 채워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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