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정리(整理) (5)
참 어려운 남자라고, 연호정은 생각했다.
“죽이지 않으면 막지 못한다?”
“그렇다네.”
“자신감이 대단하시군.”
“자신감이든 뭐든, 날 막으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야.”
담담하게 말하는 모용군의 얼굴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솔직함으로 가득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닌데.’
흑암제 시절 그가 만났던 모용군 역시 효웅의 기질이 충만했다. 그저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었기에 그러한 면모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모용군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 죄 없는 양민도 필요하다면 죽인다. 내 사람은 철저하게 챙기되, 급박한 상황이라면 냉정하게 포기할 줄도 안다.
그리고 모용군은 그러한 행태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거지.’
누군가가 자신을 이용해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화도 나고 용서도 안 하겠지만, 그 사람의 행위를 이해하고 인정한다.
모용군은 그런 남자였다. 오히려 능력이 있음에도 선을 긋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는 사람에게 평가가 박했다. 세상을 적당히 산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설마하니 자신을 죽이라는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강해진 적 앞에서, 이렇게나 당당하게.
‘자신의 목숨까지 이용한다는 것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명을 좀 해 주겠소?”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밑천을 다 꺼낼 수는 없지.”
“그렇다면 당신을 죽이라는 말은 내 입장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개소리요. 이유도 없이 손을 쓰고 싶진 않거든.”
“…….”
“그것도 내 한계라고 지적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별 신경도 안 쓰니까.”
“그런가.”
“하지만 궁금하군. 타인에게 자신을 죽이라고까지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내 생각도 같네. 난 이런 사람이 아니지.”
“그럼 왜…….”
“자네 때문일세.”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는 지나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귀가 닳도록 들었겠지만, 아무리 봐도 자네는 규격 외야. 그 연배에 그러한 안목과 경험, 전투 능력, 깨달음 등등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
“그렇소?”
“인제 와서는 자네가 정말 그 연배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라네. 차라리 반로환동한 전대의 초고수가 세상을 속였다고 보는 게 더 신빙성이 있을 듯해.”
“과찬이군.”
“아니면 저 망할 광혈교 놈들처럼 그 육신에 누군가의 혼이 들어왔다는 가설도 흥미롭겠군.”
연호정은 괜스레 뜨끔하는 것을 느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되었든 자네는 정상이 아니야. 나 역시 그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심했어.”
“…….”
“그리고 깨달았지.”
“무엇을 말이오?”
“내가 졌다는 것을.”
연호정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하니 모용군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모용군은 담담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과거 무림맹에서 치열하게 싸울 때도 알았지. 나는 진심이었네. 진심으로 자네를 무너트릴 생각이었어. 그리고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였지.”
“…….”
“문제는, 나는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해 자네를 파멸시키려 했지만, 자네에게 있어 나와의 싸움은 무수히 많은 업무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란 것이야. 날 상대하면서 온 힘을 쏟지 않았다는 것이지.”
“…….”
“만약 자네가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했다면, 정말 그랬다면…….”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수도 있지.”
이 말을 하기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상대를 인정하는 것과 상대에게 자신의 심정을 전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모용군은 그것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호정은 긴장했다.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자존심을 접고 진심 가득한 얘기를 한다. 그것만으로도 모용군은 과거보다 성장했다고 볼 수 있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물론 상관하지 않았네. 충격은 받았지만, 항상 최고의 상태로 싸우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나. 다 저마다의 상황이 있고, 그 와중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무슨 문제 때문에 패했다, 만약 정상이었다면 내가 이겼을 것이다, 따위의 말은 패배자의 변명에 불과할 뿐이지.”
“…….”
“하지만 자네가 무극을 열었을 때, 그런 낯간지러운 변명들 하나하나가 전부 진실이 되었네.”
“…….”
“자네는 나를 뛰어넘었어. 나만이 아니라 천하 대부분의 사람이 자네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할 걸세. 재능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뛰어난 것이지.”
얼굴이 다 화끈해질 정도의 과찬이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부끄러워하지도,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긴장했다.
모용군이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어떤 상황이라도 나를 막을 수 있었네. 한데, 이제는 무력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 경지에 올랐어.”
“…….”
“오십 년이 넘게 살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통렬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네. 진심으로.”
“절절하게 느끼고 있소이다.”
“나는 성천의 강자들을 존경하네. 하지만 내가 그들보다 떨어지는 재인(才人)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나 역시 언젠가 그곳에 도달할 테니까. 그런 자신과 믿음이 있으니까.”
“…….”
“그러나 자네는, 나는 물론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우월하네. 오늘에서야 그것을 진심으로, 정말 사무치도록 깊게 인정해 버렸지.”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최고의 전술가는 싸우지 않고도 상대를 제압한다고 했지. 자네는 내게 있어 그러하네. 자네는 자네의 재능으로, 자네의 능력을 보여 준 것만으로도 내게 패배를 안겨 주었어.”
“…….”
“완패일세. 죽이려거든 지금 죽이게. 온전히 패배를 인정한 지금의 나를 죽인다면, 아쉬움은 남겠지만 후회 없이 저승으로 갈 것이네.”
진심이군.
연호정은 느꼈다. 모용군의 말이 허황된 자부심이나 거짓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모용군은 진심으로 좌절한 것이다. 평생 수도 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몇 번이고 일어나 상황을 반전시켰던 그가, 최초로 죽음을 생각할 만큼의 패배를 받아들인 것이다.
‘의외로군.’
천하의 모용군이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물며 자신에게.
가만히 모용군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뭐, 당신이 죽어도 당신을 대체할 사람은 많으니 크게 아쉬울 건 없겠지.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할 거요. 더는 당신 때문에 머리를 쓸 필요가 없을 테니까.”
“…….”
“하지만 당신을 죽이면, 당신을 죽인 나를 비판하고 억누르려는 이들과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겠지.”
“…….”
“누구와의 싸움이 더 힘들지는 모르겠지만, 골라야 한다면 아무래도 익숙한 적과 싸우는 게 더 낫지 않겠소?”
모용군이 눈을 떴다.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 그답지 않은 눈빛이었다.
“역시 자네는 날 죽이려 들지 않는군.”
“당연한 거 아니오?”
“왜 당연한가? 나라면, 그렇게 죽고 싶다면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말고 알아서 죽으라고 진심으로 바랐을 텐데.”
“그건 꽤 매혹적인 말이로군.”
“…….”
“뭐가 됐든 난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요. 적어도 지금은.”
“…….”
“또한, 삼교를 향한 당신의 그 매서운 분노는 분명 중원 무림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문제는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건데.”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슬리는 말이군. 다른 생각이라니.”
“아니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야.”
“말은 좋소. 하지만 그 과정까지 생각한다면 당신은 분명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오.”
“그러한 과정은…….”
“됐소. 그 부분은 그만 얘기합시다. 어차피 했던 얘기의 반복이니까.”
“…….”
“다만, 제안 하나 하지.”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이만 포기하는 게 어떻소?”
모용군의 눈빛이 바뀌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게 무림맹주가 되어야만 하겠소?”
“평생을 그것만 보고 달려온 사람일세. 일평생의 꿈을 접으라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정당한 방법으로, 양민들에게 가해지는 피해나 기타 부도덕한 수를 쓰지 않고, 당당하게 깨끗하게 맹주가 될 생각은 있소?”
‘그렇다.’라는 대답을 모용군은 하지 못했다.
어차피 그러지도 않을 것이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해 봤자 연호정은 믿지도 않을 것이며, 실제로 모용군도 그 외에 다른 방법 따위는 몰랐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오. 만약 당신에게도 명백한 선이 있었다면, 내가 미쳤다고 맹주가 되지 말라는 오지랖을 부리겠소?”
“…….”
“무슨 수를 써도, 어떻게 설득해도 당신이란 사람의 본질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오.”
“참 서글픈 말이로군.”
“하지만 인정하잖소?”
“……그래.”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인정하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연호정은 또 생각했다. 이 모용군이라는 사내는 참 어려운 적이면서도 가끔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연호정이 부드럽게 물었다.
“안 되겠소?”
“……?”
“이런 얘기를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우리 함께 힘을 합쳐서 삼교를 물리치는 데에 집중합시다.”
담담한 목소리에 강한 진심이 실렸다.
모용군이 자존심을 다 버리고 진심을 말한 것처럼, 연호정 역시 친근한 사람에게 말하듯 자신의 묵직한 진심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림인이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자들이오. 하지만 나나 당신이나, 이 땅에 대한 애착은 누구 못지않게 강하지 않소?”
“…….”
“죽을 때 죽더라도, 최소한 우리 터전이 외세에 잡아먹히는 것만큼은 막아 내고 죽어야지. 안 그렇소?”
꿈을 이루려다가 죽느냐, 아니면 내 땅을 지키려다가 죽느냐.
죽는다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겠는가.
“내 집 건사도 못했는데 타지에 나가 성공해 봤자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소? 또 얼마나 후회가 되겠소?”
“…….”
“우리 집부터 지킵시다. 일단 성공리에 지킨다면, 지킨 이후에도 우리 목숨이 붙어 있다면, 그러고도 당신이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려 한다면.”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설득을 하든 지지고 볶든, 말 그대로 죽이든 살리든 합시다. 그게 우선 아니겠소?”
“우선이라…….”
“당신의 꿈은 셀 수 없이 많은 친인척이 득실거리는 집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오. 하지만 그 집이 남의 손에 떨어져 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소?”
“…….”
“당신이 진심으로 그러겠다 하면, 나 역시 진심으로 당신이 하는 일에 제동을 걸지 않겠소. 의심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적대하지 않겠소.”
모용군은 연호정의 진심을 느꼈다.
다른 걸 떠나서, 연호정이 이런 부분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연호정은 자신과 달랐다. 자신은 신뢰를 느껴도 끝까지 의심하지만, 연호정은 한번 믿으면 먼저 뒤통수를 치지 않는 이상 끝까지 믿는다.
어쩌면 그와 같은 단순한 신뢰 역시 스스로에 대한 자신 덕분인지도 몰랐다.
“적을 처치하며 야망을 이루려 하지 말고, 적부터 처치한 연후에 싸워 보자?”
“그렇소.”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모용군이 말했다.
“나는…….”